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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정판교(鄭板橋)의 난득호도(難得糊塗)

by 중은우시 2007. 7. 9.

 

 

 

청나라때 양주팔괴(揚州八怪)의 우두머리로 손꼽히는 정판교(鄭板橋, 이름은 鄭燮, 판교는 그의 호)는 서화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글씨체는 스스로는 육푼반서(六分半書, 원래 예서는 '팔푼(八分'이라고 부르는데, 정판교는 자신의 서체가 예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며, 다만 해서보다는 예서에 더 가깝다고 해서 육푼반이라고 하였다고 함)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은 난석포가체(亂石鋪街體, 길바닥에 어지럽게 돌을 깔아놓은 것같다는 정도의 의미임)라고 부른다. 그는 강직했고, 정의로웠으며, 스스로 빈곤하게 고생하면서도 권력자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봉건시대에 그와 같은 인물은 드문 편이었다. 그는 품격이 고상하여, 사람들이 그의 글과 그림을 얻으면 보배를 얻은 것처럼 생각했다. 정판교는 평생 많은 그림을 그리고, 많은 글을 썼다.

 

최근 들어 나타난 하나의 현상은 정판교가 쓴 "난득호도(難得糊塗, 멍청하기 힘들다)"라는 네 글자가 여러가지 형태로 제작되어 선물용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한때 세상을 조롱하며 살았던 정판교라는 인물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도대체 "난득호도"는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하여는 몇 가지 의견이 갈리고 있다.

 

첫째, 자조설(自嘲說). 이 글은 1751년(건륭16년) 정판교가 59세 되던 해에 썼다. 이 해 9월 19일에 정판교는 유현에 있었는데, "관아에 일이 없고, 사방의 벽이 비었고, 주위가 고요해서 마치 세상 바깥에 있는 것같았다. 마음속에 갑자기 처연한 생각이 들어서, 그가 생각해보니, 일생을 바쁘게 지내고, 반생을 쓸쓸히 지냈는데, 인생은 원래 이런 것인가? 명리를 다투고, 이기려고 애쓰다가,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그저 사람은 약간 멍청하게 사는 것이 좋고, 모든 일을 멍청하게 처리하면, 잃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으니, 마음은 개략 고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붓을 들어 '난득호도'라는 네 글자를 썼다. 이로 인하여 이 글은 '진정으로 아주 총명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토로한 말이며, 시끄러운 세상, 염량세대에 대하여 내심에서 분개하는 것을 쓴 글'이 되었다."(양사림 <<광릉기재 - 정판교전>>. 안휘문예출판사)

 

둘째, 항의설(抗議說). 기원1754년(건륭19년) 가을, 정판교는 동산 범현에서 유현지현으로 발령받았다. 부임하는 날, 마침 백년만에 오는 가뭄을 만나, 땅이 갈라지고, 강물이 말랐으며, 작물을 누렇게 말라갔다. 그런데, 황제가 파견한 흠차대신 요요종(姚耀宗)은 난민구제에 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정판교에게 서화를 달라고만 요구하면서, 100냥의 은량까지 보내주었다. 그러자 정판교는 괴상한 그림을 하나 그려서 그를 풍자했다. 요요종은 대로하여 그림을 찢어버리고, 지주들에게 양식을 풀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을 굶겨죽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정판교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려는 것이었다. 정판교는 백성의 참상을 보고는 가슴이 아파서 고민했다. 처자식이 모두 권했다: "황제도 신경쓰지 않고, 흠차대신도 못본척 하는데, 당신도 그냥 멍청하게 모른 척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자, 정판교는 화를 내며 말했다: "멍청한 척하는 것도 나 정판교는 할 줄 모른다. 너희들이 어찌 알겠는가, 총명하기도 어렵지만, 멍청하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저 놓아버리고, 한걸음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한 것을 나중에 복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정판교의 이런 성격과 심리적인 요소로 보아서는 진흙에서 핀 연꽃처럼 고아한 품격을 느낄 수 있고, 그자신의 이념과 도덕적인 기준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데서 고통과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총명한 사람이 자기의 양심과 도덕기준에 의하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멍청한 척, 모르는 척하면서 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리하여, 정판교가 "난득호도"라고 쓴 글은 지식인이 정치를 하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고, 부패한 관료사회에서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점을 항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서란천 <<난득호도는 정판교의 항의의 목소리이다>>. 대만 중앙일보 1992. 6. 19)

 

