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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행

by 중은우시 2008. 1. 2.

글: 월초(越楚)

 

중국역사상 몇개의 황조는 "일세휘황, 이세패망(창업자때는 번성하다가, 2대째 가서 멸망하다)"의 길을 걸었다. 진(秦)나라가 그러했고, 수(隋)나라가 그러했다. 이들은 요역과 세금을 과중하게 매기고,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돈 것이다. <<수서>> <<자치통감>>에서 쓴 내용을 보면, 수문제 양견은 만년에 약간의 과실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가장 큰 잘못이라면 후계자를 잘못 선정한 데 있다. "천하제일의 놀이꾼"인 양광(楊廣, 수양제)은 양견이 평생 모은 집안의 재물을 탕진해버린 것이다.

 

이 수양제 양광은 중국역사상 가장 황음무도한 제왕일 뿐아니라, 좋은 산수를 찾아 여행다닌 "슈퍼 여행가"이기도 했다. 그는 14년간 재위하면서, 세번이나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해에 거의 매년 "출순(出巡)"했다. 중국역사상 아마도 세계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웠던 화려한 여행을 한 것이다.

 

양광의 최대공적이라면 아마도 나중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된 "대운하(大運河)"일 것이고, 이는 객관적으로 백성들에게 이후 오랫동안 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당시 그가 대운하를 파기 시작한 동기의 하나는 오히려 산수를 유람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서. 양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대업원년 봄여름에 양광은 황하이남의 각군의 백여만의 남녀백성을 징집하여, 하(河), 락(洛), 강(江), 회(淮), 절(浙)의 다섯개 수계를 연결시키는 운하를 파게 하고, 연도에 이궁(離宮) 40여개를 만들게 하였다. 이뿐아니라, 강남에서 목재를 모으게 해서, 수만척에 이르는 선박을 건조하게 하였는데, 용주(龍舟), 봉가(鳳), 황룡(黃龍), 적함(赤艦), 누선(樓船)등이 포함된다.

 

이해 가을, 황제위에 앉은지 1년이 된 양광은 첫번째 출순(出巡)을 시작하는데, 목적지는 강도(江都)였다. <<자치통감>> 권180에서 쓴 내용에 의하면, 양광이 탄 용주는 "4층루(四層樓)"였고, 높이가 45척, 길이가 200척이었으며, 윗층에는 정전(正殿), 내전(內殿)과 동서조당(東西朝堂)이 있었다; 중간층은 약 120개에 이르는 '초호화급' 방들이 있었는데, 모두 금옥으로 장식하여 휘황찬란했다; 아래층은 내시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소황후가 탄 상리주(翔舟), 일명 봉가는 용주보다 약간 작았지만 인테리어수준은 용주와 같았다. 또다른 부경선(浮景船)이 9척이 있는데, 모두 3층루의 "수상궁전"이었다. 이들을 바로 뒤따르는 것은 수천척의 각종목적의 호송선이었다. 후궁, 제왕, 공주, 백관등이 탔다. 양안은 이 호화유람선을 줄로 매어서 끄는 섬부(纖夫)만 8만여명에 달하였다. 이외에 "몽동", "팔도" "정가"등 수천척의 배에는 12위의 사병들이 타고 있었다. 선단의 첫부분에서 끝부분까지는 길이가 200여리에 달하였을 정도로 방대했다. 방에는 불빛으로 인하여 강가의 육지까지 모두 환했고, 수만의 기병이 강안을 따라 호위했으며, 이들의 군기가 온 벌판을 수놓았다. 이처럼 호사스럽고 당당한 "출순" 장면은 양광의 선배들인 진시황이나 한무제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연도의 5백리내에 있는 주현에서는 식품을 바쳤는데, 많은 주는 수레 100개분량을 바쳤다. 모두 산해진미였고, 먹고나면 버리거나 묻어버렸다.

