글: 유앙(劉仰)
11세기부터, 유럽의 기독교회는 십자군의 원정을 시작했다. 제1차 원정은 교회가 만족할 결과를 얻었다.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얼마전에 나온 영화 <<천국>>은 바로 이 시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였다. 성전기사단의 출현으로 교회는 자신의 직업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십자군원정은 나중에 많은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중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정이 있다: 유럽과 머나먼 동방이 직접적인 접촉을 개시하였다는 점이다.
제1차십자군원정후 약 반세기가 지나서, 1147년, 유럽은 제2차원정을 시작하나 실패로 끝난다. 15년후, 머나먼 몽골초원에는 한 남자아이가 출생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났을 때, 손안에는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나중에 이것은 마귀의 상징이라고 하였다. 이 남자아이는 나중에 역사에서 징기스칸으로 칭하는 인물이다. 현대의 의사들은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손안에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다고 한다. 모친의 출산과정에서 어린아이가 핏덩이에 뒤덮일 수 있고, 마침 어린아이가 손으로 잡았다면 징기스칸처럼 마귀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징기스칸이 25세되던 해인 1187년, 아랍의 영웅 살라딘(쿠르드인)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 유럽교회는 즉시 1189년 제3차원정을 개시한다. 결과는 여전히 실패였다. 이때까지, 십자군원정은 근 100년간 지속되었다. 다만, 인류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동안 지속된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13세기로 접어들었다. 1202년, 유럽교회는 제4차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이번 원정은 좀 특별했다. 공격대상이 유럽인 자신이었다. 즉, 동로마제국이었다. 이번 원정에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로마제국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가 점령된 후, 유럽교회는 '성전'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이미 더 이상 동방의 재물을 약탈하겠다는 실질을 감추지도 않았다.
1217년, 재물을 약탈하겠다는 꿈에 눈이 어두워진 십자군은 제5차원정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대상이 이집트였다. 그러나, 이번 원정이 끝나기도 전에 유럽은 징기스칸의 소문을 듣게 된다. 1220년, 징기스칸은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진군한다. 우리는 지금으로서야 징기스칸이 서정(西征)을 시작한 계기가 동서접경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헛점을 노리고 쳐들어간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현재, 우리는 한가지는 믿고 있다. 징기스칸의 곁에는 특수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서 서방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간관계는 오랫동안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1221년, 징기스칸이 파견한 사신이 코카서스지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같은 해 제5차 십자군전쟁은 끝이 난다.
이때의 유럽은 동방에서 밀려오는 몽골군대를 상대해야만 했다. 동유럽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몽골의 철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체 유럽이 곧 몽골인의 수중에 들어갈 형국이었다. 그러나, 1227년, 몽골인들의 공격은 돌연 멈춘다. 금방 유럽교회도 알게 된다. 원태조 징기스칸이 죽은 것이다. 이후 한동안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권력투쟁에 돌입한다. 그리하여 잠시 유럽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된다. 그리하여 1228년, 즉 징기스칸이 죽은 다음 해에 유럽교회는 제6차 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1229년, 원태종 오코타이가 칸의 지위에 오른 후, 몽골의 최고지도자가 확정되었다. 유럽의 제6차 십자군원정도 이 해에 끝이 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유럽인의 동정과 몽골군의 서정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같다. 몽골인들이 멈추면, 유럽인들이 행동을 개시하고, 몽골인들이 행동을 개시하면, 유럽인들은 바로 멈춘다. 마치 어떤 방법이 있어, 몽골의 정보가 유럽에 적시에 전파되었던 것같다. 사실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멀리 당나라때에는 당나라이 수도에 기독교파가 하나 있었다. 중국역사에서 경교(景敎)라고 부르는 일파이고, 유럽교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불리우는 일파이다. 5세기때, 동로마제국의 네스토리우스가 이 일파를 창건하는데, 그는 예수는 사람이고 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럽교회에서는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게 된다. 할 수없이 동쪽으로 옮겨서 발전의 기회를 찾는다. 가장 멀리는 중국까지 갔다. 이 교파는 동쪽으로 전도하는 과정에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코카서스, 인도에 모두 흔적을 남겼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연구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 즉 중국의 경교가 어느 정도 동서문화교류에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종교적인 원인으로 이들의 의사소통업무는 역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몽골인들이 언제든지 서정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하에서 유럽교회들은 동방의 형세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1235년, 몽골인들은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1241년에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가 현재의 헝가리를 점령하고, 비엔나 부근까지 접근한다. 다만, 몽골군대는 다시 진격을 중단한다. 바투의 군대도 돌연 방향을 동쪽으로 되돌려 가버린다. 나중에서야 유럽인들은 알았다. 징기스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가 죽은 것이다. 바투는 바로 돌아가서 권력쟁취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이때, 유럽교회는 알게 된다. 멀리 동방에 몽골인들이 통치하는 제국의 내부에 기독교가 통치하는 작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 군주가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유럽교회는 1245년, 정식으로 몽골에 사신을 파견한다. 이는 역사상 유럽과 중국간에 기록상 남아있는 첫번째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유럽교회의 사신은 Joannes de Carpino(중문으로 柏朗嘉賓)와 프란시스파 전도사들은 교황의 서신을 가지고 몽골인을 만난다. 그들은 몽골의 수도안 카라코룸(Qara-Qorum)까지 가서, 오고타이이후의 칸인 원정종 구육의 즉위식에 참가한다. 