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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귀곡자)

귀곡자(鬼谷子): 춘추전국시대의 판도를 뒤집은 인물

by 중은우시 2014. 1. 15.

글: 가운봉(賈雲峰), 손소영(孫小榮)

 

상앙변법(商鞅變法)을 통하여 강성해진 진(秦)나라는 동방의 각국에 자신의 실력을 하루빨리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그들과 평기평좌(平起平坐)하는 동등한 나라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동방의 열국은 모두 칭왕(稱王)하고 있었고, 돌아가면서 패자로 군림했다. 오로지 진나라의 국군(國君)만은 아직 "공(公)"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왕(王)"보다 한 등급이 낮은 지위이다. 같은 급이 아니다보니, 명분이 없었다. 더더구나 평기평좌는 할 수가 없었다.

 

제(齊) 위(魏)의 국군은 팽성(彭城)에서 서로 왕이라 칭해주었다. 새로 취임한 진공(秦公) 영사(嬴駟)도 초청을 받아 참석하나 위혜왕(魏惠王)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 영사는 맹세한다. 나중에 진나라가 칭왕할 때, 반드시 원한을 갚을 것이라고. 다만 계책을 세울 현신(賢臣)이 없어서 고생하고 있었고, 진나라의 수구귀족들로부터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이 때, 낙백(落魄)한 장의(張儀)가 초(楚)나라에서 "옥을 훔쳤다(竊玉)"는 누명을 쓰고 소양(昭陽) 가신으로부터 두들겨 맞아서 하마터면 황야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다. 몸에 뛰어난 학문을 지닌 장의는 마찬가지로 명군을 만나 포부를 시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절국(竊國, 초나라를 빼앗다)"함으로써, "절옥"의 치욕을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영사와 장의는 모두 천하를 품겠다는 뜻을 지녔고, 모두 자신을 강대하게 키워서 복수하겠다는 일념이 있었다. 그러나 둘 다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가히 동병상련이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장의가 진나라로 들어가자 진공 영사는 그를 만나자마자 옛친구를 만난 듯이 가까워진다. 그 때, 동방의 열국은 합종(合縱)하여 진(秦)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장의는 영사의 면접을 볼 때, 연횡(連橫)으로 합종의 책략을 깨트릴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영사의 칭찬을 받고 장의는 승상에 오른다.

 

"명리지도(名利之徒)" 장의는 자신이 말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상선발교(上善發交)"도 그저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스스로 나서서 위나라를 설득하러 떠난다. 병력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서, 가볍게 위나라가 오랫동안 점령해왔던 진나라의 하서(河西) 땅을 되찾아 온다.

 

진나라의 역사는 상앙의 시대에서 장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국(戰國)시대국면의 주도권이 진나라로 돌아온다.

 

장의는 어떻게 하여 이런 능력을 지니게 되었을까? 왜냐하면 그는 귀곡자의 득의문생(得意門生)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파산(秦巴山) 속, 한강(漢江)의 가에 있는 석천(石泉) 운무산(雲霧山) 귀곡령(鬼谷嶺)으로 가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세상에 나온 적이 없지만, 춘추전국시대의 풍운을 불러일으킨 귀곡자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춘추전국의 절반, 그리고 진한(秦漢)교체기의 역사는 모두 이 반인반선(半人半仙)의 신비노인과 뗄레야 뗄수없이 관련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귀곡자가 만들어 놓은 국면이었다.

 

석천(石泉)은 진령(秦嶺) 남록(南麓)의 안강시(安康市) 서남부에 있다. 북으로는 진령이 있고, 남으로는 파산이 접해 있다. 한강은 서에서 동으로 뚫고 지나간다. 지형의 윤곽은 "두 산이 강 하나를 끼고 있는" 형국이다. 산은 크고 골짜기는 깊다. 진파산맥은 여기서 만나면서 약간의 폭루자휴(暴戾恣睢)를 보여준다.

 

우리는 석천현 관광국 당조서기 장창빈(張昌斌)의 안내로 한강이 갈라놓은 절벽에 파놓은 도로를 뚫고 달렸다. 연속되는 커브길에 덜컹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해 따라갔던 여자가이드는 오바이트를 멈추지 못했다. 중패대협곡에 도착하자 안색이 창백하여 제대로 서 잇지도 못해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지도 못할 정도였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차를 놔두고, 장창빈의 안내하에, 강행군의 속도로 7킬로미터 길이의 중패대협곡을 횡단한다. 그 후에 뒷산을 돌아 약 1시간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는다. 석천현성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위두고진(熨斗古鎭)에 도착한다. 그 후에 밤에 연상동(燕翔洞)으로 구경을 간다.

