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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양업(楊業)과 악비(岳飛)에 대한 또 다른 시각

by 중은우시 2007. 12. 28.

글: 위득생(魏得生)

 

송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 북송과 남송이라고 부른다. 양업과 악비는 한 사람은 북송의 명장이고, 한 사람은 남송의 명장이다.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은 양,악의 두 집안에는 영웅들이 많고, 온 집안에 충신과 열사가 나온 것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또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다.

 

양,악 두 집안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그들이 처해 있던 시대적인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양, 악 두집안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이 너무 돌발적이지 않을 것이다. 먼저 북송의 치국이념을 살펴보자. 조광윤은 진교병변으로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후, 그는 수하의 장군들이 그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했다. 그래서 연회를 열어서, 술잔을 높이 들어, 장군들의 은퇴후의 행복한 생활을 축복하였고, 장군들은 이 말을 듣을 때, 즉시 주위의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같이 술잔을 들어 이에 응했다. 연회가 마친 후 장군들은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한잔 술로 병권을 내놓게 하다)이다. 그러나 조광윤은 여전히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정부조직에 생각이 미쳤고, 황제위를 빼앗을 수 있는 일체의 기회나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조씨일족은 어떻게 하였던가? 얘기하자면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없기도 하다. 바로 엄격하게 "1개정부의 2개조직"이라는 조직제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너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는 모호한 구조를 취했다. 이런 조직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모든 관리들이 1개에 또 하나의 직무를 가지도록 했다. 그러나, 실권은 없다.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장군들은 직함은 있지만 권한이 없다. 예를 들어 추밀원(현재의 국방부)의 우두머리이자 전술단위의 우두머리는 모두 문관이 맡았다. 이 제도의 좋은 점이라면, 기본적으로 병변(군사쿠데타)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송나라군대는 대외적으로 전쟁을 하게 되면, 부대는 그저 눈만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북송의 정치환경이다(이런 조직구조는 정신적으로 나중의 남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떤 장군이든, 일단 명성이 나게 되면, 문무대신들이 질시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황제도 마음 속으로 거리낌을 가지게 되고, 날개가 튼튼해지면 병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양가장(楊家將)은 바로 이런 문을 숭상하고 무를 억압하는 시대(昌文偃武)에 살았다. 독재사회에 문신무장은 경제를 몰라도 되고, 군사를 몰라도 되지만, 정치를 모르면 절대 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왕조라는 큰 맷돌은 너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일대명장인 양업은 최소한의 정치적인 감각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북송시대의 양업은 제국의 정치를 몰랐고, 남송시대의 악비도 제국의 정치를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투쟁(내부다툼)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어떻게 보는지를 물문하고, 필자의 현대적인 관점으로는 양업은 동료의 모함에 죽은 것이고, 악비도 동료의 모함에 희생되었다. 전체적으로 그들 두 사람의 죽음은 영웅의 장거(壯擧)와는 거리가 멀다.

 

송원(宋元)이래로, 민간에서는 양가장을 소재로 한 희곡, 소설등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왔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야기는 재미를 추구하고, "충효"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만들어냈다. 양가장의 충성과 용기, 효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북송의 공신인 반미(潘美, 소설희곡에서의 潘仁美)를 간신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양씨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충신열사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졸렬한 짓인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악비일가의 충군애국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작가들이 마찬가지로 갖은 양념을 덧칠해서 진회(秦檜)의 간악함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회의 죄명은 매국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충신양신을 모함하였다는 것이다. 실제의 상황을 보면, 일찌감치 북송때부터 군사조직은 이미 황권에 의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금나라가 한꺼번에 북송의 두 황제를 모두 붙잡아갔을리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황제인 조구도 잘 알고 있었고, 승상인 진회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곤궁한 상황하에서, 남송이 주화(主和)의 길로 가는 것은 적당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주로 악비 그 자신에 있었다. 그는 직도황룡(直搗黃龍, 황룡은 금나라의 수도인 황룡부인데, 이는 직접 금나라의 수도를 쳐부수겠다능 의미임)을 외치고, 포로로 잡혀 있는 남송의 마지막 두 황제를 모셔오겠다고 했다. 이것은 남송의 조구황제가 절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금나라제국의 사람들도 이미 이를 가지고 그를 협박한 적이 있다. 즉, 악비가 병사를 물리지 않으면, 우리는 두 황제를 돌려보내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심했던 것은, 악비가 병사를 이끌고 전선에 나가면서도 황실의 사사로운 일에 개입하는 것을 잊지 않아서, 조구로 하여금 하루빨리 태자를 세우라고 독촉했다.

