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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귀곡자)

귀곡자(鬼谷子)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8. 7. 30.

글: 고건중국(古建中國)


"귀곡자"는 신비하고 변환막측하다. 명청의 소설에서 귀곡자는 신선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실제로 역사상 귀곡자는 맹자(孟子), 순자(荀子)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학자이다. 그는 무리를 모아서 학문을 가르쳤고, 책을 써서 자신의 주장을 남겼다. 그리고 <귀곡자>라는 책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1. 귀국자의 실제 성명은?


"귀곡자"라는 칭호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서한(西漢) 말기 유향(劉向)이 편집하여 정리한 <설원(說苑)>이다. <사기>, <논형>등 책에서는 그를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가지 칭호는 원래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당송이후, 일부 사람들은 "귀곡"이 사람의 성(姓)같지 않다고 생각하여 귀곡자의 '실제성명'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오대(五代) 시대의 두광정(杜光庭)은 <선전습유(仙傳拾遺)>에서 이렇게 말한다: "귀곡선생, 진평공(晋平公)시대의 사람. 귀곡에 은거해서 그의 호가 되었다. 선생의 성은 왕(王)이고, 이름은 점(誗)이다. 역시 청계산 속에 거처했다." 원나라의 잡극 <방연야주마릉도(龐涓夜走馬陵道)>에서 귀곡자는 "성이 왕이고 이름은 섬(蟾)이며, 도호는 귀곡선생이다"라고 하였다. 이 명호는 나중에 와전되어 왕선(王禪), 왕후(王詡)로 쓴다. 소설과 평서에서는 더더욱 귀곡자를 "왕선노조(王禪老祖)"라고 불렀다.


실제로 "귀곡"은 분명히 복성(復姓)이다. 상고시대에 성과 씨는 구분되었다. 전국시대에 성, 씨는 합쳐서 하나로 된다. 고대에 성은 단지 희(姬), 강(姜), 사(姒), 영(嬴)등 삼십개 가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파생되어나온 씨는 수천수백이 된다. "씨(氏)"는 서로 다른 종족의 지맥을 구분하는데도 쓰였다. "명씨(命氏)"의 방법은 아주 많다: 사공, 사마, 태사등의 씨는 관명에 근거했다; 무(巫), 축(祝), 도(陶)등의 씨는 직업에 근거했다; 향(向), 시(施), 황보(皇甫)등의 씨는 이 지맥 선조의 이름에 근거했다; 그리고 많은 씨는 귀족의 봉지 혹은 거주지의 명칭에 근거했다. 예를 들어, 진(晋)나라의 대부(大夫) 원암(原黯)은 순(荀, 지금의 산서성 임의현 경내)에 봉해져서 후대는 순을 씨로 삼는다, 역시 진나라의 대부 사회(士會)는 범(范, 지금의 하남성 범현 경내)에 봉해져서 그 후손은 범을 씨로 삼는다. 귀곡자의 조상은 분명히 귀곡에 봉지를 받았거나 거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귀곡을 씨로 한 것이다.


선진시기의 일부 성씨는 후대가 보기에 기괴하다. 예를 들어, 공양(公羊), 곡량(谷梁), 좌구(左丘)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이들 성씨의 사람들 중에는 역사 서적에 이름이 기록된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들 성씨가 손재하였는지 여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진다. 송나라때의 주희(朱熹)등은 <춘추공양전>의 작자인 공양고(公羊高)와 <춘추곡량전>의 작자인 곡량적(谷梁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두 작품은 모두 한나라때 유생이 쓴 것이라고 본 것이다. 만견춘(萬見春)은 공양, 곡량이 모두 '강(姜)과 같은 각운이므로, 이 두 부의 책은 아마도 강씨성의 유생이 쓴 것일 것으로 추측했다. 나벽(羅璧)은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공양, 곡량 두 성은 "전사와 후세를 고증해 보아도 다시는 이 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 송나라사람들의 견해는 당연히 신뢰할 수가 없다. 중국에서 현재도 여전히 사용하는 58개 복성중에는 공양, 곡량, 좌구가 포함되어 있다. '귀곡'은 복성으로서 일찌감치 소실되었고, 게다가 후인들은 두 글자가 기괴하다고 여겨서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같다.


