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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몽골과 남송의 50년전쟁

by 중은우시 2008. 2. 17.

글: 유계흥(劉繼興)

 

일대천교(一代天驕) 징기스칸은 사장 가장 위대한 군사가였다. 그의 몽골군단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대했던 정복자였다. 징기스칸의 채찍이 가리키고, 말발굽이 닿는 곳은 모두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그는 일생동안 말도 탈줄 모르고, 신체가 유약한 한인(漢人)을 무시했고, 남송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막 병사를 일으켰을 때, 그는 금나라를 가장 강력한 적수로 여겼다. 그러나, 금나라군대는 그를 실망시켰다. 중원에서의 100년간의 호사스런 생활은 이미 여진인들의 상무(尙武) 기풍을 갉아먹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 징기스칸은 금나라의 중도를 점령했고, 금나라는 할 수 없이 조공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했다. 이후 첫번째 서방정벌에서도 징기스칸은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서하(西夏)를 정복할 때 영주대전(靈州大戰)에서 비로소 서하주력군의 그럴듯한 저항을 만났을 뿐이다.

 

역사는 왕왕 농담을 즐기는 것같다. 징기스칸은 죽을 때까지 꿈에도 그가 가장 무시하던 한인들이 몽고정복사에서 가장 강경한 적수가 되고, 가장 씹기 힘든 뼉다귀가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그 아들인 오고타이 칸은 징기스칸이 임종시에 남겨놓은 전략적배치에 따라,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가 1234년이다. 다음 해, 오고타이는 제2차서방정벌에 나선다. 다뉴브강까지 치고 들어간다. 동시에 그는 병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남송을 진공한다. 동로(東路)는 양번(襄樊), 강회(江淮)이고 서로(西路)는 사천(四川)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몽골군은 송나라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다음 해에 동,서 양로군은 각각 양양(襄陽)과 양평관(陽平關)이라는 두 전략요충지를 점령한다. 몽골군은 호북에서 강을 따라 집결해서, 장강을 횡단할 준비를 하였다. 남송에서는 대장 맹공(孟珙)을 구원병으로 파견했다. 맹공은 금방 몽골의 24채(寨)를 연파하고, 강릉대첩(江陵大捷)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몽골군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몽골군대의 백전백승의 신화를 무너뜨렸다.

 

이후 몇년간, 송나라군은 맹공의 지휘하에 몽골군과 장렬하게 대치하며 밀고당기는 전투를 벌였다. 쌍방은 서로 승부를 내지 못했다. 1239년, 대장인 두고(杜)는 여주(廬州, 지금의 합비)에서 몽골동로군의 주력을 대파한다. 몽골동로군은 사상자가 많아서 할 수 없이 철수하게 된다. 맹공도 반격을 가해서 몽골군대를 연파했고, 양번과 신양을 수복했다. 이리하여 기본적으로 몽골동로군의 남송에 대한 위협이 제거되었다. 1240년초, 맹공은 다시 서로몽골군을 격파하고, 대아채대첩(大寨大捷)을 이끌어내고, 기주(夔州)를 수복한다. 양로군으로 나누어 남송을 포위공격하려던 몽골군대는 전면적으로 무너졌다. 1241년, 몽골의 칸 오고타이가 병사하자, 서로몽골군은 사천에서 철수한다. 이로써 6년에 걸친 몽골-남송전쟁은 몽골의 실패로 끝이 난다. 이것은 몽골정복사상 처음으로 겪은 중대한 좌절이다.

 

1241년, 몽골칸 오고타이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구육이 칸의 지위를 승계한다. 그러나 2년만에 그도 죽고 만다. 이 기간동안 몽골군은 일찌기 사천을 침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남송의 대장 여계개(余階)에 의하여 격패당한다. 1251년,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가 몽골대칸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제3차서방정벌을 시작한다. 동시에 남송을 대거 침공한다. 장강의 천험을 피하기 위하여 우회포위전술을 쓰게 된다. 쿠빌라이는 10만대군을 이끌고 먼길을 돌아 대리국(大理國)을 습격하여 멸망시킨다. 그리고 대리국의 마지막 군주인 단흥지(段興智)를 포로로 잡는다. 이때, 남송은 이미 몽골의 대포위만에 들어갔다. 더더욱 불행한 점은 남송의 항몽명장 맹공, 두고가 연이어 병으로 사망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2차몽골-남송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골대군은 3로로 나누었다. 중로군은 몽골칸 몽케가 친히 지휘해서, 사천으로 남하하여 중경을 공격했다. 남로군은 운남에서 출발하여, 광서를 지나 장사를 공격했다. 북로군은 쿠빌리아기 이끌었는데, 직접 악주(鄂州, 지금의 무한)을 공격했다. 삼로군은 악주에서 만나기로 계획했다. 그 후에는 강을 따라 동진하여 바로 임안을 치는 것이며, 일거에 남송을 멸망시키려고 한 것이다.

 

대칸 몽케가 이끄는 중로군은 일거에 성도(成都)를 함락시킨다. 이후 송나라군대는 계속 패퇴하고, 사천의 대부분을 잃게 된다. 몽골군은 가릉강을 따라 남하하였는데, 합주(合州)에서 수비장군 왕견(王堅)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이후, 쌍방은 합주에서 격렬한 공방전을 벌이고, 몇 개월간 대치한다. 몽골군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마음이 조급해진 몽케는 직접 병사를 이끌고 공성에 참가한다. 그러다가 석포(石砲)에 맞아, 그날 밤에 병영에서 사망한다. 중로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할 수 없이 퇴각하게 된다.

