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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역사상의 태평성세

by 중은우시 2008. 3. 25.

 

중국역사상 태평성세라고 일컬어지는 경우를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강지치(成康之治) (기원전1017년-기원전961년)

    왕조: 주(周)

    대표인물: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 주강왕(周康王) 희소(姬釗)

   

    서주때의 주성왕, 주강왕이 앞뒤로 40여년간 형성한 안정되고 강성한 정치국면을 가리킨다. 보정대신 주공이 주성왕에게 정권을 넘겨준 후, 성왕과 아들 강왕은 문왕과 무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의 모순을 완화시킨다. 성강시기는 주나라의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역사서에서는 천하가 안정되었고, 형벌도구를 40년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왕이 재위하던 기간동안에는 국력이 강성하고, 경제가 번영하고 문화가 창성하였다. 후세에는 이 시기와 성왕말기의 통치를 합쳐서 "성강지치"라고 부른다.

 

2. 문경지치(文景之治) (기원전180년-기원전141년)

    왕조: 서한(西漢)

    대표인물: 한문제(漢文帝), 한경제(漢景帝)

    

    유방이 서한을 건립한 이후, 제3대, 제4대 황제인 문제와 경제는 큰 개혁이나 혁신을 이룬 것은 없다. 그저 오랜기간동안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었을 뿐이다. 무위지치(無爲之治)로 서한은 점차 강성하고 번영하게 된다. <<한서.식화지>>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초에서 한무제가 즉위하기까지의 70년간, 국내정치는 안정되고, 홍수나 가뭄의 재해만 없으면 백성들은 풍족하게 살았으며, 나라의 창고에는 양식이 가득찼다고 한다. 태창의 양식은 썩어서 못먹을 지경에 이르고, 정부의 창고에 재물이 남아돌고, 경사의 돈만 천백만에 이르고, 돈을 꿰는 끈조차 썩어서 끊어질 정도였다. 이것이 문경지치를 아주 생동감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서한때 문경지치와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은 "한무성세(漢武盛世)"이(기원전141년-기원전87년)다. 한무제는 문경지치의 집적된 국력을 활용하여, 흉노의 위협을 해결하고, 중국의 판도를 넓혔다. 서한 때 또 한번의 성세가 있었으니, "소선중흥(昭宣中興)"(기원전87년-기원전49년) 그것이다. 대표인물은 한소제 유불릉, 한선제 유순이다. 한나라는 한무제의 대규모 해외정벌이후, 국고가 텅빈 상황이 초래되는데, 한동안 정비를 거쳐, 백성의 생활이 점차 문경지치때의 수준으로 회복된 시기를 말한다.

 

3. 광무중흥(光武中興) (25년-57년)

    왕조: 동한(東漢)

    대표인물: 광무제 유수(劉秀)

 

    중국역사상 동시에 천하를 개창하고, 바로 성세를 연 인물은 아주 적다. 유수가 바로 그중 하나이다. 유수는 왕망의 신(新) 정권을 무너뜨리고, 동한을 세운 후에, '부드러움(柔道)'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사회생산력을 회복,발전시키고, 서한말년이래의 사회위기를 풀어냈다. 광무자는 동한초기의 사회안정, 경제회복, 인구증가의 국면을 이끌어냈는데, 이를 '광무중흥'이라 부른다.

  

    동한때 또 하나의 성세로 일컬어지는 시기가 있으니, 바로 "명장지치(明章之治)"(57년-88년)이다. 대표인물은 한명제 유장, 한장제 유단이다. 명장지치는 동한 한명제, 한장제의 통치시기로 정치를 편안하게 하면서 병사를 쉬게 하고 백성들을 살찌우는 정책을 썼다. 그들이 재위할 시기에는 역사상 드물게 관리들이 깨끗했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사회가 안정되었다. 한나라는 확실히 자부심을 가질만한 왕조이다. 서한이건 동한이건 대부분이 괜찮았고, 황제들은 비교적 우수했다. 그리하여 성세가 많이 나타난다.

 

4. 원가지치(元嘉之治) (424년-453년)

    왕조: 남북조

    대표인물: 송문제(宋文帝) 유의륭(劉義隆)

 

    송무제 유유(劉裕)가 죽은 후, 장남인 유의부(劉義符)가 즉위한다. 2년후, 대신 서선지등이 유의부를 죽이고, 유유의 셋째아들인 유의륭을 옹립한다. 그가 바로 송문제이다. 송문제는 유유의 치국방략을 계속 시행하면서, 동진 의희토단의 기초하에 호적을 정리한다. 그리고 백성들이 정부에 진 부채를 면제해준다. 학문을 장려하고, 농업을 일으키며, 현명한 인재를 모으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사회생산력이 발전하며, 경제문화가 번영했다. 이 시기는 동진남북조시기중 국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이다. 역사에서는 원가지치라고 부른다.

 

5. 개황지치(開皇之治) (581년-604년)

     왕조: 수

     대표인물: 수문제 양견

 

     양견은 천하를 통일한 후, 부국을 첫번째 목표로 삼는다. 요역을 낮추고, 부역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의 곤란을 풀어주었고, 국가의 세수를 확보하면서 민생을 안정시켰다. 남북조이래로 호적이 명확하지 않고, 세수가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양견의 개황5년에, 상서 좌복야 고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적법을 추진하였고, 전국적인 호적조사를 실시했으며, 국가세수를 증가시켜, 경제를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위진남북조 이래로 개황성세를 연다.