귀곡자의 이름에 대하여는 일찌감치 실전되었다. 선진제자중에서, 문자(文子), 초자(楚子), 정자(丁子), 자화자(子華子)등 성씨만 남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설명하는 것같다. 귀곡자의 영향력이 묵적(묵자), 맹가(맹자), 한비(한비자)등과 비교할 때 손색이 많은 것으로, 그래서 다른 제자의 작품에서도 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귀곡자는 어디에서 학문을 가르쳤나?


많은 사람들은 귀곡자가 은사(隱士)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히 귀곡자는 귀곡이라는 곳에서 학문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도대체 '귀곡'이 어디를 가르키는지를 죽어라 찾아헤맸다.


두 가지 비교적 영향력있는 주장은 바로 영천(潁川) 양성(陽城)(현재의 하남성 등봉현 동남 고성진)과 부풍(扶風) 지양(池陽)(지금의 섬서성 경양현 서북)이다. 당나라때의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풍지양, 영천양성은 귀곡허(鬼谷墟)가 있다. 개략(蓋) 그 사람이 살던 곳일 것이다. 그래서 호로 삼았다" 즉, 사마정은 이 두곳이 아마도 귀곡자의 은거지일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남북조시대의 서광(徐廣)은 이렇게 말한다: "영천양성에 귀곡이 있다. 개략 그 사람이 살던 곳일 것이다 그래서 호로 삼았다." 여기서 '개(蓋)'라는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광은 그저 추측한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은 서광의 추측을 확실한 것으로 바꿔버린다. 당나라때의 두우는<통전>에서 고성현(무측천은 양성을 고성으로 고친다)때 이렇게 말한다: "귀곡은 즉 귀곡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다. 지금 현의 북쪽이다."


그외에 많은 곳에서는 귀곡자의 '유적'이 나타난다. <사기.감무열전>에서는 감무가 "효새(殽塞)에서 귀곡까지 그 지형의 험준하고 평이함을 모두 분명히 알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리하여 섬서의 각 지방에는 귀곡자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삼원현의 청수곡에서 미현의 태백산까지 모두 귀곡자의 살던 집이 있다. 심지어 한중 보성현에는 귀곡자묘까지 나타난다. 위진시기의 황보밀은 귀곡자가 초나라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양호지구에 대량의 귀곡자은거지가 나타난다. 진나라때의 곽박(郭璞)은 <유선시(遊仙詩)>에서 귀곡자는 '청계(靑溪)'에 은거했다고 적었다. 그래서 절강 영파, 강서 상요에도 귀곡자의 '유적지'가 나타난다. 유사한 상황은 더욱 많다. 명인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점이다.


기실, <사기.소진열전>에는 명확히 쓰여 있다: "(소진)동으로 스승을 모시기 위해 제나라에 간다. 귀곡선생에게서 배운다." 즉 귀곡자는 제나라에서 공부했다. 귀곡에 은거한 것이 아니었다. 귀곡은 그저 귀곡자의 먼 조상의 거주지 혹은 봉지일 것이고 세상이 변하면서 귀곡가족은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귀곡자가 제나라에서 공부를 가르친 곳은 아마도 직하학궁(稷下學宮)일 것이다. 직하학궁은 전제환공(田齊桓公)시대(기원전374년-356년)에 만들어진다. 위치는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임치시)의 직문(稷門) 부근이다. 제자(諸子)가 강학논도(講學論道)하던 학술중심이다. <귀곡자>라는 책은 주로 어떻게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지를 얘기한다. 그래서 귀곡자가 문을 걸어잠그고 생활했을 가능성은 없다. 동시대의 엘리트들과 많이 교류하고 소통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귀곡자.권편(權編)>에는 어떻게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에게 유세하는지를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혜있는 사람에게 얘기할 때는 박식한데 의존해야 하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달변에 의존해야 하며, 달변인 자에게 얘기할 때는 요점에 의존해야 하며, 귀족인 사람에게 얘기할 때는 세력에 의존해야 하고, 부자에게 얘기할 때는 고귀함에 의존해야 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얘기할 때는 이익에 의존해야 하고, 천한 자에게 얘기할 때는 겸손에 의존해야 하며, 용맹한 자에게 얘기할 때는 과감함에 의존해야 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얘기할 때는 날카로움에 의존해야 한다." 확실히, 이렇게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과 교류하여야만 비로소 이렇게 정교한 이론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직하학궁은 인재의 결집지로서, 자연히 귀곡자에게 이상적인 선택지였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관자(管子)>가 책으로 된 것은 직하의 제자의 손에 의해서라고 본다. <귀곡자.부언편>과 <관자.구수편>의 내용은 거의 같다. 아마도 바로 직하에 있던 귀곡자 혹은 그의 문하도 <관자>의 편찬에 참여했을 것이다.


