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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골동

중국 골동시장의 황금시대.

by 중은우시 2007. 2. 9.

글: 호혜평(胡慧平)

 

개혁개방이후, 중국의 골동품시장은 원래의 봉쇄상태에서 점차 개방으로 향했다. 각지의 골동거래시장은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고, 명절이나 공휴일을 맞이하면, 거래시장은 사람이 넘쳐나고, 북적거리며,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규모가 가장 크고 인기가 가장 많다. 문화재분야의 관련인사에 의하면 중국골동품시장의 봄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며, 중국골동품시장은 발전공간이 무궁무진하며, 앞날도 밝다는 것이다.

 

현재 수장(收藏)시장은 유례없이 활발한데, 주요한 이유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빠르고, 물질적인 재산이 비교적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때문이며, 사람들의 문화수준도 올라갔고,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더욱 광범위하게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의 손에 공돈이 좀 있어야 수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수장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옛 속담이 맞다는 것을 반영한다. "난세에는 기근을 생각하고, 성세에는 수장을 생각한다"

 

국민생활의 개선과 문화자질이 제고됨에 따라, 골동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중국은 수천년의 골동품수장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온포(溫飽, 배부른 것)에서 소강(小康, 편안히 생활하는 것)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상당한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및 정신적으로 한단계높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특히 현재는 공휴일도 많아지고,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이러한 정신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보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골동품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대상이 된 것이다.

 

수년전에, 전문가가 예언한 것이 있다. 중국의 제4차수장열풍이 곧 올 것이라고. 중국의 수천년의 수장역사상 일찌기 3차에 걸처 전국적인 수장의 열풍이 번진 적이 있다. 각각, 북송말기, 건륭년간, 청말민국초기이다. 이 세번의 수장열기에는 공통된 특색이 있다. 위로는 황제장상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백성까지 모두 수장의 열기에 빠졌다는 점이다. 위조한 예술품, 공예품이 각양각색으로 등장해서 가짜가 진짜로 행세하는 일이 많았다. 시장의 골동, 서화거래가 빈번했다. 연구성과는 계속 나오고, 감상수준도 높아졌다. 현재 나타나는 수장열기는 바로 '태평성대'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완(古玩)이라는 두 글자는 청나라때부터 유래한다. 이전에는 골동(骨董)이라고 불렀다. 소위 '골(骨)'은 "살은 썩어도 뼈는 남는다"는데서 따온 말이다. 이것은 과거에 남긴 것들중 살에 해당하는 것은 떨어져 나가고 정수에 해당하는 뼈만 남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동(董)"은 안다는 뜻이다.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골동"이라는 것은 옛사람들이 남긴 정화(精華)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골동은 그 자체로 매력과 마력을 지니고 있다. 중국의 골동역사는 유구하고, 박대정심하다. 골동은 다시 만들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고, 가치가 보전된다는 특색이 있다. 그리고 아주 깊은 학문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은 골동품수장가의 안목에 좌우되는 것이고, 많은 애호가들이 즐기고 연구하는 분야가 되는 것이다.

 

자기를 예로 들면, 제작은 재료선택, 그림그리기, 자기굽기는 모두 선인들의 지혜가 응집된 것이다. 예를 들어, 원나라의 청화자기(靑花)는 경덕진의 요에서 성공적으로 구워졌고, 이는 경덕진이 자도(瓷都, 도자기도시)로서의 지위를 굳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도자기계에는 아직도 이런 말이 있다. 즉, "청화라면 먼저 선덕(宣德)을 꼽는다는 설"이다. 원인은 선덕청화는 그 공법이 정교하고, 유약이 잘 발렸으며, 조형이 아름답고 기형이 다양하며, 청화의 색이 농염하며, 문양이 아름다와서 오랫동안 이름을 떨쳤다. 실제로 중국 원나라때의 경덕진 청화는 이미 아주 뛰어난 수준이었다. 남경박물관에는 원나라때 경덕진에서 만든 청화인물화훼매병이 있다. 이것은 명나라 영소정왕 목영(沐英)의 묘에서 출토한 것인데, 나중에 민간에 유실되었고, 연구끝에 발견한 것이다. 청화인물화훼매병은 원나라때 경덕진의 작품이고 제작에 사용된 것은 수입청색안료로 창취색을 나타내고, 아주 색이 두텁고, 안료의 색이 깊이 배었다. 여기에 뛰어난 자기굽는 기술을 더해서 청화가 아주 선명하면서도 곱게 되었다. 이것은 도자기사상 청화자기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예술품수장은 이미 아흥과 품위를 대표하는 것일 뿐아니라 일종의 투자수단으로까지 되었다. 주식시장이 계속 불황인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안목을 예술품으로 돌리고 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동일한 투자에 대한 이익율이 금융증권은 15%, 부동산은 21%, 예술품은 30%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양유(糧油, 식량과 기름)는 일푼의 이익, 백화는 10푼의 이익, 주보(珠寶)는 100푼의 이익, 골동은 1000푼의 이익"

