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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 외교계의 장씨오걸(章氏五杰)

by 중은우시 2008. 1. 31.

글: 적화(翟華)

 

일찌기 모택동의 영어교사를 맡았고, 외교부 아주사 부사장을 지냈으며, 전 외교부장 교관화(喬冠華)의 부인이기도 한 장함지(章含之) 여사가 서거했고, 많은 신문매체에서는 이 외교재녀에 대한 추억을 보도하고 있다. 사실상 같은 장씨(章氏)이면서 역시 '외교재녀'로 불리던 또 한명의 전 외교부대변인, 현벨기에대사인 장계월(章啓月) 여사도 있다. 이 두 명의 장씨 여장부를 얘기하자면 신중국외교사상 또 다른 세명의 장씨(章氏) 남아들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들간의 관계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장씨오걸중 가장 연장자이면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은 신중국성립후 오랫동안 외교부 부부장을 맡았던 장한부(章漢夫)이다. 그러나, 장한부의 원래 성은 장씨가 아니었고, 본명이 사계태(謝啓泰)였다. 1905년 10월생이며, 강소성 무진현 사람이다. 장한부는 외교계통에서 주은래, 진의 다음으로 많은 업무를 수행했던 외교부의 상무부부장이었다. 외교부에서 나중에 이름을 날린 희붕비(姬鵬飛), 교관화, 황화(黃華),환향(宦鄕), 한염룡(韓念龍), 경표(耿)등이 모두 그의 부하였다. 장한부는 청화대학에서 공부하고 미국유학한 사람으로 나중에 소련에도 가서, 영어와 러시아어에 모두 능통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문혁기간중에 표적이 되어 비판을 받았고, 1968년 진성감옥(秦城監獄)으로 보내지고, 1972년 1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죽는다.

 

두번째 언급할 사람은 일찌기 외교부 부부장을 지낸 장문진(章文晋)이다. 원적은 절강성 삼문현이고, 1914년 북경시에서 태어났다. 청화예비학교에 합격한 후 미국에 유학한 장한부와는 달리, 장문진은 독일에 유학했다. 귀국후인 1935년에 비로소 청화대학에 입학한다. 1972년 부장조리 겸 구미사 사장으로 중미관계정상화 협상에 참가한다. 1973년 9월, 중국 주카나다 대사를 맡는다. 1980년대초,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이후 다시 두번째 중국 주미대사를 맡았었다. 퇴임후, 민간외교에 종사하며, 중국대외우호협회장을 맡다가 1991년 서거했다.

 

세번째는 장서(章曙)이다. 명성이나 지위가 장한부나 장문진처럼 높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도 보통인물은 아니다. 장서의 조상은 산동 요성 사람이다. 1925년 5월 북경에서 태어난다. 해방때 나이가 겨우 24살이었던 장서는 외교부 공청단의 첫번째 총지부서기를 지냈다. 이후 과원에서 시작하여, 점차 과장으로 승진한다. 그는 인사처, 인사사, 간부사에서 14년간 일한다. 1971년 중국이 유엔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하자, 장서는 중국의 유엔대표단 정무참찬을 맡는다. 1973년, 중국정부의 추천을 받아, 장서는 첫번째로 유엔 사무처에서 국제공무원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사무처 부처장을 맡는다.1980년에, 장서는 주 벨기에, 일본 대사를 맡는다.

 

이 세 사람의 외교가는 장함지, 장계월과 무슨 관계일까?

 

