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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귀곡자)

귀곡자(鬼谷子) : 역사상 기재를 가장 많이 양성한 인물

by 중은우시 2008. 2. 7.

글: 유계흥(劉繼興)

 

중국은 오천년간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역사상의 걸출한 인재들은 모두 이름난 스승에게 배웠다. 그렇다면, 누가 역사상 기재를 가장 많이 배양한 스승일까? 공자일까? 아니다. 공자는 비록 제자 3천을 길렀지만, 이름을 알 수 있는 자는 72명에 불과하고, 이들 학생들 중에서 자공(子貢) 정도가 억지로 기재라고 부를 수 있을 뿐, 대부분은 현덕한 선비이기는 하고, 지식이 많고, 품행이 방정했을 뿐이지, 역사상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기재(奇才)라는 것은 지식을 최대한도로 사회의 실무에서 사용하고, 거대한 위력을 발휘한 자를 말한다. 무로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문으로는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필자가 이해하기로 이런 인재는 일생동안 1명만 배양해 내더라도 스승을 자랑으로 삼을만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모두 4명의 경천동지한 불세기재(不世奇才)를 배양하였다면, 역사상 기재를 가장 많이 배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바로 귀곡자이다. 귀곡자의 성은 왕(王)이고, 이름은 후()이다. 춘추시대 위(魏)나라 사람이다. 자주 운몽산(雲夢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었으며 청계의 귀곡에 은거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귀곡선생이라고 불렀다.

 

중국전통문화에는 "3교9류"가 있는데, 9류중에 일파가 "종횡가(縱橫家)"이다. 귀곡자는 종횡가의 비조라고 공인되었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가장 걸출한 두 제자이다. 이외에 손빈(孫)과 방연(龐涓)도 그의 제자이다.

 

소진, 장의는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두 정치스타이다. 동시에 가장 뛰어난 외교가이기도 하다. 소진은 6국의 재상인을 가지고 각처에 유세를 하여, 6국이 연합하여 강한 진나라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한 사람이 6개국가의 재상을 동시에 겸임하는 것도 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장의는 뛰어난 지모와 변론술로 진나라재상이 되었으며, 소진에 생전에 만들어놓은 6국의 합종(合縱)을 깨트렸다. 이로써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 되었다. 소진이 주장한 것은 합종책략인데, 장의가 주장한 것은 연횡책략이었다. 두 사람의 책략은 상반되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귀곡자는 제자들에게 그의 상황에 맞게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선후로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고 공명을 얻었다. 전국후기의 각 제후와 천하정세를 두 사람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있었다. 태사공 사마천은 일찌기 두 사람을 이렇게 높게 평가한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진정한 경위지사(傾危之士)이다"

 

손빈과 방연은 함께 귀곡자의 문하에서 병법을 배웠다. 그들 둘은 나중에 전국시기의 대군사가가 되었다. 저명한 전투인 "위위구조(圍魏救趙)"는 바로 이들 사형제간에 전개된 것이었다. 방연은 시기를 만나지 못하여 군사조예가 아주 깊은 손빈과 동시대에 태어났다. 그리하여 항상 손빈에게 패했다. 여기에 그는 흉금이 좁아서 손빈을 모해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역사상 방연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사실 당시에 손빈을 제외하고, 방연의 군사재능은 천하무적이라 할만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방연이 귀곡자에게 배움을 마칠 때, 마침 위나라에서 인재를 모집했다. 그는 바로 찾아갔고, 위왕에 의하여 군사 겸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위나라의 병권을 장악했다. 방연이 임명된지 얼마되지 않아, 위나라주변의 제후소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그는 전투마다 승리했고, 백전백승이었다. 위나라는 방연이 있어 천하에 위엄을 떨칠 수 있었다. 송(宋), 노(魯), 위(衛), 정(鄭)의 군주는 위나라에 조공을 보냈고, 위나라에 귀속되었다. 이뿐 아니라, 방연은 당시 아주 강대했던 제나라군대도 격파했다.

 

손빈은 더욱 뛰어난 군사가였다. 그는 귀곡자에게 배움을 마친 후 적지 않은 고난을 겪는다. 동문수학한 방연의 모해로 장애인이 된다. 나중에 제나라 위왕의 인정을 받아 일약 풍운을 질타하고 천하를 주무르는 영웅인물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그는 전투를 잘했을 뿐아니라, 군사이론연구에서도 자신만의 독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후세에 길이남을 <<손빈병법>>을 저술한다. 손빈과 <<손빈병법>>은 역사상 높은 명성을 얻고 있으며, 병성(兵聖)인 손무(孫武)와 <<손자병법>>과 함께 "손자(孫子)"로 나란히 일컬어진다. 지금까지 "병성양손자(兵聖兩孫子)"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서. 예문지>>는 더욱 명확하게, <<손자병법>>을 천하제일로 꼽고, <<손빈병법>>을 천하제이로 꼽았다. 오기병법(吳起兵法)과 범려병법 및 다른 모든 병법보다 위에 놓았다.

 

양대 정치가, 외교가인 소진과 장의, 양대군사가인 손빈과 방연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귀곡자는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평생동안 교안대로 가르키는 지금의 교사들과는 달리, 귀곡자는 스스로 교재도 편찬하였다. 그의 주요한 저작으로는 <<귀곡자>> 및 <<본경음부칠술(本經陰符七術)>>이 있다. <<귀곡자>>는 권모책략과 언담변론의 기교에 치중하고 있고, <<본경음부칠술>>은 양신축예의 도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귀곡자>>는 14편인데 그중 13, 14편은 이미 실전되었다. <<귀곡자>>의 판본으로 자주보는 것은 도장본 및 가경10년 강도진씨간본이다. <<본경음부칠술>>의 전3편은 어떻게 의지를 충실히 하고, 정신을 함양하는지를 적고, 후4편은 어떻게 내재적인 정신을 밖으로 운용하고, 어떻게 내재적인 심신으로 외재의 사물을 처리하는지를 적었다.

 

귀곡자를 대표로 하는 종횡가가 숭상한 것은 권모책략과 언담변론의 기교였으므로, 그의 지도사상은 유가가 숭상하는 인의도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하여, 역대학자들은 <<귀곡자>>라는 책에 대하여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폄하하는 자가 많았다. 이는 유가사상이 장기간 중국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으며, 아주 불공정한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