 

반세기동안, 중국골동경매업은 비바람이 몰아쳤다. 완물상지(玩物喪志, 골동을 좋아하면 큰 뜻을 잃어버린다)에서 완물상지(玩物尙志, 골동을 좋아하는 것이 뜻을 높이는 것이다)까지, 그리고 완물생재(玩物生財, 골동으로 돈을 벌다)까지. 뛰어난 골동서화는 가격이 영원히 상승할 것이다. 십수년간, 세계에서 두 곳의 유명한 경매상인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경매자료에 의하면, 중국의 명청관요자기의 연간 가격상승률은 22%이다. 국외의 유명한 펀드투자시 가치증식 15%보다도 높다. 정품서화의 가격은 날로 상승하고 있다.

 

민국시기에 어떤 사람이 1원 대양(大洋)을 써서 성화두채배를 샀다. 나중에 노오공사에서 4천 대양으로 미국에 팔아버렸다. 현재의 가격으로 말하자면 3,4만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채배의 현재 가격은 이미 수백만위안이다. 경매시장에서 보면, 필자는 이런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런던예술신문은 매년 도자기시장의 시장가격지수를 매기는데 이 지수는 집단평가를 근거로 한다. 매 지수는 1975년 런던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 실제 매각한 주전자, 병, 향로, 그릇, 잔, 접시등의 20건의 골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조의 매1개의 골동품은 매년 경매회전에 전문가에 의하여 2번 평가받고, 다시 평가한 가격이 매년 매월평균환율로 미화로 환산하여 1975년을 1천달러로 하여 계산하는 것이다. 이 지수로 보면 중국도자기의 시장가격은 1975년이후 점진적으로 상승하여 1990년도에 이미 9000달러에 이르렀다. 9배나 성장한 것이다.

 

골동은 중국전통의 장기투자항목이다. "초재진보(招財進寶)"는 중국고대의 교훈이다. 명청의 진상, 휘상이 부자가 된 후에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호화주택을 지은 후 골동을 수집했다. 황금에는 가격이 있지만, 골동에는 가격이 없다. 집안에 얼마나 많은 보물을 수장하고 있느냐가 이 부자의 문화수준과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고대 부호집안의 남자, 여자는 모두 집안에서 역사문화, 골동서화의 지식을 전수했다. 당대의 재산관리전문가들도 골동지식은 기초과정으로 익혔다. 골동업종은 과거에는 거의 남자들이 독점했으냐, 현재는 여자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고, 사람들의 신뢰성과 친밀도를 높여주는데 큰 작용을 하고 있다.

 

골동시장과 골동수장은 좋은 시장의 기초를 가지고 있다. 1980년대이래로 각지는 골동애호가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많은 골동거래시장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북경의 고완성(古玩城), 반가원(潘家園), 동서유리창(東西琉璃廠), 보국사(報國寺)등, 상해의 예원화보루(豫園華寶樓), 동태로(東台路)등이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고 중천에 뜬 해와 같은 것은 북경의 고완성이다. 영업면적이 1만여평방미터에 달하고, 경영품목도 고대도자기, 주보다이아몬드비취, 고가구, 고카페트, 중외서화, 고시계, 금속공예, 뿌리조각, 지필묵연, 문혁문물등 10대류의 수천개 품종이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날 뿐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최고수준이다.

 

평상시 생활에서 누군가가 골동을 수장하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이 수준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진귀한 골동을 수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이 아주 돈이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중국의 민간에는 골동가격에 관하여 여러가지 얘기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가유전재만관, 불여송자일건(家有錢財萬貫, 不如宋瓷一件, 집안에 만관의 재산이 있더라도 송나라때 도자기 1개를 가진 것만 못하다)", "황금유가, 균요무가(黃金有價, 鈞窯無價, 황금에는 가격이 있지만, 균요-송나라때 도자기-에는 가격이 없다)" 그래서, 시장에서 많은 대기업가, 부자들이 거액을 써가면서 고금중외의 골동을 모으는 것이다. 미국의 록펠러, 홍콩의 서전당(徐展堂), 장종헌(張宗憲), 진건문(陳建文), 대만의 채만림(蔡萬霖)등도 모두 개인박물관을 세울 정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