장씨외교5걸중에서 혈연관계에 있는 것은 장서와 장계월이다. 장계월은 바로 장서의 딸인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녀는 부친을 이어 외교계에 들어왔을 뿐아니라, 부친의 족적을 따라, 중국 주유엔대표단 정무참찬, 주 벨기에 대사를 맡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세계 외교계에서도 드문 일이다. 장계월이 외교계에 들어간 과정을 보면, 모택동이 1973년 2월 17일 저녁 11시반에 키신저를 만나서 한 담화를 얘기해야 한다. 당시, 왕해용은 기록을 위하여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통역으로는 당문생 이외에 심약운이 있었따. 모택동은 이 심약운에 대하여는 잘 몰랐던 것같다. 얘기하다가 손님 앞에서 주은래에게 물었다. "이 중국인은 영어능력이 뛰어난데, 도대체 누구냐?" 주은래가 대답한 후, 모택동은 감개무량해서 말했다. "우리의 통역요원은 너무 적다..우리의 현재 통역은 그저 2,30세인데, 그들이 나이들게 되면 통역이 지금처럼 좋지 않을 것같다" 총명했던 주은래는 바로 그에게 의견을 개진했다. "사람들을 외국에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모택동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 정도 의 아이(손으로 키를 표시하며)들을 외국에 내보내야 겠다. 너무 나이가 들면 곤란하다." 모택동의 지시가 있은 후 유엔에서 일하던 장서는 마침 신분을 바꾸어 중국대표단의 정무참찬에서 유엔 의 국제공무원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유엔의 국제공무원의 자녀는 교육비를 유엔에서 부담해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이 내용을 국내에 보고했고, 외교부에서는 이를 검토했다. 이 국제공무원의 자녀들 중에서 미국에 보내어 교육시킬만한 적당한 나이대가 있는지를 살폈다. 당시 외교부는 모택동의 비준을 받아, 초보적인 탐색과 시험을 했다. 파견하기로 결정된 4명의 중,초등학생중에 바로 14살이 되지 않은 장계월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함지와 다른 세 사람과는 어떤 관계인가?

 

장함지의 남편인 교관화에게는 전처 공팽(澎)이 있다. 그녀도 명실상부한 외교재녀이다. 1971년 사망하기 전에 외교부에서 부장조리, 신문사 사장을 맡았다. 공팽에게는 공보생(普生)이라는 언니가 있었는데, 그녀도 재녀였다. 연경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외교부 조법사 사장을 지낸 바 있다. 공보생의 남편은 바로 외교부의 실제책임자인 장한부이다. 그러므로 장한부와 교관화는 동서간이다. 공팽이 사망한지 2년후, 교관화는 장함지와 결혼한다. 비록 이때 장한부는 이미 죽었지만, 장함지와 장한부, 공보생 부부는 이렇게 얽히고 설킨 복잡한 관계에 있다.

 

비교하자면, 장함지와 장문진의 관계는 더욱 '가깝다'. 장문진의 부친은 장이오(章以吾, 주은래와 남개대학 동창생)이고, 모친은 주기균이다. 모친은 북양정부 교통부장, 대리국무총리를 지낸 주계검(朱啓鈐)의 딸이다. 주계검과 장함지의 양부인 장사소(章士釗)는 교분이 깊었다. 60년간의 우정을 가지고 있다. 장사소 선생은 해방전날에 동48조의 주계검의 집에 갔고, 장함지와 부모는 함께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주계검은 장문진의 외조부이므로, 장문진 부부(부인은 장영)는 때때로 찾아가서 만나곤 하였다. 그때  어린 장함지를 알게 된다. 장영의 회고에 의하면, 1972년이후, 장함지와 장문진일가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장함지는 그 기간동안 장영에게 영어를 가르키기도 했다. 1973년 6월 중순, 모택동은 지시를 내려 여자대사를 파견하려고 하고, 첫번째로 그녀가 지목되어 주 카나다대사로 나가게 하려 하였다. 당시 교관화와 장함지는 마침 열애중이었고, 장함지가 이 명령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교관화와의 이별을 의미했다(왜냐하면, 곧 외교부장으로 승진할 예정인 교관화가 카나다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장함지는 모택동에게 대사로 나가지 않겠다고 요청한다. 모택동은 그녀에게 대사로 나가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음은 틀림없다. 장함지 본인의 말에 따르면 1년후에 모택동을 만났을 때 그는 그녀에게 "넌 내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장함지가 주 카나다대사로 나가지 않았는데, 이 임무는 또 다른 장씨성의 외교관 즉 장문진에게 떨어졌다.

 

외교계의 장씨5걸중에서, 원래 장함지와 장서는 배분이 같고, 평소에 동료로 일을 해왔다. 그들간에는 자식들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유학갔다는 점에서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장서의 딸은 1974년 미국에 영어공부하러 떠날 때 다른 3명의 나이어린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여자아이가 당시 12살이며, 이름이 홍황(洪晃)이었다. 그녀가 바로 장함지의 딸이었다. 장함지가 장계월의 모친으로 자주 오인되는 이유도 아마 이런데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