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왔었다.

by 중은우시 2008. 3. 31.

 

 

글: 문재봉(文栽縫)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의 여행가이고, 베니스의 상인집안에서 태어났다. 1271년 부친, 숙부를 따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유역, 이란고원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동방으로 장사를 하러 왔다. 1275년에 원나라의 대도(북경)에 도착했고, 원세조 쿠빌라이의 신임과 중용을 받았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17년간 거주하여, 화북, 서북, 서남, 화동등지에 모두 족적을 남겼다. 1291년 마르코 폴로는 "활활진공주(闊闊眞公主)"를 호송하여 페르시아(일한국)로 시집보내게 된다. 천주(泉州)의 후저항(後渚港)에서 출발하여, 수마트라(蘇門答臘), 인도등을 거쳐 페르시아에 도착했다. 1295년, 마르코 폴로는 고향인 베니스로 되돌아온다. 1298년 9월 그는 베니스와 제노아(Genoa)간의 보기드문 중세기의 대해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갇혀버린다. 그는 옥중에서 동방에서 보고 들은 바를 구술하고, 함께 감옥에 있던 작가인 루스티치아노(Rusticiano)가 받아적어 책으로 완성하는데, 이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혹은 <<마르코 폴로 여행기>>라고 부르는 책이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는 중국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일본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로도 불리우니,<<동방견문록>>은  인류역사에서 아주 큰 명성을 얻은 것이다. 바로 <<동방견문록>>과 같이 중국문명을 소개한 서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제노아 사람인 컬럼부스는 이에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미주로 가는 노선을 개척하는 장거를 이룰 수도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서 사시(史詩)와도 같은 중국여행 및 이탈리아로의 귀국역정을 기술하여 유럽에서 그의 책은 고전적인 문학작품이 되었다. 그는 이미 동방과 서방을 연결시킨 문화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고, 그의 이름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은 계속하여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에 왔었는지에 대하여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었는지에 대한 가장 큰 의문점은 바로 마르코 폴로가 자신의 여행기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양주(揚州)에서 관리를 지냈다고 썼다. 그러나, 원나라의 모든 역사자료에서, 지금까지 그에 관한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은 역사를 특히 중시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국사(國史)에서 지방지(地方誌)까지 각종형식의 역사자료가 무궁무진하고, 기록은 상세하다. 특히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 대하여는 중국황제의 덕이 사해에 미쳐서 외국인까지 감화받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증이 된다고 생각하여 절대로 놓치지 않고, 크게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원나라때라면 마르코 폴로와 같은 서방인은 색목인으로 취급되어 사회적인 지위가 한족보다 높았다. 마르코 폴로가 조정에서 고위직에 있었고, 특히 특사로 공주를 시집보내는데 호송까지 하였다면, 통상적인 경우에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중국의 역사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조사해야할 자료들을 모두 조사하기 전까지 긍정이나 부정의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리고 700년이래로 양주지구에서는 대량의 지방지가 편찬되었는데, 지금까지 6권이 발견되었다. 만일 현재 발견된 몇 권만을 가지고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부 사학자들은 비록 일찌감치 이런 문제를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그저 의문을 나타내는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영락대전. 참적>>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칸인 아로혼(阿魯渾)은 일찌기 세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황제에게 통혼을 청했다. 이 때가 1297년이고, 마침 마르코 폴로가 말한데로 공주를 호송하여 페르시아에 도착했다는 때와 부합한다. 그리고, 이 일과 페르시아 사신의 이름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 사료에서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고 있어, 이를 근거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머문 적이 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중국에서 마르코 폴로를 연구한 대표적인 인물인 양지구(楊志玖)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공문(<<영락대전.참적>>)내에 마르코 폴로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다만 이 글은 공문이므로 자연히 책임자의 이름만 언급하고 나머지 인물은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마르코 폴로의 중국에서의 관직이 그다지 고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마르코 폴로가 이 사절단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는 사자의 이름과 사절단이 중국을 떠난 시간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매우 규모가 적은 사절단이었으므로, 이 사절단에 대한 파편적인 기록이 일한국의 가장 중요한 공식사서 <<사집(史集)>>내에 보존되어 있는데, 마르코 폴로가 이 책을 보았을 리는 없다. 중국의 공식문헌과 <<마르코 폴로 여행기>>가 부합하는 것은 서로 증빙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보면, 마르코 폴로는 확실히 중국에 온 적이 있고, 바로 이들 사신을 따라 귀국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왜 젓가락, 차, 장성등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지에 대하여,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보고 있다: 첫째, 마르코 폴로의 구술은 모든 면에 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사정 심지어 중요한 사항도 빠트렸을 수 있다. 둘째, 우리가 원나라때의 중국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한다면,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서 빠뜨린 부분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즉, 원나라는 사회등급제를 시행하여, 제1등급은 몽고인, 제2등급은 색목인(돌궐인, 회회인등, 유럽인도 포함됨)인데, 이들은 특권계층이다. 