유럽교황은 몽골칸에게 보낸 서신에서, 몽골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인 것을 질책하고, 몽골인들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라고 요구하며, 동시에 몽골인들과 정치연맹을 결성할 것을 기도하였다. 원정종 구육은 교황에게 회신을 보내는데, 서신에서는 "너는 서신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만 하고, 기독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지. ....너희는 단지 서양인들만이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너희는 평화를 갈망하고, 너희의 행복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는데, 너희 교황이 즉시 여러 기독교 귀족들을 친히 데리고 찾아와서 배알하고, 평화를 체결하라. 그래야만 우리는 너희가 확실히 우리와의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의 전후에 유럽교회가 몽골에 파견한 사신은 하나뿐이 아니었다. 또다른 것은 도미니크회 전도사인 아스린이 이끈 사절단이 몽골에 도착했다. 몽골칸도 사신을 유럽에 보내어 교황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 중의 하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늘의 법에는, 라틴파, 그리스파, 아르메니아파, 네스토리우스파, 야곱파 및 모든 십자가에 기도하는 사람들 간에는 차이가 없다. 그들은 우리 제국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교황도 그들을 나누지 말고,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보편적인 사랑을 베풀기를 바란다" 역사학자들은 이 서신이 위조되었다고 보기도 하나, 증거는 부족하다. 이서신은 아마도 원정종 구육이 사망한 후의 섭정자에 의하여 초안되었을 것이다. 이 서신을 통하여 몽고에는 확실히 기독교도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몽골의 세번째 칸인 원정종 구육이 기독교도라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기독교도는 모두 당초 유럽에서 이단으로 불리우던 네스토리우스파이다. 이 교파는 유럽교황에 대하여 비교적 모순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유럽정통교회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것을 바라면서도 또한 다시 탄압을 받을까봐 두려워 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한편으로는 유럽교황에게 '신앙고백서'를 보내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으로, 몽골의 입을 빌어, '종교자유'를 요청했다. 당시 몽골칸의 신변에는 확실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인 고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교화외 몽골칸의 정식 직접접촉은 한계가 있었다. 1248년, 몽골의 세번째 칸인 원정종 구육이 사망한다. 몽골칸의 다툼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1249년, 유럽은 즉시 제7차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이 교류과정에서, 우리는 교황이 몽골인들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고 질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십자군도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몽골칸은 교황이 질책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의 사신은 할 수 없이 요구조건을 낮추어 기독교도들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 말에 숨은 뜻은 기독교도가 아니면 죽여도 좋다는 취지였다.
이후, 원헌종 몽케칸을 거쳐, 1260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다. 그는 중국본토에 주력한다. 1270년, 유럽에서는 제8차 십자군원정을 일으키는데, 마지막 십자군원정이 된다. 제1차원정으로부터 계산하자면 거이 200년에 걸친 원정이었다. 교황이 몽골에 사신을 보낸 30년후인 1275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도착해서, 동서교류에 큰 공헌을 한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유럽교황이 몽골과 직접 접촉한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몽골과 손을 잡고 공동으로 이슬람교에 대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방의 제왕들은 유럽의 교황이나 국왕에 비하여 '종교자유'를 더욱 선호했다. 14세기에 들면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제후들이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 유럽교황이 몽골의 기독교도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이슬람교에 대응하려던 의도는 철저히 물거품이 된다.
사람들은 왕왕 이런 명제를 생각한다: 유럽교회의 통치하에서, 어떻게 하여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유럽십자군원정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서 나타난다. 양자간에는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르네상스는 유럽내부의 자체적인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교류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십자군원정은 처음에는 약간이나마 '성전'의 의미가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재물을 쟁취하려는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동방의 재물은 가난한 유럽인들이 침흘리는 대상이었다. 이런 재물은 유럽인들의 기독교의 금욕적이고 청빈을 중시하는 견해를 바뀌게 반들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초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음으로, 르네상스의 내용도 고대그리스, 고대로마로부터 왔는데, 이들 역사문헌은 그리스어를 정종으로 하는 동로마제국에 장기간 보존되어 있었다. 셋째로, 이슬람교는 중국의 제지기술을 배운 후, 대량의 고대그리스 문헌을 번역하고, 이는 거꾸로 유럽교회의 통치하에 있던 유럽인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군원정의 최종결과는 우매한 유럽교회의 통치는 자신의 적에 의하여 문화적으로 패배하게 된다. 이런 국면이 형성된 하나의 원인은 바로 문화교류이다. 그중, 몽골인들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Joannes de Carpino등이 몽골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북방의 초원지대를 보았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은 남송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이 진정한 부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장강유역에 도착한 후, 그는 항주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감탄했다. 항주와 비교하자면,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던 베니스도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299년, 마르코 폴로의 중국에 관한 책이 출판되고, 유럽에서 중세기의 최대 베스트셀러가 된다. 르네상스운동중에도 널리 전파된다. 200년후, 컬럼부스는 마르코폴로여행기를 읽으면서 300여곳에 메모를 해놓고, 그 후에 부유한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기 위해 항해를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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