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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중국역사의 분수령

by 중은우시 2007. 12. 26.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여 휘황한 개원성세(開元盛世)가 만들어졌고, 또한 그에 의하여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총애하고, 이임보, 양국충을 신임하며, 안록산을 놔두다가 결국 천하대란을 맞이한 것이다. 후세인들은 그를 동정하면서도 질책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에게도 억울한 점은 있다. 양귀비, 양국충, 이임보등의 사람들보다 더 억울하다.

 

중국역사를 잘 살펴보면, 진한수다은 한족이 가장 휘황했었던 시기이다. 안사의 난이후 잔당오대이후, 송원명청은 한족의 우세가 남아 있지 않았고, 유목민족이 두 개의 강력한 통일정권을 건립했다. 중간이 낀 한족의 두 황조인 송명은 비교적 약소했다. 이렇게 본다면, 죄를 묻자고 치면 이융기가 한족에게는 천고죄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안사의 난과 관련하여 그는 확실히 책임이 있다. (1) 양귀비를 총애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고, (2) 이임보 양국충을 등용하여 현신을 물리쳤으며, (3)  안록산을 신임하여 늑대를 조정에 끌어들였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모두 가장 주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부차적인 이유일 뿐이다. 진정으로 심각한 역사적인 원인은 이융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안사의 난의 근본원인은 병권의 외중내경(外重內輕)에 있고 지방절도사이 칼끝을 거꾸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근본원인은 아니다. 진정한 근본원인은 농경민족의 약화와 유목민족의 강화에 있다. 진시황이 왕전(王剪)에게 대군을 쥐어주었지만, 칼자루를 거꾸로 쥘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한경제때도 칠국의 난때 한나라왕조의 근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병민일체로 중앙이 강대했고, 수도지역의 군사실력이 명명백백하게 우세했다. 당시 한민족은 전시에는 전민개병제로서 외부로는 강적을 맞설 수 있고, 내부로는 국가기본체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수당이래로 이러한 상황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특히 당나라 중기를 분수령으로 하여, 한민족의 군사우위는 점차 상실되며, 유목민족의 군사우위가 점차 명확해 진다. 생각해보라, 당나라에는 5천만인구가 있는데, 10명중의 1명만 뽑아도 500만대군을 갖춘다. 만일 이들이 싸운다면, 안록산이 십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오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록산이 과감하게 이렇게 한 것은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들여다 본 것이다. 이 500만은 그저 양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도의 농경화로 인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야성이 사라졌다. 당나라의 철기농경기술은 이미 상당히 성숙도어, 경지면적이 확대되고, 단위당 생산량도 높아졌다. 인구는 증가하고, 사람들의 생활범위도 좁아졌다. 생활은 더욱 안정되었다. 동시에 법률제도도 완비되어, 사람과 사람간의 문제해결방식이 문명화되었고, 무력을 동원할 기회나 횟수도 줄어들었다. 쓰면 발달하고 안쓰면 퇴화하는 법이다. 백성들에게서 호전적인 의식이 많이 약화되었다.

 

둘째, 강남개발로 경제중심이 남으로 이전했다. 북방의 변경은 주변화되었다. 대운하의 개통은 강남을 더욱 발전시켰고, 당나라때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미 강회지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장성이남과 장성지구는 반농경화된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점거했고, 군사역량이 강대했다. 농업사회중에서도 반유목반농경의 사회였다.

 

셋째, 경작생활에서는 대량으로 소를 사용하고, 말의 수량이 점차 감소했다. 말을 이용하여 물건을 운송하는 필요도 점차 감소하였다. 동시에 밀집된 경작지에서는 말을 달리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은 점차 말을 기르지 않게 되고,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의 수량도 급격히 감소했다. 이리하여 기병의 힘이 쇠약해진다. 그러나, 당시의 원거리전투는 기동성이 중요하고 속전속결에는 말이 중요했다. 보병은 기병에 대하여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넷째, 문관정치로 관료기구가 비대해졌다. 효율도 낮아졌다. 당나라초에는 원래 군사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변방장수가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출장입상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임보에 의하여 이러한 제도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물론 이것도 역사의 필연이다. 송나라가 건국하는 초기에도 문관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군사역량은 정치적인 견제를 많이 받게 된다. 이는 스스로 자기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다.

 

다섯째, 군대직업화는 전쟁의 비용을 증가시켰다. 당나라때부터, 전민개병의 부병제체제는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를 대체한 것은 직업병제도였다. 즉, 모병제이다. 모병제에 의하여 정부는 병사를 기르는데 비용을 많이 쏟게 된다. 그러나, 군사력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그리고, 직업군인의 존재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의 군사역량도 많이 약화된다.

 

여섯째, 부녀의 전족은 전군의 군사능력을 하강시켰다. 부녀 자신의 능력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는 남자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게 되었다. 한족은 부녀의 발만을 묶은 것이 아니라, 전민족의 발을 묶었던 것이다.

 

일곱째, 유가사상의 속박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무술을 사랑하고 전투를 좋아하는 기풍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유목민족은 기술발달로 인하여 군사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아래의 몇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 점을 볼 수 있다.

 

첫째, 철기야금술과 단조기술이 제고되어, 무기는 더욱 가볍고 쓰기 편하게 바뀌었다. 기병들의 기동성과 빠른 돌격에 적합했다. 그러나, 보병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둘째, 말안장기술이 발전해서 기병과 전투마들이 더욱 잘 결합될 수 있었다. 이는 기병의 돌파력과 안정성을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당송때 유목민족의 기병은 한무제때의 흉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최전성기에 이른다. 징기스칸의 철기와 만도는 천하무적이었다. 이는 징기스칸 본인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군사역량이 당시 최고조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사적우세는 바로 당나라중기부터 시작되었다.

 

셋째, 유목민족이 장성양측의 중간지대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목과 농경에서 이중의 군사적인 우세를 확보한다. 원정기동과 신속타격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한 물자조달이 보장되게 되었다. 당나라초기 중기까지는 이 지역을 당나라가 지배하였으나, 잔당과 오대송원명청때는 한족이 계륵처럼 보이지만 핵심인 이 지역을 잃어버렸고, 자연히 연약하고 무력하게 된 것이다.

 

당현종은 역사의 분수령에 서 있었다. 국가대사를 잘못 처리한 점이 있어 안사의 난을 불러온 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연기시키는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국가번영, 백성 부유, 인구의 많음, 제도의 완비는 모두 군사력이 강대해지는 필연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약화되는 요인이 될 것이다. 호랑이나 늑대가 튼튼해지는 것은 강대해지는 것이지만, 돼지나 양이 살찌는 것은 오히려 연약해지는 것이다. 한 민족이 강대해지려면, 반드시 자기의 모든 장점과 조건과 군사역량을 완벽하고 긴밀하게 결합시켜야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