 

연산동을 구경한 후, 핸드폰 손전등을 가지고 협곡을 나오니 이미 깊은 밤이었다. 우리는 부득이 석천현성으로 돌아가는 계획을 포기하고, 위두고진에서 유숙했다. 다음 날 오전, 위두고진을 방문한 후, 석천으로 돌아온다. 현 관광국에서 현지의 몇몇 문화학자들과 얘기를 나눈다.

 

기실, 필자는 그들에게 진파문화, 한강문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다만 얘기가 깊이 들어가자, 그들은 진파문화와 한강문화의 차이, 고도(古道)문화와 잠상(蠶桑)문화에 대하여 더욱 깨달음이 있었다. 특히 귀곡자문화에 대하여는 말이 끊이지 않고,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석천에서 귀곡자문화는 한강문화와 마찬가지로, 이미 이 도시의 생활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한강의 가에 잇는 석천문화광장에는 귀곡자와 그의 제자인 손빈(孫臏). 방연(龐涓)의 조상(雕像)이 있었다. 석천에 유명한 토산품은 '귀곡자'라는 이름을 붙인 납육(臘肉)이다.

 

필자는 위두고진에서 유숙할 때, 농가빈관의 주인아주머니가 부뚜막에서 납육을 만드는 것을 내눈으로 보았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을 대, 그녀는 일부러 그 표측이 썩은 납육을 가리고는 난감하게 웃으며 말한다. 만일 나같은 외지인이 납육이 이런 모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역겨워서 먹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석천에서 어디가 놀기좋은지 물어보면, 현지인들은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연상동을 이외에 귀곡령이 좋다고. 비록 현지문화학자들에 의하면 석천현성으로부터 30킬로미터 떨어진 운무산 귀곡령은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고, 여러 곳은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있지만, 특히 귀곡자가 은거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은 전문학자, 각 매체기자들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찾아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깊은 산의 오래된 숲이 겹겹히 막혀 있어 갈 엄두를 못낸다고 한다.

 

다만, 지혜의 화신인 귀곡자는 확실히 이 산성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영예와 자랑이 되어 있었다.

 

귀곡자는 필자가 아는 첫번째 춘추전국시대 인물이다. 또한 필자의 동년기에 무한한 신비한 그리움을 불태운 지혜의 스승이기도 하다.

 

귀곡자를 알게 된 것은 연환화 혹은 항간의 전설을 통해서이다. 가장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귀곡자의 두 제1기 졸업생 손빈과 방연의 지혜겨루기이다. 기실 그들이 스승에게서 떠나기 전에, 귀곡자는 이미 그들을 위하여 판을 짜두었다.

 

귀곡자가 손빈과 방연에게 한 첫번째 조치는 하나의 물건을 이용하여 방 하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방연은 땔감을 베어서 집을 가득 채운다. 손빈은 마른 가지와 잎에 불을 붙여서 불꽃으로 집을 가득 채운다.

 

귀곡자가 손빈과 방연에게 한 두번째 조치는 무슨 방법으로 집안에서 집밖으로 속여서 내보내느냐는 것이었다. 방연의 선택은 협박이었다. 스승이 나오지 않으면 그는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한다. 손빈이 선택한 것은 유인이었다. 스승에게 건물안에서 건물밖으로 나오게 할 수는 없지만, 건물밖에서 건물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귀곡자는 속아서 건물밖으로 나오게 된다.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를 통해 어린 나는 3가지 간단한 '이치'를 깨닫는다: 첫째는 총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량하고 일처리에 방법을 연구해서 머리를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반드시 귀곡자와같이 교묘하게 '지혜'를 쓸 수 있고,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는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좋은 사람은 고난을 많이 겪지만 나쁜 사람은 결국은 보응을 당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나는 알았다. 전체 춘추전국시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과 살육이 기실 대다수상황은 장의의 동문사형제가 자신의 경세치국(經世治國)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하여 진행한 '모의시험'이었다는 것을. 그들의 공통스승인 귀곡자 노선생은 진령의 깊은 곳에 숨어서 꽃을 기르고 풀을 심었으며, 제자를 가르쳤다. 자신의 각 학과의 졸업생들이 세상을 놓고 싸우는 시험장에서 보내오는 답안지를 보면서....