셋째, "심리평안설" 정판교는 유현지현으로 인는동안, 당제인 정묵의 편지를 받았는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의 담장에 대하여 이웃과 소송이 붙었으니, 그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흥화현 지현에게 부탁해달라는 것이었다. 정판교는 서신을 다 읽고, 즉시 시를 써서 회신했다: "천리나 편지를 보낸 것이 담장 하나 때문인가? 그에게 몇 자를 양보하면 또 어떤가? 만리장성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어찌 진시황은 보이질 않겠는가" 그 후에 그는 다시 "난득호도" "흘휴시복(吃虧是福, 손해보는 것이 복받는 것이다)"라는 두 개의 큰 글자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난득호도"의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총명난, 호도난, 유총명전입호도경난, 방일착, 퇴일보, 당하안심, 비도후래복보야(聰明難, 糊塗難, 由聰明轉入糊塗更難, 放一着, 退一步, 當下安心, 非圖後來福報也 / 총명하기도 어렵고, 멍청하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 집착을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하니, 나중에 복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흘휴시복"이라는 큰 글자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만자손지기, 휴자영지점, 손어기즉영어피, 각득심정지반, 이득아심안즉평, 차안복즉재시의(滿者損之機, 虧者盈之漸, 損於己則盈於彼, 各得心情之半, 而得我心安卽平, 且安福卽在時矣 / 가득차면 덜어지게 되어 있고, 비어 있으면 점점 차게 되어 있다. 자기가 손해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 그러면 각자 심정의 절반씩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이니 바로 복을 받은 때가 아니겠는가)"(<<참고소식>> 1991년 4월).

그런데, 여기서 인용한 칠언절구는 그가 쓴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대학사인 동성 장영이 지은 것이다. 이 곳에 억지로 옮겨서 설명하는 것은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손해보는 것이 복받는 것이라는 것과 '난득호도'가 같은 의미라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

 

넷째, "자아청성설(自我淸醒說)" 정판교는 전혀 멍청하지 않았다. 그가 "난득호도"에 흥미를 느낀 것은 스스로 고충이 있어서일 것이다. 주철지(朱鐵志)는 이렇게 본다: "정판교는 아주 명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가 명확히 알고, 정파이고, 강직했기 때문에, 참언에 대하여 어찌할 수가 없을 때 그저 '난득호도'라고 탄식했던 것이다. "난"은 어디가 어려운가? '난'은 바로 그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악한 세력에 대하여 들어도 안들은 척, 보아도 못본척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은 바로 "일지일엽총관정(一枝一葉總關情,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도 모두 사랑이다)"의 그에게 백성의 고통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저 멍청한 척, 모른 척할 수밖에 없어서 고통을 안으로 삭여야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난득호도'라는 탄식이 나온 것이다. (주철지. <<난득호도설에서 질량만리행까지>> 인민일보 1992. 8. 4)

 

정판교의 "난득호도"는 유명하지만, 그의 글에 대하여는 서로 해석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문면의 뜻만을 헤아리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 깃든 깊은 의미를 추구한다. 옛사람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지금에 와서 어찌 모두 알 수 있을 것인가.

 

[참고]

 

"난득호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정판교가 산동에 부임하고 나서 하루는 내주(萊州)의 거봉산(去峰山)으로 유람을 갔다. 원래는 산에 있는 정문공비(鄭文公碑)를 감상할 예정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산중에 있는 모옥(茅屋, 띠집)에 머물게 되었다. 모옥의 주인은 아주 유학자같은 노인이었는데 스스로를 "호도노인(糊塗老人)"이라고 칭했다. 주인은 집안에 탁자정도로 큰 벼루를 하나 진열하고 있었는데, 조각이 아주 뛰어났다. 정판교는 벼루의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 말 아침, 노인은 정판교에게 벼루의 뒤에 써넣을 글을 하나 부탁했다. 정판교는 흥이 일어 "난득호도"라는 네 글자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아래에 "강희수재, 옹정거인, 건륭진사(康熙秀才, 雍正擧人, 乾隆進士)"라고 새긴 도장을 찍었다(* 청나라때 과거는 현-성-중앙정부의 삼단계인데, 현을 통과하면 수재, 성을 통과하면 거인, 중앙에 합격하면 진사였음. 정판교는 강희제때 수재가 되고, 옹정제때 거인이 되고, 건륭제때 진사가 되어 스스로 그렇게 새겼음).

 

벼루가 컸으므로 아직도 여지가 남았다. 그래서 정판교는 주인노인에게 발어(跋語)를 써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노인은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득미석난, 득완석우난, 유미석전입완석경난. 미어중, 완어외, 장야인지려, 불입부귀문야(得美石難, 得頑石尤難, 由美石轉入頑石更難. 美於中, 頑於外, 藏野人之廬, 不入富貴門也 / 아름다운 돌을 얻는 것은 어렵고, 단단한 돌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아름다운 돌이 단단한 돌로 바뀌기는 더욱 어렵다. 아름다움은 가운데 있고, 단단함은 바깥에 있으니, 야인의 초가집에 숨어있고, 부귀한 집문은 넘어서질 않는다)" 그리고는 그도 도장을 하나 찍었는데, 이렇게 적었다: "원시제일, 향시제이, 전시제삼(院試第一, 鄕試第二, 殿試第三, 원시에는 일등, 향시에는 이등, 전시에는 삼등 / 이 노인은 세 단계 과거에서 각각 1,2,3등을 했다고 새긴 것이다)"

 

정판교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로소 이 노인이 지금은 은거한 고위관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호도노인"이라는 이름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즉석에서 붓을 들어, "난득호도"의 아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총명난, 호도난, 유총명전입호도경난, 방일착, 퇴일보, 당하안심, 비도후래복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