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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귀곡자)

귀곡자(鬼谷子)는 어떻게 4대전략가를 가르쳤는가?

by 중은우시 2015. 2. 21.

글: 이봉선(李奉先)

 

어렸을 때 연환화를 보기를 좋아했고, 소진(蘇秦), 장의(張儀), 손빈(孫臏), 방연(龐涓), 나아가 그들의 스승인 귀곡자에 빠졌다.

어른이 된 후, 나는 이 전설적인 색채가 충만한 지혜의 스승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나중에 나는 알게 되었다. 전체 춘추전국시대에 지속되던 전쟁과 살육에서 기실 대다수상황은 모두 장의의 동문사형제들이 자신의 경세치국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하여 진행한 '모의고사'였다는 것을. 그들의 공동의 스승인 귀곡자 선생은 진령의 깊은 곳에 숨어서 화초를 심고, 제자를 길렀으며, 자신의 각과 졸업생들이 세상의 싸움이라는 시험장에서 보내오는 답안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련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귀곡자의 제자는 유명한 병가의 대표자인 손빈, 방연, 종횡가의 대표자인 소진, 장의, 그리고 이회(李悝)를 스승으로 모셨던 상앙(商鞅)도 이회 다음에 귀곡자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외에 귀곡자의 유명한 제자로는 모수(毛遂), 서복(徐福), 감무(甘茂), 사마착(司馬錯), 악의(樂毅), 범수(范睢), 노중련(魯仲連), 재택(財澤), 추기(鄒忌), 역이기(酈食其), 괴통(蒯通), 황석(黃石), 이목(李牧), 위료(魏僚)가있다.

대단하다. 세외고인 귀곡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니, 명성이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전국시대 내지 진한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얼마나 많이 활약했던가. 귀곡자에게는 커다란 명예이자 자부심일 것이다.

귀곡자선생의 졸업생은 마치 모두 후기지수인 진(秦)나라에 가서 실습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같다. 학교를 바꾸고 스승을 바꿨던 상앙을 제외하고서라도 장의때부터 시작항, 감무, 사마착, 범수, 위료, 서복은 모두 진나라에서 재상이나 장수가 되었다.

기괴한 것은 귀곡자의 또 다른 학생들은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받들어, 진나라로 들어간 사형제와 적대하는 진영에 섰다. 그들은 소진, 모수, 노중련, 악의, 추기, 역이기, 황석, 이목등이다. '귀곡자춘추전국엘리트학원'의 1기졸업생대표인 손빈, 방연과 마찬가지로, 이들 동문사형제는 자신의 졸업논문답변을 순조롭게 통과하기 위하여, 자신의 스승에게 보여줄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자 주인을 모시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비린내나는 대항을 벌이고, 수백년에 이르든 전국진한의 국면을 철저히 교란시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춘추전국사는 바로 귀곡자학술연구를 실천하는 시험의 역사라고. 귀곡자는 세상사의 변환을 요리하고, 천하를 손바닥위에 놓고 놀았다.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할지는 귀국자가 어느 학생에게 어떤 사상전략을 수여했는지를 보아야 하고, 결국 그가 만들어놓은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기인. 은거고수의 고심막측에 박안규절(拍案叫絶)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선생에 대한 숭배로 필자는 계속 귀곡자를 찾았던 것같다. 섬북 백운산을 여행할 때, 나이든 도인은 일찌기 필자에게 귀곡자를 더욱 신기하게 소개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귀곡자는 대선인(大仙人)이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때, 부자중 성이 왕(王)씨가 있었다. 그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한번은 딸이 뒷정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답기 그지없는 꽃에서 곡식 낱알을 하나 발견한다. 부지불식간에 이 곡식을 입에 넣고 삼킨다. 누가 알았으랴 곡식은 뱃속에서 태아로 바뀌어 하루하루 커져갔고, 나중에 아들을 하나 낳는다. 부친은 딸이 집안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노한다. 그리하여 딸을 심하게 때린 후, 집에서 쫓아낸다.