 

관련 전문학자의 연구와 고증에 따르면, 귀곡자의 제자는 대명이 자자한 병가의 대표 손빈, 방연, 종황가의 대표인 소진, 장의를 제외하고 이리(李悝)를 스승으로 모셨던 상앙(商鞅)도 이리의 다음에 귀곡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그외에 귀곡자의 득의문생으로는 모수(毛遂), 서복(徐福), 감무(甘茂), 사마착(司馬錯), 악의(樂毅), 범저(范雎), 노중련(魯仲連), 재택(財澤), 추기(鄒忌), 역이기(酈食其), 괴통(蒯通), 황석(黃石), 이목(李牧), 위료(魏僚), 이사(李斯)가 있다.

 

필자는 문자수법으로 학술연구를 하는 전문학자들을 아주 좋아한다. 그들은 항상 방징박인(旁徵博引)하고 이화접목(移花接木)하고, 연상, 과장, 유비등 수사수법을 이용하여, 많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을 하나로 합쳐서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하고, 비판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정말 없다"를 "이것이 잇을 수 있다"로 만들어 이 세계에서 '무교불성서(無巧不成書)'의 가운데 무한하게 신기한 것으로 넘치게 만들었다.

 

보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스승에게서 나온다. 모두 역사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춘추전국 내지 진한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귀곡자선생에게는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귀곡자 선생의 졸업생은 거의 모두 후기지수인 진(秦)나라에서 실습하기를 즐긴 것같다. 학교를 바꾸고 스승을 빠꾼 상앙을 빼놓더라도, 장의부터 시작하여 감무, 사마착, 범저, 위료, 이사, 서복은 모두 진나라에서 재상, 장군이 된다.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긴 현신양장이다.

 

귀곡자 선생의 또 다른 한 무리의 제자들은 "하나의 산에 두 호랑이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지켜, 진나라로 들어간 사형제들과 적대적인 진영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소진, 모수,노중련, 악의, 추기, 역이기, 황석, 이목이다. "귀곡자춘추전국엘리트학원"의 제1기졸업생대표인 손빈, 방연과 마찬가지로, 이들 동문사형제들은 자신의 졸업논문답변에서 순조롭게 통과되기 위하여, 자신의 은사에게 보고할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각각 자신의 주군을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비린내나도록 싸웠고, 수백년에 걸친 전국진한 국면을 철저히 교란시킨다.

 

춘추전국사는 귀곡자학술연구가 실천으로 향하는 시험사이기도 하다. 귀곡자가 세상의 변환을 요리할 때, 천하를 손바닥 위에 놓고 놀고 있을 때,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귀곡자가 수여한 어느 학생에 대한 사상책략을 보면 된다. 결국 그가 설정한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귀곡자는 성이 왕(王)이고 이름이 후(詡, 혹은 利)이다. 일명 왕선(王禪)이다. 호는 현미자(玄微子)이며, 춘추말 전국초기의 사람이다. 선진의 제자(諸子)중 한 명이다. 귀곡자는 종횡가의 비조일 뿐아니라, 병가의 저명한 대표인물중 하나이기도 하다. (소진과 장의는 가장 걸출한 종횡가이고, 손빈과 방연은 가장 걸출한 병가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통달했고, 신학,음양학, 유학(遊學)등 여러 학문을 겸비하여 보통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중 학식이 가장 복잡하고 방대하며, 행적이 가장 신비로운 학자중 한 명이다.

 

반인반선의 신비인물로서, 귀곡자는 곳곳마다 '귀적(鬼跡)'을 남긴다. 어떤 사적에 따르면, 귀곡자는 운몽산(雲夢山)에 은거했다. 그래서 전국각지에 운몽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면 귀곡자의 유적이 남아 있다.

 

2012년 연말, 필자는 <만주동천(慢走銅川)>이라는 글을 써서 섬서성 동천을 방문했을 때, 의빈(宜賓)의 운몽산에서 귀곡자가 은거했다는 칠성동(七星洞)을 본 적이 있다. 7개의 높낮이가 다른 산동굴이 귀곡자가 거주하며 학문을 전수한 곳이라는 것이다. 아주 그럴 듯해 보였다.

 

석천현 귀곡자문화연구회 회장인 궈스탕(郭世堂)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10여곳의 "귀곡자고리(鬼谷子故里)"가 있다고 한다. 사적에 기록된 곳만 하더라도, 하남 등봉의 귀곡, 섬서 삼원 청수곡, 호북 원안 청계, 호남 대용 귀곡동, 섬서 석천 귀곡령등이 있다.

