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수당대운하(隋唐大運河): 지하의 휘황

by 중은우시 2008. 3. 20.

글: 서을(舒乙)

 

중국대운하를 자세히 나누면 두개의 계통으로 나뉜다: 하나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북경에서 항주까지의 대운하)이고, 다른 하나는 수당대운하(隋唐大運河)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대운하이다. 시간도 다르고, 지리적위치도 다르다. 비록 다같이 대운하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개념과 계통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중국대운하라고 하면, 경항대운하로 이해를 하고 있고, 수당대운하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잘 모르고 있다.

 

필자는 다행히 전국정협고찰단으로 두번에 걸쳐 시찰하며 조사한 바 있다. 2006년도에 경항대운하를 고찰하였는데, 10일동안 진행하였다. 2007년말에는 수당대운하를 고찰했고, 역시 10일동안 진행하였다.

 

수양제는 대단한 제왕이다.

 

대운하만 놓고 말하자면 수양제에 대한 평가는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 역사상, 정설로 굳어진 견해는 수양제를 아주 나쁜 통치자로 보는 것이다. 그는 백성들을 동원해서 돈을 물쓰듯이 쓰고, 전쟁을 일으키며, 낭비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나라가 단명황조가 된 죄는 수양제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운하가 있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수양제가 즉위한 것은 605년이다. 그의 부친인 수문제 양견에게서 자리를 넘겨받았다. 617년까지 12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재위기간데 한 가지 큰 일을 했데, 바로 전국의 힘을 모아 대운하를 판 것이다. 이는 그의 웅재대략을 보여주는 것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경천동지의 대업을 이룩한 것이며, 불멸의 업적을 남긴 것이다.

 

현재 보기에, 수양제의 대운하는 최소한 역사상 여섯가지 공헌을 하였다.

 

첫째, 중국대지의 동서남북을 소통시키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대일통을 이루어냈다. 고대에, 육로는 말이나 마차에 의지하거나 걸어다녀야 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으므로 아주 힘들고 느렸다. 그러나, 인류는 일찌기 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를 타면 강을 건널 수 있고, 바다도 건널 수 있다. 빠르기도 하면서 짐도 많이 실을 수 있다. 이는 육지를 다니는 것보다 종종 훨씬 간편했다. 사람과 물건을 배 위에 싣고 사람이 젓거나 아니면 돛을 달면 하루에 수십리 내지 수백리를 갈 수 있다. 이는 인류이동의 비약적 발전이었다. 배가 크면 병사도 운송할 수 있고, 말도 운송할 수 있고, 양식도 운송할 수 있으며, 말먹이인 풀도 운송할 수 있고, 석탄도 운송할 수 있고, 목재도 운송할 수 있다. 이는 인류의 활동공간을 많이 넓혀주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강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남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수양제는 남북대운하를 파기로 결정한다. 아예 동서남북을 모두 물로 연결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수망(水網)을 구성하여, 몇개의 대자연수계(장강, 회하, 황하, 해하, 전당강)을 하나의 수계로 만드는 것이다. 대운하가 있음으로써, 전체 중국국토는 완전히 자신의 황권 범위내에 들어오게 된다. 마치 자기의 품에 들어온 것과 같은 것이다. 과거 역사상 어느 제왕도 이룩하지 못한 것이었다.

 

둘째, 한꺼번에 수십개의 번화한 도시를 형성시켰다. 먼저 강이 있고, 나중에 도시가 생긴다. 도시는 강때문에 생기고 강때문에 번성했다. 큰 도시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된 곳을 말하는데, 인재가 모인다는 것은 분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운수에 종사하는 사람, 운반하는 사람, 세금을 거두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배만드는 사람, 창고를 운영하는 사람, 화물을 모으는 사람, 매매를 하는 사람, 여관을 하는 사람, 식당을 하는 사람, 미인가를 운영하는 사람, 창극오락을 하는 사람, 학교와 같은 기관등도 필요하다. 결국 모이면 모일 수록 이름도 더 멀리 퍼져가게 되고 큰 도시가 되는 것이다. 대운하는 바로 도시의 촉매제였다.

