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에 그다지 문명스럽지 않은 전쟁시의 관례가 있었다: 즉, 승전측은 패전측의 사망자의 시체를 큰 길의 양측에 쌓아서, 흙으로 채워넣어 큰 피라미드형의 무더기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을 "경관(京觀)" 혹은 "무군(武軍)"이라고 불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전공을 자랑하였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형성된 관례이다. 기원전 597년 초나라군대가 필(邲, 현재의 하남성 무척 동남쪽)에서 진(晋)나라군대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유례없는 대승리였다. 대신인 반당(潘黨)이 진나라전사자의 시신으로 "경관"을 쌓자고 건의했다: '제가 듣기로 적군에 승리를 거두면 기념물을 만들어, 후순에게 남겨서 전공을 잊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장왕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武)라는 글자의 뜻은 "지과(止戈, 창을 그치다. 전투를 그치다)"라는 의미이다. 즉, 더 이상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금폭(禁暴), 집병(戢兵), 보대(保大), 정공(定功), 안민(安民), 화중(和衆), 풍재(豊財)를 위한 것이다. 이 7가지를 한다면, 자손들이 무공을 잊지 않는다. 현재 나는 두 나라의 자제들의 시신을 들판에 가득 차게 하였으니, 잔폭한 일이다; 군대를 출도아여 제후를 겁주었으니, 집병을 하지 못했다; 폭이불집(暴而不戢)하였으니, 보대도 하지 못하였다: 진나라가 여전히 존재하니, 공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번 전쟁은 민중의 뜻에 위배하였으니, 안민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자신이 덕이 없어 제후와 싸우게 되었으니, 화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나라의 혼란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았으니 풍재도 아니다. 7가지 무덕에 나는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어찌 자손들에게 기념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고대의 성왕은 불경한 자를 토벌할 때, 죄가 극악한 자를 쌓아서 경관을 만들었다. 이런 가장 중한 징벌로 악인에 경고한 것이다. 이번 전투에 사망한 자들은 모두 자기의 국군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것이니 어찌 그들을 쌓아서 경관을 만들겠는가" 라고 하고는 명을 내려 진나라의 전사자들을 잘 매장해주도록 하였다.
<<좌전>>에 나오는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의 습관은 패전국의 전사자들을 쌓아서 경관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초장왕은 경관의 의의에 대하여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좌전>>의 작자는 초장왕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모든 경관에 관련한 기록을 고의로 생략해 버렸고, 초장왕의 이 말을 가지고 일반 전사자들의 시신으로 경관을 쌓는 행위를 비판했다.
<<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진시황은 진나라군대가 그가 어렸을 때 거주했던 한단을 함락시키자, 명을 내려 예전에 그를 괴롭혔던 사람을 전부 "갱살(坑殺)"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불만을 토로한 460명의 유생도 "갱유(坑儒)"했다. 항우도 양성의 수비군들을 "갱살"했고, 신안의 20만진나라전쟁포로를 "갱살"하기도 하였다.
후세의 역사서적에서는 이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서>>에는 왕망이 황제위를 찬탈할 때 그에 반대했던 유신, 적의, 조명, 곽홍등 및 그의 친척을 모두 "갱살"했다고 되어 있다. 이 책에 기재된 왕망의 이들을 주살하는데 관한 조서를 보면, 분명하게 이들의 시체를 쌓으라고 되어 있다. "방육장, 고육척(方六丈, 高六尺, 육장의 너비, 6척의 높이)"로 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에는 6척높이의 깃발을 꽂아서, "반노역적경예(反虜逆賊鯨鯢)"라고 적게 하였다. 이로써 볼 때, "갱" 혹은 "경관", "무군"은 실제로는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시신을 쌓아두는 것이다. 다만, 사학자들은 초장왕이 얘기한 것처럼 극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 혹은 전사한 적군의 시신을 쌓아두는 경우에는 "경관"이라는 용어를 쓰고,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전쟁포로를 도살한 후 시신을 쌓아두는 것은 "갱"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에는 이런 "경관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 418년, 하(夏)나라가 관중으로 진공했을 때, 동진군대의 전사자들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쌓아서, "경관"을 만들었는데, "고루대(骷髏臺)"라고 불렀다.