 

6. 정관지치(貞觀之治) (627년-649년)

    왕조: 당

    대표인물: 당태종 이세민

 

    당태종 이세민은 부친을 따라 수나라에 반기를 들고 개국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현무문사건으로 형을 죽이고 즉위한 후 수나라가 망한 것을 교훈삼아, 민심과 민정과 민의를 중시했다. 그리고 주위의 문무대신들과 결속을 강화했고, 일련의 개명정책을 실시한다. 가혹한 잡세를 감소시키고, 농민에게 노역이나 착취를 줄였다. 관리의 부패를 처벌하고, 공신양장을 우대했다. 과거를 중시했고, 인재선발에 힘썼다. 낡은 정치를 일소하고 열심히 통치했다. 서로 다른 의견도 잘 들어주었고, 통치방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짧은 수년내에 현저한 성적을 거두어 경제와 문화가 빨리 회복되고 발전되었다.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고, 밤에는 문을 잠그지 않는' 태평성대가 도래한다.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정관지치'라고 부르며 이후 통치의 모범으로 삼는다.

  

    당태종이 죽은 후에 당고종 이치가 즉위한다. 연호를 영휘(永徽)라고 하는데, 부친 이세민의 정치방략을 이어받아 국가는 더욱 발전하고 번성한다. 역사적으로 "영휘지치(永徽之治)"(649년-654년)라고 하며 정관지치에 바로 뒤이어진다.

 

7. 개원성세(開元盛世) (713년-741년)

   왕조: 당

   대표인물: 당현종 이융기

  

   개원은 당현종 통치시기의 연호이다. 개원연간에 당나라의 사회경제는 번영했고, 정치는 맑았으며, 인구도 증가하였고, 국가재정수입도 증가하였다. 후세인들은 이 시기를 개원성세라고 부른다.

 

   이후 당헌종때 번진의 발호를 어느 정도 제압하여 원기를 회복하는데, 이 통치시기를 "원화중흥(元和中興)" (805년-820년)이라고 부른다.

 

8. 장흥지치(長興之治) (867년-875년)

     왕조: 오대십국

     대표인물: 후당명종 이사원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집정한 후 구정치를 일소하고, 정치에 힘쓰며 수리공사를 하고, 환관을 죽이며, 백성의 고통을 함께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후당은 비교적 강성하였다. 그는 여러번 군대를 이끌고 거란을 치기도 하였다.

 

9. 함평지치(咸平之治) (998년-1004년)

     왕조: 북송

     대표인물: 송진종 조항

 

     북송 진종때의 소강시기이다. 북송은 경제가 아주 발달하였고, 문화도 아주 높은 수준까지 발전한다. 물질, 정신문명이 모두 잘 발달하였다. 진종은 25년간 재위하였는데, 송진종의 통치시기는 아주 잘 다스려져서, 북송의 통치가 날로 공고히 되고, 국가관리도 날로 완비되어 갔으며, 사회경제도 번성했다.

 

10. 영락성세(永樂盛世) (1403년-1424년)

      왕조: 명

      대표인물: 명성조 주체

 

      명성조 주체는 비교적 잔폭하였고, 황제위도 찬탈한 것이지만, 드물게 보는 명군이었다. 명태조때, 승상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6부를 관장했다. 황제는 모든 것을 친히 처리하여 아주 피로했다. 명성조때 점차 내각제도의 원형이 마련되고, 이 제도는 명청 양왕조에 영향을 준다. 이외에 명성조는 큰일을 벌이기 좋아했다. 영락대전을 편찬하고, 정화를 보내어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에까지 국력을 떨친다. 1421년에 북경으로 천도했다. 이때부터 북경이 계속하여 중국의 중심이 된다. 

 

11. 인선지치(仁宣之治) (1425년-1435년)

      왕조: 명

      대표인물: 명인종 주고치, 명선종 주섬기

 

      인선지치는 명성조 주체이후, 명인종 주고치와 명성종 주섬기가 채택한 관대한 다스림과 식병양민의 정책을 말한다. 명나라초기의 사회경제는 홍무, 건문, 영락의 세 황제를 거치면서 점차 회복하였고, 인종, 선종에 이르러, 사회경제가 번영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내각대학사 양사기, 양박, 양영이 조정을 장악하여, 큰 공을 세운다. 명나라 역사상 보기 드물게 관료사회가 깨끗했고, 경제가 발전하며, 사회가 안정된 시기이다. 후세인들이 '인선지치'로 부르며, 서한의 '문경지치'에 비교한다.

  

      명나라의 또 하나 "홍치중흥(弘治中興)"(1487년-1505년)이 있다. 대표인물은 명효종 주우당이다. 효종은 정치를 열심히 하고, 매일 조회에 참석했을 뿐아니라, 정오에도 오회를 열었다. 이리하여 대신들이 황제와 함께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베풀었다. 동시에 그는 경연,시강을 열고, 신하들에게 치국의 도리를 물었다. 효종은 문화전의정을 시작하였고, 내각과 공동으로 정사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효종조에는 관리들이 깨끗하고 환관이 억제되고 절약이 강조되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았다. 명나라에서 보기드문 경제가 번영한 시기였다.

 

12. 강건성세(康乾盛世) (1661년-1795년)

       왕조: 청

       대표인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강희중엽부터,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번영한 모습을 보인다. 옹정, 건륭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는 130여년에 걸치며, 청나라통치의 최고봉이다. 중국의 일부역사학자들은 강.옹,건으 시기를 '강건성세'라 칭한다. 강건성세의 가장 주요한 표지는 인구증가에 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청나라통치자들이 열심히 통치한 결과로 본다. 그러나 주요한 원인은 명나라말기에 도입된 고구마, 옥수수등 고산량작물이 전국에 보급된 결과이다. 이 성세는 실제로 봉건왕조의 회광반조일 뿐이고, 표면적인 번영이며, 과기, 문화에 있어서는 큰 성과가 없었다. 이 시기에 중국은 서방에 낙후되기 시작하며, 부국강병으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