 

셋째, 수나라때의 대운하는 양주(항주 포함), 서안(낙양, 개봉 포함), 북경(천진 포함)의 삼대 세계도시를 만들어 냈다. 양주는 대운하의 기점이고, 서안은 중간점이고, 북경은 종점이다. 대운하는 세 점을 만듦으로써 중국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지닌 도시를 형성한 것이다. 수도가 되기도 하고, 경제중심지가 되기도 하고, 전국정치중심, 경제중심, 문화중심이 되기도 하였으니, 영향이 매우 컸다.

 

넷째, 중원문화를 북방과 남방으로 퍼지게 하였다. 그리고 북방초원문화와 남방의 어미상차수향문화를 중원에 가져왔다. 이리하여 중화문화의 다양화, 상호보완 및 공동번영을 이루게 된다.

 

다섯째, 몇개의 수계를 연결시킴으로써 민족융합과 교류 및 중외국제교류를 촉진시켰다. 대운하는 비단길에 손발을 달아준 것같이, 한편으로는 지중해주변과 중앙아시아의 문화와 중국내륙의 문화를 연결시키고, 퍼져나가게 하였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북방소수민족문화와 중원한족문화를 연결시켜, 중화민족대가정의 형성, 공고 및 확장을 이루어냈다. 이 양자의 문화대교류는 수나라때의 대운하를 판 것으로 인하여 후대에 빛을 발하게 되고, 큰 성과를 이루어낸다.

 

여섯째, 수양제 대운하는 당나라때의 정관지치를 가능하게 해주고, 당나라문화가 세계에 떨치게 만들어준다. 수나라는 짧았지만, 당나라의 장기간통치와 극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수나라대운하의 기초를 잘 닦았기 때문에, 당나라는 정책에서 약간의 조정만으로도 곧바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보기에 수양제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대운하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절반은 지상에 절반은 지하에

 

만일 경항대운하의 절반은 말랐고, 절반은 물이 차있다고 한다면, 수당대운하는 절반은 땅속에 절반은 땅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수나라의 수도는 서도 장안과 동도 낙양이었다. 대운하는 양주에서 출발하여, 먼저 서북쪽으로 간다. 그리하여 안휘성의 회하유역을 비스듬히 지나가며, 하남의 동북부를 거쳐, 황하유역으로 들어간다. 그 후 낙양에 도착한다. 이것이 하반부이다; 이후 동북으로 가서 하북동남부를 지나, 해하유역으로 들어서고, 탁군(북경남쪽)에 이른다 이것이 상반부이다. 이를 합치면 전체적으로 갈 지자(之)의 걸음을 하게 된다.

 

수나라운하는 605년부터 건설되고, 360만민공을 동원하여 물길을 파서 황하와 회하를 연결시킨다. 같은 해에 10만민공을 동원하여 고간구를 소통시키고, 회하와 장강을 연결시킨다. 3년후, 하북민공 100만여를 동원하여 영제거를 판다. 이리하여 북경남쪽까지 연결시킨다. 다시 2년이 지난 후 다시 강남운하를 파고, 여항(항주)에 이른다. 이에 이르러 모두 500여만민공을 동원하여 6년에 걸쳐 대운하의 전체 노선이 개통되는 것이다. 전체 길이는 2700킬로미터에 이르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공정의 하나였다.

 

이 운하는 500여년간 운영한다. 당나라, 오대, 송나라에 이른다. 남송말년에 일부 물길이 흙이 퇴적되어 쇠락하기 시작한다. 이를 대체한 것이 경항대운하이다. 원나라가 금과 남송을 대체한 후, 북경에 수도를 정하면서, 대운하를 남북으로 직선연결하게 된다. 다시는 낙양, 서안으로 가지 않고, 900여킬로미터를 단축시킨다. 그리고는 다시 700여년간 운영하여 오늘 날에 이른다.

 

수당대운하의 쇠퇴는 700년전인데, 그 유적은 지금의 어디일까?