 

석천 귀곡자문화연구회 명예회장 리페이진(李佩今)은 처음으로 연구하여 글을 써서 석천 운무산 귀곡령이 진정한 "귀곡자고리"라고 주장한 학자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지성귀곡자비전>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귀곡자에 관한 논문 40여편을 발표한다. 리페이진의 '귀곡자고리는 석천에 있다"는 논문을 시작으로 석천의 전문가 학자들은 귀곡자문화연구회를 창립하고 국제귀곡자문화세미나를 개최하여 석천귀곡자고리설을 통설로 만들고자 한다.

 

리페이진은 사마천의 <사기. 감무열전>의 기록에 근거했다:

 

소대(蘇代, 소진의 형, 종횡가)는 말했다: 효새(淆塞)에서 귀곡(鬼谷)까지 그 지형의 험준함과 평이함을 모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제나라로 한나라 위나라와 반진을 도모하는 것은 진나라에 이로운 것이 아니다."

진왕이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소대가 말한다: "왕이 재산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많은 돈을 주고 그를 맞이하여, 그를 귀곡에 두고 평생 나오지 않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본편의 <색인>에는 유씨의 말을 인용하여, "귀곡은 관내(關內) 운양(雲陽)에 있다"고 하였다. 즉 섬서성 진나라경내에 귀곡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석천은 춘추시기에 초나라에 속했지만, 전국후기 기원전312년, 진혜왕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중 600여리를 취하고, 안강에 서성현을 설치하여 석천은 다시 진나라의 영토로 돌아온다.

 

그래서, 리페이진이 "귀곡은 관내 운양에 있다" 즉 석천 진령의 운무산에 귀곡이라는 땅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리페이진은 다시 <사기정의>에서 "삼효(三淆)는 낙주 영녕현 서북에 있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고 효새는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 섬현(陝縣) 경내의 채원향(菜園鄕)을 가리킨다. <사기>에서 말하는 "효새에서 귀곡까지"는 동에서 서로, 즉 하남에서 섬서까지, 섬현은 동쪽의 기점이고, 석천현은 서쪽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중도에 상락진령산맥을 지나니 그 자연지형은 확실히 특별히 험준하다. 당시 소대가 말한 상황과 부합된다.

 

그러므로, 리페이진은 사마천 <사기>에 기재한 "귀곡"의 땅은 바로 석천경내의 진령산에 있는 운무산 귀곡령이라고 본다.

 

<동주열국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각설하고 주(周)의 양성(陽城)에는 한 곳이 있는데 이름이 귀곡이다. 그 산은 깊고 나무는 빽빽하여 유불가측(幽不可測)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같다. 그래서 귀곡이라고 불렀다. 그 안에 은거한 사람이 있는데 스스로 귀곡자라 하였다. 전해지기로 성은 왕씨이며, 이름은 후이다. 진평공(晋平公)때의 사람이다. 운몽산에서 송(宋)나라사람 묵적(墨翟)과 함께 약을 캐며 도를 닦았다....."

 

서진 황보밀(皇甫謐)이 쓴 <귀곡자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귀곡선생은 초나라사람이다. 주나라때 태어나서 귀곡에 은거한다."

 

그러므로, 귀곡자의 은거지를 만족시키려면 다음의 네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주나라의 도성에서 남쪽에 있어야 한다. 둘째는 '초나라땅'에 속해야 한다.셋째는 '귀곡'이 있어야 한다. 넷째는"한빈(漢濱, 한수의 가)"이어야 한다. 이상의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오로지 진령이남의 안강 석천밖에 없다.

하물며, 귀곡자는 춘추전국시대에 또 다른 신비인물 묵가의 창시인 묵적과 '함께 약을 캐며 도를 닦았다. 묵가의 본부는 진령 남록의 신농대산에 있었다.

 

리페이진은 말한다. 석천 귀곡자문화연구회에서 연구하는 귀곡자는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역사상 진실한 귀곡자이다. <사기. 소진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소진은 '귀곡선생에게 배웠다.'. <사기.장의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장의는 '일찌기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의 학술을 같이 배웟다."

 

역사상 진실한 귀곡자는 전국시대 초나라사람이다. "한빈귀곡산(漢濱鬼谷山)"에 머물렀다. 한빈은 바로 한수의 가이다. 한수의 가에는 석천에만 귀곡산(귀곡령)이 있다. 바로 석천 운무산의 귀곡령이다. 귀곡자가 진나라를 나서서 초나라로 들어가고 책을 써서 제자를 가르치며, 합종과 연횡을 지휘하고, 세계역사상 나타난 적이 없는 전국의 풍운을 만들어낸다.

