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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북경 노자호(老字號, 전통점포)의 간판과 서예가

by 중은우시 2007. 12. 28.

 

 

 

 

북경은 유명한 역사문화의 도시이다. 천여년간의 발전과정에서 상업과 문화가 번성하였고, 대량의 전통점포(중국에서는 노자호라고 함)가 등장하였다. 왕푸징, 전문, 서단, 동사, 유리창, 고루등의 번화가를 지나갈 때면 노자호의 입구에는 나름대로의 풍격을 지니고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간판이 걸려 있다. 글자체는 단정하기도 하고, 청수하기도 하며, 고졸하기도 하다. 이는 멋있는 서예작품일 뿐아니라, 북경의 깊이있는 문화를 보여주는 부호이기도 하다.

 

노자호는 역대이래로 간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간판은 점포의 얼굴이다. 많은 상점들에서는 유명인사, 서예가를 초청하여 간판의 글자를 썼다. 노자호가 서예가의 명성을 드높이는지, 서예가가 노자호의 명성을 드높이는지 모를 정도이다. 어쨌던 유구하고 깊이있는 간판문화는 북경의 상업상의 번영과 발전을 가져왔다. 아래는 북경의 이름있는 노자호의 간판과 그것을 쓴 서예가들에 관한 자료이다.

 

차장(茶莊)

 

"원장후(元長厚)" : 오란제(吳蘭弟), 소방(蕭芳)이 전후로 씀

"오유태(吳裕泰)" : 풍역오(馮亦吾)가 씀

"영안차장(永安茶莊)" : 우우임(于右任)이 씀

"장일원(張一元)" : 원래 청나라때의 풍공도(馮公度)가 씀. '문화대혁명'때 유실되어 동석량(董石良)이 다시 씀.

 

유리창의 고화옥기자화점

 

"영보재(榮寶齋)" : 청나라 장원 육윤상(陸潤庠)이 최초로 씀. 나중에 서비홍(徐悲鴻), 곽말약(郭沫若), 동수평(董壽平), 계공(啓功)등도 씀

"일득각(一得閣)" : 청나라 서예가 사송대(謝松垈)가 씀

"천궁각(天宮閣)" : 조박초(趙朴初)가 씀

"정림헌(鼎琳軒)" : 사수청(史樹靑)이 씀

"췌진재(萃珍齋)" : 수석공(壽石公)이 씀

"송고재(松古齋)" : 호준(胡浚)이 씀

"운고재(韻古齋)" : 보희(寶熙)가 씀

"보취당(寶翠堂)" : 비효통(費孝通)이 씀

"정문재(靜文齋)" : 서세창(徐世昌)이 씀

"중국서점(中國書店)" : 곽말약이 씀

"고적서점(古籍書店)" : 이일맹(李一氓)이 씀

"고예재(古藝齋)" : 초도남(楚圖南)이 씀

"관복재(觀復齋)" : 장백영(張伯英)이 씀

"내훈각(來薰閣)" : 서동(舒同)이 씀

"대월헌(戴月軒)" : 서세창이 씀

"돈화재(敦化齋)" : 조박초가 씀

"청산거(靑山居)" : 조박초가 씀

"청비각(淸秘閣)" : 오창석(吳昌碩)이 씀

"통고재(通古齋)" : 이가염(李可染)이 씀

"여고재(茹古齋)" : 옹동화(翁同)가 씀

"존한각(尊漢閣)" : 옹동화가 씀

"보고재(寶古齋)" : 옹동화가 씀

"상기재(賞奇齋)" : 옹동화가 씀

"수문재(秀文齋): : 옹동화가 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 정효서(鄭孝胥)가 씀

 

반장(飯莊)

 

"전취덕(全聚德)" : 건륭(乾隆)이 씀

"편의방(便宜坊)" : 동수평(董壽平)이 씀

"도일처(都一處)" : 최초에 건륭이 썼으며, 현재의 편액은 곽말약이 씀

"동래순(東來順)" : 진숙량(陳叔亮)이 씀

"풍택원(豊澤園)" : 이기(李琦)가 씀

"고육계(肉季)" : 부걸(溥傑)이 씀

"동화거(同和居)" : 부걸이 씀

"방선(彷膳)"       : 노사(老舍)가 씀

"사과거(砂鍋居)" : 백도(柏濤)가 씀

"유천거(柳泉居)" : 호결청(胡潔靑)이 씀   

"구불리(狗不理)" : 부임(溥任)이 씀

"췌화루(萃華樓)" : 장백영이 씀

"내금우헌(來今雨軒)" : 최초에 서세창이 씀, 지금의 편액은 조박초가 씀

"노정흥반장(老正興飯莊)" : 소방이 씀

"홍흥루(鴻興樓)" : 이고선(李苦禪)이 씀

"홍운루(鴻雲樓)" : 허덕형(許德珩)이 씀

"동춘루(同春樓)" : 허덕형이 씀

"우일순(又一順)" : 허덕형이 씀

"두화반장(豆花飯莊)" : 장애평(張愛萍)이 씀

"력력(力力)" : 곽말약이 씀

 

식품점

 

"도향촌(稻香村)" : 호궐문(胡厥文)이 씀

"포오방(蒲五房)" : 호궐문이 씀

"계향촌(桂香村)" : 진숙량이 씀

"월성재(月盛齋)" : 청나라 서법가 오수증(吳壽曾)이 씀 

"공덕림(功德林)" : 조박초가 씀

"천원장원(天源醬園)" : 동수평이 씀

"천복호(天福號)" : 옹동화가 씀

"치화장원(致和醬園)" : 청나라때 장원출신 손가내(孫家)가 씀

"신원재(信遠齋)" : 부의의 스승인 주익번(朱益藩)이 씀

"육필거(六必居)" : 명나라때 재상 엄숭(嚴崇)이 씀

 

비단신발모자점

 

"서부상(瑞祥)" : 왕토서(王土序)가 씀

"의성후(宜誠厚)" : 염중인(閻仲仁)이 씀

"내련승(內聯陞)" : 장애평, 곽말약이 씀

"성덕복(盛德福)" : 오패부(吳佩孚)가 씀

"보영재(步瀛齋)" : 모창희(毛昶熙)가 씀

"마취원(馬聚源)" : 이탁(李鐸)이 씀

 

기타

 

"동인당(同仁堂)" : 계공이 씀

"중화대약방(中華大藥房)" : 풍공도가 씀

"억조백화점(億兆百貨店)" : 장백영이 씀

"대관루(大觀樓)" : 계공이 씀

"광덕루(廣德樓)" : 계공이 씀

"성문후(成文厚)" : 부걸이 씀

"청화지(淸華池)" : 오계평(吳階平)이 씀

"중국조상관(中國照相館)" : 유병삼(劉炳森)이 씀

"서단상장(西單商場)" : 유병삼이 씀

"백화대루(百貨大樓)" : 유병삼이 씀

 

이상에서 열거한 것은 북경의 노자호중 극히 일부분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많은 노자호의 편액이 문화대혁명때 부서지거나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지금까지 제대로 보존된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현재 보이는 많은 편액은 당대의 서예가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며, 그중에는 곽말약, 조박초, 동수평, 계공, 구양중석, 이탁, 유병삼, 왕하거(王遐擧)가 쓴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