 

현지고찰을 하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황은 약간 복잡하다. 어떤 구간은 나중의 경항대운하에 흡수된다. 주로 양쪽 끝부분이다. 예를 들어 장강이남의 강남운하와 산동임청이북의 영제거의 중북단은 모두 땅 위에 존재한다. 볼 수도 있고, 만져볼 수도 있다. 그리고 고간구와 강남운하는 아직도 수량이 풍부하고, 운송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구간은 버려졌다. 주로 황하이북의 영제거의 상중단의 대부분이 그러하다. 이번 고찰의 수확중 하나는 폐기된 시기가 근대라는 것이다. 슬픈 일은 이 구간이 이미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수당대운하의 상반구간인데, 버려진 후에 보호를 받지 못하였고, 폐수가 지나는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염이 아주 심하여, 목불인견이다. 주요 오염원은 하남 초작, 신향일대의 공업폐수와 하북성연안의 공업과 생활쓰레기이다. 현지 선원과 어민의 회고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수량이 충분했고, 위하에서는 배가 다녔다고 한다. 하남 학벽에서 천진에 이르는 구간에는 돌과 화물을 운반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육로와 철로가 만들어지고, 수량이 부족해지면서 수당대운하의 북쪽구간은 신속히 쇠퇴하여버린 것이다.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다. 세번째 상황은 지하에 묻혀버린 경우이다. 원인은 황하가 역사적으로 몇번의 큰 수재와 물길변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운하의 옛길은 황하의 진흙으로 지하에 묻혀버린다. 이부분은 아주 길다. 대체적으로 수당대운하의 하반구간이다. 즉, 하남과 안휘경내이다. 이부분에도 예외인 구간은 있다. 예를 들면, 안휘성 숙주시 사현의 장구진에는 여전히 물이 있는 옛 운하물길이 남아있고, 25킬로미터에 이른다. 이외에 절대다수의 부분은 땅 속에 묻혀 있다. 지표면상에 수당대운하는 남아있지 않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수당대운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지하의 황토흙속에 이 길고 넓은 대운하의 옛길이 남아있을 뿐이다. 발굴만 하면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발견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약간만 신경을 쓰면 놀랄만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발굴해낸 부두, 침몰한 선박, 창고, 자기를 보게 되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전에 그렇게 번성했던 대운하인가?

 

옛창고, 옛부처상, 옛성, 옛부두, 옛다리, 옛자기

 

수당대운하의 유적지는 두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한가지는 지표면상에 있는 것으로, 연안의 옛성, 옛부처상이고, 다른 한가지는 지하에 있는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발굴해낸 옛다리, 옛부두, 옛창고, 옛도자기이다. 전자중의 옛성벽 예를 들면, 하남 학벽시의 여양진이 있고, 옛부처상은 학벽시 대비산의 북위대불이 있다. 이들처럼 드물게 볼 수 있는 지상유물이 아직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비교적 높은 곳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작은 산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유적은 모두 지하에 있다. 모든 중대한 발견은 모두 고고학적인 성과이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이라면 고대 양식창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양식창고는 낙양, 서안, 상구일대에서 이미 7,8곳이 발견되었다.

 

1970년대, 낙양시 동북의 철로회사의 마당에서 오래된 저장고를 발굴했다. 아주 컸는데, 구경이 12미터, 깊이가 10미터였다. 황토의 지하에 파서 만든 갱이었고, 안에는 양식을 저장할 수 있었다. 출토될 때, 이 옛창고에는 대량의 양식이 발견되었는데, 이미 탄화되었다. 이 옛창고의 위치는 고고학적인 고증을 거쳐서 부두의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너비 100미터, 깊이 12미터의 물길옆에 있었으므로, 이 옛 양식창고는 운하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식창고는 여러개가 발견되었다. 지도에서 보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고, 바둑판과 같은 형태를 띄고 있어, 인공으로 설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창고부지는 아주 정치하게 400여갱이 있었다. 한 창고갱에는 양식 250톤을 저장할 수 있었다. 전체 저장량은 10만톤이상이었다. 더욱 기쁜 일은 창고에서 석비를 발견했는데, 당시의 문서자료에 상당하고,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양식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재하고 있다. 거기에는 양식이 하북, 산동, 하남, 강소에서 왔다고 되어 있다. 왜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 민, 관, 군용이외에 재해구호용으로도 쓰였다. 석비에는 양식창고의 관리인원의 업무분담내용도 기재되어 있다. 누가 무게를 재고, 누가 기록하고, 누가 창고를 막으며, 누가 관리감독하고, 누가 당직을 서며, 누가 총책임자인지 등등이다. 모두 성명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많은 곳은 10여개항이 있다.

 

이로써 볼 때, 이는 아주 정규적인 관청창고였다. 이 창고는 함가창(含嘉倉)이라고 불렀다. 이에 상당하는 것은 기존에 발견된 곳만, 낙구창(洛口倉), 하양창(河陽倉), 회락창(回洛倉), 태창(太倉), 여양창(黎陽倉), 산양창(山陽倉)등이 있다.