왕씨집안의 딸은 막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구걸을 한다. 천신만고끝에 한 산앞에 섰다. 그 산은 안개와 구름이 가득했고, 오래된 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였으며, 새는 노래하고 꽃은 향기를 품었다.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그래서 이 곳에 정착한다. 이 산이 바로 운몽산이다. 나중에 이 사내아이는 후세에 이름을 떨치는 귀곡자가 된다.

귀곡자는 어려서부터 전설이 많다. 이는 자연히 후인들이 그들의 이해와 바램을 가지고 가져다 붙인 것일 것이다. 다만 귀곡자가 손빈, 방연, 소진, 장의라는 군사가, 전략가를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나이든 도인은 이렇게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에서 근대까지, 운몽산은 계속하여 사원이 많이 있으면서 금벽휘황하고 향불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상유례없는 문화대혁명때는 향불이 끊겼을 뿐아니라, 사원의 건물은 모조리 파괴된다. 칠성동은 순식간에 쇠락해버린다.

그 해에 사원을 떠날 때는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질 때였다. 발을 멈추고 되돌아보니 감개무량했다.

귀곡자를 찾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귀곡자는 운몽산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귀곡자 선생이 수도하고 은거한 운몽산을 배알하는 것만해도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선현의 유풍을 찾으려는 꿈은 이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필자가 귀곡자를 추적한 것은, 그가 춘추전국을 교란시켰기 때문이다. 그 때, 상앙변법을 통하여 국력이 강성해진 진나라는 급히 동방각국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과 대등해지려고 했다. 다만 동방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왕을 칭했고, 둘아가면서 패자가 되었다. 오직 진나라의 국군만 여전히 '공(公)'이었다. 이것은 '왕(王)'보다 한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같은 등급이 아니다. 명부정언불순(名不正言不順)했다. 대등하게 앉는다는 것은 꺼낼 수도 없었다. 제,위의 국군을 팽성에서 만나면서 새로 등극한 진공 영사(嬴駟)는 그들을 치켜세워주었지만, 위혜왕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 영사는 맹세를 한다. 진나라가 왕을 칭하게 될 때 반드시 설욕하겠다고. 그러나 현명한 신하가 보좌해서 계책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었고, 수구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장의는 초나라에서 '옥을 훔쳤다고 무고당한다' 그리하여 소양가신으로부터 심하게 맞아 하마터면 황야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절학을 지닌 장의는 마찬가지로 명군을 만나 포부를 펼치고자 했고, '절국(초나라를 빼앗기로)'하여 '절옥(옥을 훔쳤다)'의 모욕을 갚겠다고 맹세한다. 영사와 장의는 모두 천하를 품을 뜻을 지녔다. 모두 자신이 강대해져서 설욕하고자 했다. 그러나 모두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의가 진나라로 들어가서 진공 영사를 만나자 옛날 친구를 만난 것같았다. 그대 동방열국은 합종으로 진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장의는 영사의 면접을 받을 때, 연횡으로 합종을 파괴하는 책략을 내놓는다. 영사는 크게 찬탄한다. 그리하여 장의를 재상으로 삼는다. '명리지도(名利之徒)' 장의는 자신이 말만 앞서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이 제안한 '상선발교(上善發交)'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서서 위나라에 유세를 떠난다. 그리고 병력 하나도 쓰지 않고, 가볍게 위나라가 오랫동안 점령해왔던 하서의 땅을 돌려받는다.

진나라의 역사는 상앙의 시애에서 장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국의 국면을 주도하는 주도권도 진나라가 가지게 된다. 장의는 어떻게 하여 이런 능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는 귀곡자의 득의문생이기 때문이다.