3. 귀곡자의 저작과 후세의 이미지


<귀곡자>는 귀곡자의 작품일까? 논쟁이 지금도 많다. 당나라때 <귀곡자>에 주석을 단 악일(樂壹)은 "소진이 그 도의 신비함을 보이기 위하여, 일부러 귀곡이라는 가명을 썼다."고 적었다. 장수절의 <사기정의>, <구당서>, <신당서>등도 이 견해에 찬동했다. 그들은 주요 증거로 <한서.예문지>에 <귀곡자>가 수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소진의 <소자>31편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든다. <소자>의 일문(佚文)은 <귀곡자의 편목 혹은 정문과 비슷해 보이고, <귀곡자>의 일부 어구는 선진의 언어습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나라때의 유종원은 <귀곡자>를 위서(僞書)라고 보았다. 명나라때의 호응린(胡應麟), 청나라때의 요제항(姚際恒)은 더 나아가 문장사상과 언어습관으로 볼 때 이 책은 육조(六朝)의 사람이 위조했다고 본다. 양계초, 전목(錢穆)등도 이 설에 찬성한다.


최근 수십년동안, 출토된 선진, 진,한의 문헌을 깊이있게 연구함녀서, 학계에서는 다시 <귀곡자>의 진위문제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귀곡자>는 분명히 선진(先秦)문헌이라고 확정했다. 선진제자작품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제자의 문인제자는 왕왕 스승의 사상을 정리하고 추가로 설명했다. 그래서 <귀곡자>에는 진한시대의 언어가 들어있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다. <한서.예문지>에 수록되지 않은 고서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마왕퇴 맥서 <춘추사어>, 상박간 <공자시론>, 팔각랑한간 <유가자언>등등이 있다. 그래서 <귀곡자>가 <한서.예문지>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이 책을 후세에 위조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때 문헌에서도 <귀곡자>의 문구를 인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귀곡자>에는 풍부한 도가사상이 담겨 있다. 명나라때의 왕세정은 <귀곡자>에서 얘기하는 "패합장흡지기(捭闔張翕之機)는 대부분 노씨(즉 노자)에게서 나왔다."그리하여 귀곡자와 도교는 여러가지 관계가 있다. 귀곡자 신화의 길은 위진남북조시대 도교의 조신(造神)운동과 관련이 있다. 구겸지, 도홍경을 대표로 하는 도교인물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도교의 방대한 신선체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많은 역사상의 명인과 도가사상을 담은 인물을 이 체계에 집어넣는다. 도홍경의 <진령경업도>에는 귀곡자를 신도진선의 제4등 좌등 13위로 포함시켰다. 도교의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면서, 귀곡자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