 

대운하의 공능이 우선 조운(漕運)에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운하는 실로 국가의 대동맥이었다.

 

역사문헌에 기재된 이름난 낙양 천진교(天津橋), 개봉 주교(州橋)도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들은 모두 운하위의 다리들이었따. 모두 시중심에 있고, 공사가 거대하며, 설계가 아름다워, 당시 빈번한 선박과 사람의 왕래를 증명하는 증거이다. 전문가들은 개봉의 주교는 바로 하나의 공교동(孔橋洞)을 실측한 후, 다시 흙속에 묻어버렸다. 이는 지하대유적박물관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부두유?의 발견도 아주 중요하다. 1999년, 안휘 회북시 백선진 유자촌에서는 수당대운하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했는데, 돌로된 부두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일부 운하의 하상(河床)도 발굴되었다. 아래에는 8척의 당나라때 침몰된 배유적도 나왔다. 또한 수십톤의 자기도 나왔는데, 그중에는 보기 드문 자기진품만 1200점이 나왔다. 이는 당송시기 전국의 유명한 자기생산지에서 나온 유물들이었다. 대운하는 이번 고고학적 발굴로 다시 새로운 명칭을 얻었다: 도자기의 길

 

이 고고학적발굴은 1999년 10대고고학적 발굴중 하나로 인정되었다. 유자마두는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되고, 문화재중 상품들은 회북시박물관에 들어가서, 전문진열장에 전시되고 있다. 유사한 고고학적 발굴은 2007년 안휘성 숙주시에서 두번에 걸쳐 있었다. 운하유적발굴은 이미 주변도시 문화재부서가 주목하게 되었다. 더 좋은 발굴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더욱 오래된 운하

 

수당대운하는 가장 오래된 운하가 아니다. 이전에 동일한 지점에 일부 운하가 이미 존재하였다. 그들이 수당대운하의 전신인 것이다.

 

실제로 수양제의 대운하는 이전의 부분운하를 가지고, 황하와 회하의 일부 자연하도도 이용하면서, 연결시킨 것이다. 당연히 이는 중대한 발전이고 질적인 변화였다. 수양제가 6년만에 대운하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과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사람들이 만든 운하중에는 홍구(鴻溝)와 백구(白溝)가 가장 유명하다.

 

홍구는 고대 황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운하였다. 이는 중국중원 운하의 비조이다. 동주 전국시대에 시작했으니 지금부터 2300년전이다. 남방의 고간구보다 120년정도 늦은 것이다. 홍구의 시작점은 오늘 날의 낙양과 정주 사이이고, 공의시와 형양시의 북부이다. 황하의 물을 남으로 끌어들여, 위지, 태강, 회양을 거쳐 회하로 들어간다. 그 하류에 동쪽으로 빠지는 갈래가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명하게 되는 변하이다. 홍구가 유명했던 것은 바로 초한의 전투가 이 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경계로 하여 초와 한이 나뉘어졌다.

 

백구는 삼국시대 조조가 군사목적으로 판 고운하이다. 204년에 시작하였으니, 지금부터 1800년전의 일이다. 그 전신은 전국시대 황하북안의 운하였다. 먼저 고양제를 쌓고 태행산의 물을 막아 황하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가의 경내로 끌어들였다. 둑을 따라 동으로 흐르게 해서 위휘시를 흘러 준현의 신진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산서에서 내려오는 기수와 만나서 황하로 들어갔다. 기수는 산수이고, 청수라고도 부른다. 조조은 오늘날의 하북 임장일대의 원상을 정벌했다. 물을 막아서 기수를 황하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동쪽으로 흐르게 해서, 양식을 운반하는 통로로 삼았다. 나중에 백구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파게 되는 영제거의 전신이 된다. 영제거는 송나라때 어하(御河)라고 부른다. 명나라이후에는 위하(衛河)라고 부른다.

 

홍구, 백구와 같은 고대의 운하가 존재하였으므로, 운하를 파는 기술과 운하관리에서 경험이 집적되어 있었다. 동시에 수양제는 대운하를 파면서 자연하도도 잘 활용했다.

 

그런데, 홍구도 좋고, 백구도 좋고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유적지를 현지고찰하는 것이 핵심문제이다. 역사문헌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고, 반드시 실증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