이때 필자는 귀곡자를 추적했다. 나는 돌연 어렸을 때의 연환화를 떠올리게 된다. 장의등이 나서기 전에 귀곡자는 이미 그들을 위하여 문제를 낸다. 귀곡자가 손빈과 방연에게 내준 것은 한 가지 물건을 써서 한 칸의 방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방연이 선택한 것은 장작을 패서 방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손빈은 마른 가지와 앞을 가져와서 불을 붙여서 불빛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귀곡자가 손빈과 방연에게 내준 두번째 문제는 무슨 방법을 쓰던 그를 방안에서 방밖으로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방연의 선택은 협박이었다. 스승이 나오지 않으면 불을 질러서 집을 태워버리겠다고 한 것이다. 손빈이 선택한 것은 유도였다.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방안에서 방밖으로 나오게 할 수는 없지만, 방밖에서 방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하여 귀곡자는 방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때,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는 어린 나의 마음 속에 세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째는 총명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선량하고 일처리에서 방법을 강구하고,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 되고자 한 것이다. 둘째는 반드시 귀곡자처럼 교묘한 문제를 내줄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었다. 셋째는 좋은 사람은 고난을 많이 겪지만, 나쁜 사람은 결국 응보를 당한다는 것이었다.

귀곡자를 찾기 위하여 필자는 계속 그에 관한 사료를 연구했다. "귀곡자는 성이 왕이고 이름이 후(詡, 일설에 따르면 利)이다. 일명 왕선(王禪)이다. 호는 현미자(玄微子)이다. 춘추말전국초의 사람이며, 선진제가중 한 사람이다. 귀곡자는 종횡가의 비조일 뿐아니라, 병가의 저명한 대표인물중 하나이다.(소진장의는 가장 걸출한 종횡가이고, 손빈방연은 병가의 가장 걸출한 인물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이치를 꿰뚫고, 신학(神學), 음양학(陰陽學), 유학(遊學)등 여러 학문을 겸비해서 일반사람들이 미칠 수가 없었다. 춘추전국제자백가중에서 학식이 가장 방대하고 복잡하며, 행적이 가장 신비한 학자중 하나이다.

내가 귀곡자를 추적하면서, 반인반선으 신비인물로서 귀곡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귀적(鬼迹)'을 남겼을까? 사료기재에 따르면, 귀곡자는 운몽산에 은거했다.

그래서, 전국각지에 운몽산이라는 이름이 있는 지방은 모두 귀곡자의 유적이 있다. 이를 보면 귀곡자의 유명세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귀곡자를 추적한 것은 모략의 대국면이 우리같은 후배중의 후배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곡자의 모략은 등소평의 말을 빌리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호랑이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의는 스스로를 '명리지도'라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귀곡자 사도는 솔직하고 성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곡자의 사상은 비록 중국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해외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다. 미국 닉슨시절의 국무장관이었던 미국의 저명한 외교가이자, <중국론>의 저자인 키신저는 스스로를 '귀곡자의 제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매체에서는 그를 당대의 소진, 장의라고 불렀다. 항상 무형중에 모략을 세워서, 싸우거나 힘들이지 않고 승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미국외교전략에 뛰어난 공헌을 한다. 특히 중미관계의 정상화를 추진했다. 일찌기 1973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키신저의 스승인 스펭글러는 <키신저평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귀곡자의 사람을 알아보는 명석함과 역사의 가능성에 대한 통찰 그리고 당시 외교기교(합종,종횡)을 장악함으로써, 그를 당시에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중 하나로 만들었다." 사람은 국경이 있지만, 사상의 유통은 국경이 없다. 이는 진나라에서 계속하여 외국의 신하를 중용하여 조정을 주재하도록 한 이유이고, 변법을 써서 강대해진 연유이다.

지금, 필자는 여전히 귀곡자를 추적하고 있다. 당시를 생각하면, 귀곡자는 바로 높은 산위에 우뚝 선 인물이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구름이 어지럽게 날리고, 전쟁의 포화가 여기저기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간난은 그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여야 이 난국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여야 분쟁의 난세를 끝낼 수있을지. 치국안방 평정천하의 양책은 없는지. 어떻게 하여야 백성들이 전쟁이 가져다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지. 평안하게 생활하게 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