중국은 예로부터 탁고자중(托古自重)의 기풍이 있다. 귀곡자같은 신격화된 인물은 자연히 누군가 그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전파하고자 하게 된다. 하단니(夏丹妮)가 통계낸 수당이래로 귀곡자의 이름을 빌어 만들어진 작품은 모두 20여종에 이른다: 간단하게 분류하자면, 도서(道書)로는 <관령내전>, <관령윤희전>, <노자전>, <환단가>, <이허중명서>가 있고, 병서로는 <점기>, <귀곡천갑병사상양술>이 있으며, 오행수술로는 <백호통오경결>, <주역원오수결>, <사복가>, <오명>, <관기색출상도>, <백호경>, <요요경>, <옥함경>이 있으며, 명서(命書)로는 <낙록자>, <전정수>, <귀곡자유문>, <귀곡탁자림>, <귀곡지심과>, <귀곡지심과천경점서>, <상장금귀괘>, <귀천정격삼세상서>, <천수영문>이 있다. 이들 책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후세인물들의 '노력'하에 귀곡자는 종횡술을 연구하는 이론가에서 용병지도, 오행수술에 모두 능통한 은사, 신선, 도교진인이 되어 버렸다.


한나라때의 작품에서는 단지 소진, 장의가 귀곡자의 제자라고만 나온다. 그러나 귀곡자가 후세에 신격화되면서, 그의 제자도 갈수록 많아진다. 원나라 잡극 <방연야주마릉도>에서는 손빈, 방연도 귀국자의 제자가 된다. 명나라때 모원의의 <무비지>에서는 위료자(尉繚子)도 귀곡자의 제자가 된다. 세 사람은 모두 병가에 속한다. 즉 원래 종횡가인 귀곡자는 원,명시기에 이르러 병가의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소진, 장의가 모두 귀곡자의 제자인지는 기실 뭐라고 하기 어렵다. <사기>에서는 소진, 장의가 동시에 귀곡자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했다. 동한때의 왕충은 <논형,답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나 기록하고 있다: "<전(傳)>에 이런 말이 있다. 소진, 장의는 귀곡선생에게 종횡을 배웠다." 이 글에서 얘기하는 <전>은 왕충이 읽은 적이 있는 어느 책을 가리킨다. 앙충이 이 글을 쓸 때는 그 책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에 이런 말이 있다고만 적은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상용수법이다. 이들 작품에서 소진, 장의는 동문이다. 특히 <사기>은 거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 2천년이래로 이 견해를 대다수의 학자들이 믿고 있었다. 1973년 장사 마왕퇴 한묘에서 <전국종횡가서>가 출토되면서 달라지게 된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장의가 활동한 시간은 개략 진혜문왕시기(기원전337-기원전311년)이다. 기원전309년오월에 장의는 위(魏)에서 사망한다. 소진과 장의는 겹치는 점이 있다. <전국종횡가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312년 진, 위, 한이 연맹을 맺어 초, 제, 송연맹과 전쟁을 벌이는 중에, 소진은 문객의 신분으로 당시 초나라의 객경으로 있던 진진(陳軫)에게 계챽을 올려 어떻게 진진이 정적인 장의를 상대하면 될 지를 얘기한다. 즉, 장의가 일찌감치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소진은 겨우 두각을 나타낸 문객이라는 것이다. 소진은 기원전284년 악의가 제를 격파하기를 전후하여 죽었다. 장의와는 사망시점이 이미 20여년 차이가 난다. 두 사람이 전국의 정치무대에서 "한 명이 내려가고 다른 사람이 올라오는"관계였다. 그들이 동창일 가능성은 적은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귀곡자의 제자일 가능성은 있다. 어쨌든 공자의 제자들도 나이 차이가 3,4십세씩 나는 경우는 있으니까. 최소한 소진은 귀곡자의 제자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일찌기 소진이야말로 <귀곡자>의 작자라고 여겼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귀곡자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했을까? 기실 귀곡자는 그저 종횡술을 연구한 이론가이다.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이론을 실제에 연결시키켜야 한다. 그리고 이 말의 전제는 바로 이론과 실제는 불가분이라는 것이다. 공자, 묵자, 한비자등은 모두 치국의 이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정치적 실천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만일 정말 귀곡자가 각국의 군신을 유세하였다면 아마도 소진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위 "문도유선후(聞道有先後), 술업유전공(術業有專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