 

귀곡자의 모략은 순세이위(順勢而爲)의 변수를 중시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역전(力戰)은 심전(心戰)만 못하다고 주장하고, 상선벌전(上善伐戰)은 상선벌교(上善伐交)만 못하다고 하였다. 장의가 세치 혀로 장국을 설득하여 병기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은 것은 청하창생의 복이다.

 

유가가 주례를 준수하고, 모든 일에 조상의 법도를 예기하고 법도를 따르며, 사평팔온(四平八穩)의 처세이념을 취하는 것과는 상반된다.궈스탕에 따르면, 귀곡자의 학술사상은 지모를 중시하고, 신축적으로 변통하는 것을 중시한다. 유가는 법도를 죽어라 지키는 것이다. 귀곡자의 사상은 살아있는 모략이고, 유가의 사상은 죽은 법도이다.

 

그러므로, 유가는 통상적인 이치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는 진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공사서유불입진(孔子西遊不入秦)"의 전고이다. 그러므로, 상앙부터, 진나라가 칭패하고 칭제하는 정복의 길에서, 유생이 큰 임무를 맡은 적은 없었고, 진왕에게 승상에 임명된 사람은 법가 상앙, 이사, 종횡가 장의, 감무, 범저이고 대장군 사마착, 상가 여불위, 병가 위료, 음양가 서복등이다. 모두 유가는 아니고 진나라사람도 아니다.

 

혁신을 개창한 진나라사람들은 쓸데없이 말이나 많고, 걸핏하면 '조상의 법도', '조상의 교훈'과 같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성사부족패사유여(成事不足敗事有餘)라고 여긴다. 그래서, '분서갱유'도 나타난다. 다만, 한나라는 진나라와 달리, 독존유술한다. 일찌기 진나라의 칭패를 도운 다른 학파는 모조리 냉대받고 자생자멸(自生自滅)한다.

 

그중 <수서>에서 "영인위지(佞人爲之), 즉편사리구(則便辭利口), 경위변사(傾危變詐), 지어적해충신(至於賊害忠信), 복방난가(覆邦亂家)"라는 귀곡자사상은 더더욱 한나라이후 역대 통치계급이 멸시하고 조당의 바깥 강호에서 조용히 전해질 뿐이었다.

 

귀곡자의 모략은 등소평의 말을 빌리면, 바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대부정서를 가진 장의는 큰 소리로 스스로를 '명리지도'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더구나 귀곡자 사도는 사람됨이 솔직하고 진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곡자사상은 비록 중국에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외국에서는 인정을 받는다. 미국 닉슨 시대의 국무장관이자 미국의 저명한 외교가이며, 베스트셀러인 <중국론>을 쓴 작가 키신저는 스스로 '귀곡자의 제자'라고 자부했다. 또한 매체에서 당대의 소진, 장의로 불리웠다. 그는 자주 무형중에 모략을 쓰고, 싸우지도 않고 힘을 들이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의 외교전락에 두드러진 공헌을 한다. 특히 중미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1973년 노벨평화상도 받는다.

 

키신저의 스승인 스펭글러는 <키신저평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귀곡자는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 역사에 대하여도 통찰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외교기술(합종과 연횡의 예술)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의 하나가 된다."

 

사람은 국경이 있지만, 사상의 유통은 국경이 없다. 이것은 진나라가 연속으로 외신을 중용하여 조정을 맡기고, 변법으로 강대해진 연유이다.

 

폭우로 운무산의 도로가 무너져서, 우리는 귀곡령의 남은 유적을 보지는 못했다. 부득이 귀곡려에 대하여는 유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귀곡자문화에 대한 이애헤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귀곡자는 진령을 나서지 않았으나, 자신의 제자를 통하여 운주유악지중, 결승천리지외(運籌帷幄之中, 決勝千里之外)할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사람에게는 공간의 제약이 있지만, 사람의 사상에는 공간의 제약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필자가 귀곡령을 가보지 않았지만, 이 글을 쓸 수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궈스탕은 이렇게 말한다. 전국시대의 주제는 합종연횡이다. 그러므로, 전체 전국시대의 지모는 모두 진령에서 나왔다.

 

이것은 모두 귀곡자가 벌인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