 

한번 정리해보자. 악비가 직도황룡해서, 두 황제를 모셔오려고 한다; 그는 조구에게 태자를 하루빨리 세우게 해서 남송의 미래황제를 확정해두고자 한다; 여기에 현임황제인 조구가 있다. 만일 악비의 계획대로 실현된다면, 남송에는 4명의 황제(황제후보자)가 나타나게 되는 국면이 형성된다. 악비가 아무리 선의에서 이런 일을 계획했다고 하더라도, 조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두 황제를 모셔올 것인지 말 것인지, 태자를 세울 것인지 말 것인지는 모두 조씨집안의 내부 일인 것이다. 하늘에는 두 태양이 뜰 수 없는데, 하물며 4개의 태양이 뜰 수야 없지 않겠는가. 조구도 생각했을 것이다. 악비..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안되겠다. 그래서 진회에게 지시를 내려서 악비를 전선에서 되돌아오게 하고, 후환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자. 악비는 황제의 눈에 능력있는 명장의 하나였다. 진회라는 인물을 빌려서 처리했고, 자신이 임의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악비는 죽기 전에 계속하여 황상이 그를 '보내려고(죽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담담하게 형을 받은 것이다. 우충(愚忠)의 인물에게는 황상이 내리는 죽음도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일은, 악비는 스스로 죽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아들인 악운(岳雲)도 데려갔다는 점이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것은 송강이 보인 모범이 악비의 몸에서 다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송강은 독이 든 어주를 마시면서, 흑선풍 이규가 알게 되면 사람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고, 송강의 충효라는 깨끗한 이름을 더럽힐 것을 걱정하여 이규를 거짓말로 불러서 독주를 마시게 하였고, 같이 죽었다. 악비도 마찬가지였다. 형을 받기 전에, 그가 걱정한 것은 가족의 안위가 아니었고, 조정의 안위였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 악운, 장헌(張憲)이 반란을 일으켜서 조정에 대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옥졸을 불러 그들을 불러오게 하였고, 함께 죽자고 하였다. 악운이 거절하자, 악비는 친히 아들과 장헌을 묶었고, 그 후에 옥졸에게 자기도 묶어달라고 해서, 세 사람은 풍파정에서 죽어갔다. 악비는 자기의 충효명절을 위하여, 자기의 유방백세(流芳百世, 아름다운 이름을 백세에 떨치다)를 위하여, 자기의 아들도 함께 죽인 것이다. 필자는 이런 우충을, 이런 영웅은 비열하다고 본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21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사람들이 양업과 악비의 그러한 우충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예모가 감독한 <<만성진대황금갑>>이다. 영화에서 대왕은 만성독약으로 황후를 사지에 몬다. 그러면서도 아주 가식적으로 왕후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인의충효"를 천하에 알린다. 왕후는 손발을 묶고 그냥 죽지는 않고자 작정한다. 그러나 그녀의 반항은 모두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실패로 끝난다. 장예모가 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주 간단하다. 왕이 아니면 '인의충효'에 위배되면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천하통일한 왕은 얼마나 인간성에 어긋나고, 천리에 어긋나고, 얼마나 많은 음모나 잘못이 있더라고 이를 언급하거나 들춰내서는 안된다. 신하는 왕에 대하여, 그저 복종하고 우충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런 영화는 충군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유가사상의 정수이다. 그러므로, 최근 사람들이 공자를 존경하는 것이 장예모의 이 영화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바로 부르면 대답하는 벌레나 같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감독에 대하여 이런 부르면 대답하는 벌레에 대하여, 악비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비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