마르코 폴로는 색목인이므로, 등급제도하에서 중국에서 생활권역이 좁았을 것이고, 기본적으로 몽고인, 색목인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식사할 때 젓가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몽고인과 색목인은 차도 마시지 않았다. 비교적 유행한 음료는 말젓(馬乳), 포도주, 과일즙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장성은 언급하지 않은 구체적인 원인은 아마도 당시의 장성은 그다지 웅장하지 않고, 그저 흙으로 쌓은 둑에 불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송나라때 장성은 수리를 하지 않아서 이때는 거의 폐허로 화했을 것이기때문이다. 현재 북경부근의 장성은 명나라때 만든 것들이다. 쿠빌라이시대에 장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때의 장성중 일부를 마르코 폴로가 봤다고 하더라도 보통의 성벽과 다를 바가 없었고, 그다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유럽에는 도시에 성벽으로 둘러싼 경우가 많았었기 때문이다. 13-14세기에 중원에서 내몽고를 여행한 사람들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데, 기본적으로 장성을 언급한 경우는 없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는 왔지만, 장성은 가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에게 어떤 곳이든 모두 가보도록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설사 가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흥취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여행기에 장성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와본 적이 없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유럽학자들은 <<마르코 폴로 여행기>>의 내용이 마르코 폴로 본인의 취사선택에 따라 걸러졌고, 많은 기록이 당시 유럽인들의 사회심리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는데 유의한다. 마르코 폴로 본인도 임종전에 특별히 언급한 바 있다. 그가 얘기한 견문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젓가락, 차, 장성등 회의론자들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마르코 폴로가 살던 곳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와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이유를 제시한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기록한 것은 원나라정부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 남방의 성벽을 대거 철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사(元史)>> <<원전장(元典章)>>, 원나라때 사람의 문집에도 원나라가 강회(江淮)이남의 성벽을 허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마르코 폴로는 이 사실을 기록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만일 중국에 와보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베꼈단 말인가? 그는 책에서 쿠빌라이가 국가의 주요한 도로의 양측에 나무를 심어서 길가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하고, 방향을 가리키도록 하라고 명령한 것을 적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 원나라 법률의 규정과 일치한다. 원나라때의 법령을 모아놓은 <<원전장>>, <<통제조격(通制條格)>>등에는 쿠빌라이의 이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역시 이 일을 기록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이뿐 아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과 마르코 폴로의 숙부의 유언에는 몽고대칸의 패자(牌子)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몽고제국 중앙정부가 발급한 일종의 신분증명이다. 일반적으로 금, 은 등 귀금속으로 제작하며, 이를 소지한 사람은 특권을 가진다. 관련 사적의 기록을 보면, 정부나 고관대작을 위하여 일한 사람들만이 이러한 패자를 지닐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책에서 몽고제국의 각종 패자를 상세히 설명했을 뿐아니라, 쿠빌라이 및 서아시아로 시집간 몽고공주도 그에게 패자를 하사했다고 기록했다. 그의 유산등기에 따르면, 그가 죽을 때까지 몽고대칸의 금으로 된 패자는 그의 수중에 있었다. 이 점은 마르코 폴로가 확실히 중국에 왔음을 설명할 뿐아니라, 그가 원나라에서 신분이 아주 특수했고, 일반상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원나라 역사를 좀 더 이해한 후에 다시 <<마르코 폴로 여행기>>을 읽어보면,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만일 중국에 와보지 않았더라면, 마르코 폴로는 이런 책을 도저히 쓸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책에는 원나라때의 정치, 경제, 사회생활의 구체적인 점을 많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동시대의 유럽,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문헌에서 원나라때의 중국에 관한 이처럼 상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는 원세조 쿠빌라이의 생일, 원나라의 경축행사와 수렵, 원나라의 동북과 서남지방이 전쟁, 아하마의 피습사건, 대도(북경)과 행재(항주)의 번영, 진강의 기독교 교회, 중국각지의 물산, 종교, 풍토인정등을 기록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부친과 숙부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한 이래,...로부터 지금까지, 여하한 사람도 기독교도이건 이교도이건, 타타르인, 인도인 혹은 여하한 종족의 사람이건, 마르코 폴로처럼 세계의 그렇게 많은 지방을 가보고, 현지시찰하고 탐험하고, 마르코 폴로처럼 그렇게 많은 기이한 풍속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마르코 폴로가 책에서 자신을 과장하거나 허풍을 떤 부분이 없지는 않은데(예를 들면, 쿠빌라이의 중용을 받았다거나, 중국에서 고관을 지냈다거나 등), 실제상황은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지위가 혁혁하지는 않았더라면, 중국의 문헌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다. 만일 마르코 폴로의 신분이 정말 특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중국문헌에 반드시 이름이 나타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원나라때 중국은 개방된 대제국이었고, 당시의 특권계층은 몽골인이외에 대량의 중앙아시아인, 서아시아인, 유럽인이 있었고, 이들 외래인들중에서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원나라 말기에, 교황이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황제에게 명마를 바친다. 역사적으로 이는 아주 중대한 사건임에도, 중국의 문헌에는 교황사신의 이름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