-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다 실패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전사자들 시체를 쌓아서 경관을 만들었다. 631년, 당태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교섭을 벌여, 경관을 철거하고, 수나라군의 해골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 784년, 군벌 이희열의 반군이 참춘으로 진공하다가 이호에게 패배했다. "만의 수급을 베고, 시신을 쌓아 경관을 만들었다"
- 936년, 요나라는 군벌 석경당을 도와 후당정권을 소멸시킨다. 후당황실인원 및 후강군장병의 시신을 모두 분하의 강변에 묻었는데, "경관으로 만들었다"
- 986년, 요나라군대는 막주에서 송나라군대를 이긴 후에 송나라군의 시신으로 경관을 쌓았다.
- 1410년, 명나라의 대장 장보는 안남으로 진공하여 안남군대를 격파하고, 2000여명의 전쟁포로를 죽여, "경관을 쌓았다"
"갱"에 관한 기록은 역사서에 더욱 많다. 거의 모든 황조마다 있었다. 예를 들면,
- <<후한서, 원소전>>에는 200년 조조와 원소의 군은 관도결전을 벌이는데, 조조가 겨우 이겼다. 억지로 투항한 원소의 부대 하나를 모두 "갱"하였다. 그러나, <<삼국지, 위본기>>에는 이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 258년, 사마소는 제갈탄이 지키는 수춘성을 함락시키고, 동오의 지원군을 포로로 삼는다. 어떤 사람은 오나라사병들이 진심으로 투항한 것이 아니니 모두 "갱"하여야 한다고 건의한다. 사마소는 동의하지 않고, 포로들을 변방지역으로 보낸다. 이로써 볼 때, 당시에도 여전히 쓸모없는 전쟁포로는 "갱살"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 <<진서>>에 기록도니 16국혼란시기에 "갱"에 대한 기록은 더욱 많다. 예를 들어, 310년, 석륵은 진나라 관군장군 양거와 무덕에서 싸운 후, 항복한 병사 만여명을 "갱"하였다. 317년, 전조의 유총은 평양귀족을 진압하고, 사병만오천명을 "갱"하였다. 320년에 석호는 전조의 유요를 격파하고 병졸 1만6천을 "갱"하였다. 321년, 석륵은 진나라 조의의 부대 투항군인 3만명을 "갱"하였다. 349년, 석호가 죽은 후, 여러 아들이 황제위를 다투는데, 작은 아들 석충이 전투에서 패해하여, 그의 사병 3만여명이 "갱"당하였다. 그리고 전쟁포로를 모조리 "갱"하였다는 기록도 많다. 이들 "갱"은 생매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는 401년에 후진이 후량의 여륭이 점거하고 있던 고장성(감숙성 무위)을 장기간 공격하여, 성내에 양식이 없었는데, 여륭은 백성들이 성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했다. 도망치려는 백성들은 모두 "갱"하였는데, 시신을 길에 쌓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이 책에서 말하는 "갱"이 바로 시신을 쌓아두는 "경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말갈3천3백을 모두 "갱"하였다.
북송의 전황이 보주의 반란군을 진압할 때, 먼저 투항을 권유하고, 그 후에 거역한 429명을 "갱"하였는데, 조정에서 칭찬을 받는다. 그너나, <<송사. 전황전>>에서는 전황이 항복한 병사를 "갱"하였기 때문에, 후손이 없었다고 평론하였다.
<<명사>>에도 명나라초의 공신인 상우춘이 적군의 포로를 "갱살"하였고, 서달이 말리려고 하였으나 안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같은 "경관" "갱살"의 관례가 중지된 것은 청나라에 의해서이다. 청나라는 입관후, 이러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고, 전투나 도살이 끝나면, 그 자리에 시신을 묻어주었고, 더 이상 시신을 쌓아놓고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관"과 "갱"은 더 이상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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