 

쿠빌라이가 이끄는 북로군도 오랫동안 악주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하루빨리 군사를 되돌려 칸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마침, 남송의 권신인 가사도(賈似道)가 화의를 요청하자, 쿠빌라이가 바라던 바이므로 받아들이게 된다. 1260년, 남송을 침입했던 모든 몽골군은 물러난다. 제2차몽골-남송전쟁은 몽골대칸 몽케가 전사하고, 3로대군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물러가면서 끝이 난다.

 

몽골대칸 몽케가 합주에서 전사한 후, 그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는 칸위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1260년, 악주의 전선에서 급히 되돌아가던 쿠빌라이와 아릭부케는 각각 개평(開平)과 몽골의 수도인 화림(和林)에서 대칸을 자칭하게 된다. 쌍방은 이때부터 4년에 걸친 내전을 벌인다. 1262년, 산동을 장악하고 있던 한족군벌 이단(李檀)이 반란을 일으키고, 남송과 연락하게 되여, 몽골의 국면은 아주 혼란스럽게 된다.

 

하늘이 내린 영재인 쿠빌라이는 금방 이단의 반란을 평정하고, 1264년에 아릭부케를 철저히 격파함으로써 4년에 걸친 몽골내란을 종식시킨다. 그리고는 다시 남송에 대한 칼을 갈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송은 몽골내전의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가사도가 전권을 장악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않으며, 군정이 날로 부패했다. 이때 발생한 불행한 일은 남송의 사천수비장군인 유정(劉整)이 몽골에 투항한 일이다. 그가 이끌던 수군도 몽골에 귀속되었다.

 

1268년, 몽골은 아술(阿術)을 주장(主將)으로 하고, 유정을 부장(副將)으로 하여, 몽골군대와 몽골에 투항한 남송수군을 이끌고 양번을 공격한다. 몽골군이 처음에 집중 공격한 것은 번성(樊城)이었다. 그러나, 각종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사천에서 증원군을 보내왔다. 양번의 두 성이 받는 압력은 갈수록 커졌다. 1272년이 되어, 양번은 이미 오년간 포위된 상태였고, 양식도 기본적으로 바닥이 났다. 그렇지만 두 성의 군민은 투지만은 불타올랐다. 몽골군은 두 성을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남송의 대장 이정지(李庭芝)는 장귀(張貴), 장순(張順)에게 3천의 병사를 이끌고 성내에 급히 필요로 하는 물자를 휴대하고, 성공적으로 몽골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양양으로 들어간다. 이는 5년만에 처음으로 양양에 들어온 구원병이었다. 이는 성에 있던 군민의 사기를 많이 올려주었다.

 

이후, 양양의 송나라군대는 외부의 송나라군대와 연락하여, 쌍방이 공동으로 원나라군대를 협공하게 된다. 그런데, 반도가 몽골에 투항하여 이 계획을 털어놓게 됨에 따라, 양양의 송나라군대가 몽골군의 매복에 걸려 손실이 크게 되고, 다시는 반격할 힘을 잃게 된다. 1273년, 몽골군은 드디어 번성을 함락시킨다. 수비장군 범천순, 우부는 자살하여, 성과 함께 생사존망을 함께 하였다. 양양은 고립무원이 되어, 수비장군 여문환은 몽골에 투항하고 만다. 6년간 계속된 양번방어전투는 양번이 함락됨으로써 끝이 난다. 이제 남송의 대문은 활짝 열린 것이다.

 

1274년, 쿠빌라이는 몽골군에 한강을 따라 내려가서 장강으로 들어가고 장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도록 지시한다. 남송의 장령들은 하나둘 투항하고, 1276년에 몽골군대는 임안성의 아래에 도착한다. 사태후(謝太后)와 송공종(宋恭宗)은 성문을 열고 나가 투항한다. 남송의 기운이 다한 것이다. 송공종이 투항한 후에도, 남송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계속 저항하였다. 대장인 이정지는 여전히 양주를 굳건히 지켰고, 육수부, 장세걸은 복주에서 단종(端宗)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문천상은 강서일대에서 반몽골세력을 규합했고, 적지 않은 성을 차지했다.

 

이정지, 문천상이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으나, 끝까지 투항하지 아니하여 모두 살해당한다. 남송의 조정은 광동연안에서 계속 몽골에 항거했다. 1279년에는 몽골군과 애산(厓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나, 대패한다. 육수부는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한다. 잔여 송나라군대와 관리들도 속속 바다로 뛰어들어 순국했다. 이에 이르러 남송은 철저히 멸망하게 된다.

 

남송의 몽골에 대한 항거는 50여년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몽골인들은 큰 댓가를 치러야 했으니, 몽골인들에게 남송은 가장 씹기 어려운 뼈다귀였을 것이다. 남송보다 강대했던 금나라도 30년이 되지 않아 철저히 멸망하였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일본이 몽골에서 가장 씹어삼키기 어려웠던 뼈다귀가 아니었냐고 말할지 모른다. 사실상 몽골이 일본침략에 실패한 원인은 태풍이 일본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이 몽골에 항거한 기간도 짧고, 몽골도 일본에 대하여 전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을 몽고에 항거한 기간도 길고, 전투도 가장 많이 치른 남송과 비교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