 

다음 해 3월, 양광은 강도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육로를 택한다. 거여(車與)를 만들게 하는데, 각주현에서 우모(羽毛, 새의 깃털)를 모아서 바치라고 명령한다. 백성들은 새를 잡기 위하여 온데 그물을 쳤고, 깃털을 제공할 수 있는 새나 짐승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자치통감>>에는 민간전설을 하나 싣고 있는데 아주 풍자적이다. 오정(烏程)이라는 곳에 큰 나무는 백척이 넘는데, 나무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기어오르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 나무위에는 새집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새집의 학을 잡으려고 하는데, 나무를 기어오를 수 없게 되자,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하였다. 학들은 나무가 베어지면 후대가 끊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의 깃털을 뽑아서 아래로 던져주었다고 한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길조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천자제우의, 조수자헌우모(天子制羽儀, 鳥獸自獻羽毛, 천자께서 깃털로 만든 의장을 만들려고 하시니, 새와 짐승들이 스스로 깃털을 뽑아서 바치었다)" 당시 우의를 만드는데 참여했던 장인들이 1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이 사용한 금은전백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양광이 돌아올 때의 행렬도 20여리에 달하였고, 길거리를 꽉 채웠다. 동경에는 1천승 만기의 대의장대열이 호송했다.

 

대업3년, 양광은 다시 기분이 일어, 내몽고의 유림군(楡林郡)까지 북순(北巡)을 가서, 초원의 경치를 보고자 했다. 여행의 편의를 위하여 수십만의 장정을 징집하여, 산에 길을 뚫고, 강에는 다리를 놓았다. 양광은 돌궐의 유목풍경에 흥취가 있어서, 십여만 장사로 하여금 태행산을 뚫게 해서, 병주와 연결되는 도로를 닦는다. 그리고는 50만대군, 10만필의 전마를 이끌고 방진(方陣)을 만들고, 자신은 후궁을 데리고 방진의 중간에 몸을 숨기고, 돌궐의 유목풍경을 감상했다.

 

대업5년, 양광은 다시 장액(張掖)까지 서순(西巡)을 한다. 그는 대사막의 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발연산에서는 양광이 수렵을 하며 놀았다. 수렵한 곳은 주위가 2천리에 달하였는데, 이때 동용한 군대와 백성, 그리고 마필의 수는 부지기수였다.

 

대업6년, 양광은 다시 강도로 유람간다.

 

대업11년, 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양광은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장성으로 북순을 하고 새외의 풍경을 감상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이 군대를 몰고와서 안문관(雁門關)을 겹겹이 포위해 버렸다. 양광은 급히 천하의 병마를 보내어 지원하라고 명령한다. 그리하여 각군의 태수, 현령은 군대를 모아서 그를 구하러 달려왔고, 비로소 포위망을 풀 수 있었다. 이처럼 병사와 백성을 동원한 것은 모두 그가 유람하고 놀기 위한 것이었다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양광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안문관에서 포위를 벗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호호탕당하게 강도로 출순한다. 결과적으로 대업14년에 강도에서 반군에게 피살되어, 진시황이후 두번째 출순길에서 사망한 황제가 된다.

 

양광의 황제로서의 생애는 기본적으로 산수를 유람하면서 보냈다. 그의 유람에서의 사치호화스러움과 낭비의 정도는 전무후무하였다. 단순히 유람의 각도에서만 보자면, 양광은 "천하제일의 유람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람은 아주 창의적이었고, 유람하고 노는데 있어서는 천재적이었다. <<수서>>의 기재에 따르면 양광은 경화궁에서 시위들에게 대량의 반딧불을 붙잡게 하여 여러 개의 곡식담는 용기에 담아두었다가, 밤에 후궁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놀 때, 반딧불을 한꺼번에 풀어놓아서, 졸지에 산과 골짜기가 빛으로 가득차게 하여, 수만개의 등이 밝혀진 것과 같았다고 한다. 양광이 놀았던 규모나 호화스러움은 후세인들이 본뜨고 싶어도 도저히 본뜰 수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