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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역사추리: 이청조(李淸照)는 개가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08. 2. 7.

글: 정계진(丁啓陣)

 

이청조는 남편 조명성(趙明誠)이 죽은 후에, 개가를 하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역대로 서로 상반되는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설에서는 이청조가 일찌기 장여주(張汝舟)에게 개가한 적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일설에서는 이청조는 개가한 적이 없다는 것이며, 개가 운운은 순전히 그녀를 비방하는 말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청조는 개가한 적이 과연 있었을까? 한번 자세히 살펴보고 어느 설이 옳을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가장 먼저 이청조의 개가에 대하여 쓴 것은 이청조가 썼다고 되어 있는 <<투한림학사기종찰계>>라는 서신이다. 이청조가 이 서신을 쓴 이유는 그녀가 불량배인 장여주와의 혼인관계를 벗어나기 위하여 그가 "허위로 과거시험에 참가하였다고 하여 관직을 얻었다"는 내용을 고발하는 것이다. 송나라의 <<신편상정형통>>의 규정에 따르면 이청조의 고발이 사실이라면 그는 2년의 유기징역형을 받게 된다. 장여주는 당시 병부시랑(나중에 한림학사로 개칭)을 맡고 있던 기종찰의 도움을 받아 9일간 구금된 후 석방되게 된다. 그래서, 이청조는 기종찰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이 서신을 쓴 것이다. 자연히, 서신에서는 사정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이상유지만절, 배자장쾌지하재(忍以桑楡之晩節, 配玆驵之下才)", "우흉횡자십순(友凶橫者十旬)", "거영어자구일(居囹圄者九日)"등의 말이 있다. 현존문헌중에 가장 먼저 이 서신을 수록한 것은 송나라 사람 조언위의 <<운록만초>>이고 나중에 청나라때의 여악의 <<송대기사>>에도 수록했다. 송 호자 <<초계어은총화>>, 완열 <<시화총귀>>, 명 구우 <<수공집>>, 청 송장백 <<유정시화>>, 저인획 <<견과집>>, 심근집 <<수옥사>> 부록에도 모두 이 서신을 이청조의 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즉, 이들은 모두 이청조가 개가했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외에 왕작의 <<벽계만지>>, 조공무의 <<군재독서지>>, 홍적의 <<석예>>, 진진손의 <<직재서록해제>>, 이심전의 <<건염이래계년요록>>등은 모두 이청조가 개가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저혀 다른 의견도 있었다. 청나라때 유정섭의 <<계사류고>>, 육심원의 <<의고당제발>>, 이자명의 <<월만당을집>>, 진정작의 <<운소집>> <<백우재사화>> 등에서는 모두 이 서신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고쳐졌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즉, 이들은 이청조가 개가하였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현대의 이청조 연구자들도 두 진영으로 갈린다.

 

이청조가 개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물론 그들 나름의 논거를 지니고 있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논거를 든다:

 

첫째, 이청조는 당시 이미 나이가 많았다. 명나러 서발의 <<서씨필정>>에는 "이(청조)가 쉰 하고 두 살이므로 늙었다"라고 하였다. 동조자에는 청나라 사장정의 <<도기산장사화>>, 유정섭의 <<계사류고>>, 사백규의 <<이이안론>>, 섭정관의 <<구파여화>>, 오형조의 <<연자거사화>>등이 이ㅣㅆ다.

 

둘째, 이청조의 시아버지, 남편이 모두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개가할 리가 없다. 서발의 <<서씨필정>>에는 "청헌공의 며느리이고, 군수의 처이므로 개가할 리가 없다" 이 설에 동조하는 사람으로는 청나라 사장정의 <<도기산장사화>>가 있다.

 

셋째, 송나라때 사람들은 소설에서 자주 현인을 능멸하곤 한다. 노아우는 진운백의 말을 인용하여 청나라때 육이염의 <<냉로잡식>>에 있다. 동조자는 청나라 호미원의 <세한거사화>>, 유정섭의 <<계사류교>>, 이자명의 <<월만당을집>>, 청나라 설소휘의 <<대운루문집>>, 당규장, 반군소의 <<이청조의 후기사를 논하다>>가 있다.

 

넷째, 전해지는 <<투한림학사기종찰계>>의 글솜씨가 뛰어나지 못하고, 문장에 잘못된 곳이 있다. 유정섭의 <<계사류고>>는 이것을 근거로 주장했다.

 

다섯째, 백년후의 송나라 사람의 저작에서도, 이청조는 '조명성의 처'라고 쓴 것이 있다. 유정섭의 <<계사류고>>가 이 설을 주장했고, 동조자로는 하승도의 <<당송사논총>>이 있다.

 

여섯째, <<투한림학사기종찰계>>의 이청조가 개가하였다는 설은 장여주가 이청조에 의하여 그의 죄상이 고발된 데 대한 앙심을 품고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원래 이청조가 장여주를 고발한 것은 그가 자기의 옥호를 편취한데 대하여 한을 품어서이다). 청나라 육심원의 <<이고당제발>>에서 이 설을 주장했다.

 

일곱째, 이청조가 쓴 <<금석록후서>>를  쓴 것과 이심전이 <<건염이래계년요록>>에서 이청조가 장여주를 고소한 것이 시간적으로 1개월내인데, 이는 정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자명의 <<월만당을집>>에서 이 설을 주장했다.

 

여덟째, 당시 조씨집안의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이청조가 개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자명의 <<월만당을집>>에 이렇게 주장했다.

 

아홉째, 후인들이 장여주의 처 이씨가 남편의 죄상을 고발한 일을 이화접목식으로 이청조에게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 설은 이자명의 <<월만당을집>>에서 주장했고, 동조자는 진정작의 <<백우재사화>>가 있다.

 

열째, 조명성, 이청조는 생전에 사랑이 깊었다. 청나라 부조륜의 <<명호우신사이이안거사기>>에서 이를 주장했다. 동조자로는 진정작의 <<백우재사화>>가 있다.

 

열한째, 당시 이청조는 전란을 피해 남으로 가서 각지를 전전했으므로 시간적으로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옹유생의 <<수옥사서론>>에서 이를 주장했다.

 

논거의 수로 보면 적지 않다. 다만, 이들 논거는 모두 존경하는 선인의 과오를 덮어두려는 좋은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감성이 앞서고, 이성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금만 분석해보면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일을 판단하고, 실제적인 역사적인 환경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황성장이 <<이청조사적고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청조가 개가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송나라사람의 기록이고(모두 7명이며, 이들은 엄격한 학자들이었다), 송나라때는 이 일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회의적으로 보고 부정한 사람들은 모두 그후 수백년이 지난 명, 청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의심한 근거는 혹은 그녀의 재주를 아껴서이고, 혹은 봉건관념에 얽매어서이다. 왕중문의 <<이청조사적작품잡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가한 일은 당시이건 현재이건 모두 이청조의 인격을 훼손하는 것이고, 이를 변명한다고 해봤자 이청조의 몸값을 높일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이를 변명해주는 것은 필요없는 일이다.

 

당연히 위의 두 가지 의견외에 일부 사람들은 명확하게 자기의 의견을 표시하지 않고, 의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필자의 의견은 이청조가 개가한 적이 있다는 쪽에 기울어 있다. 이청조는 대담한 기질이 있다. 그녀의 시가에서 나타난 남성적인 흉금과 그녀의 사에서 볼 수 있는 대담한 특징을 보면 개가도 과감하게 해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개가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인격에 손상을 주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녀의 사에 포함된 내용을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