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인민폐
제2차인민폐
제3차인민폐
제4차인민폐
제5차인민폐
중국은 1948년 12월 1일 제1차인민폐를 발행한 이후, 지금까지 오무 5차례에 걸쳐 인민폐를 발행해왔다. 그런데, 인민폐에 쓰여진 "중국인민은행(中國人民銀行)"이라는 은행명칭과 액면금액표시에 쓰여진 한자는 누구의 솜씨인가?
제1차인민폐는 1위안부터 50000위안까지 모두 12종액면에 60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폐상의 "중국인민은행"이라는 명칭과 액수는 모두 당시 화북인민정부주석 겸 화북재경판사처주임을 맡고 있던 동필무(董必武)가 쓴 것이다.
제2차인민폐 및 그 이후의 인민폐상의 한자는 누가 쓴 것인지에 대하여 기록상 명확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는 30여년후인 1983년이 되어서야 풀리게 되는데, 원래 제2차인민폐상의 한자는 당시 중국인민은행 금융연구원에서 재직하고 있던 마문울(馬文蔚)이 쓴 것이었다.
제3차인민폐상의 액면금액표시는 인쇄체인 송체로 바뀌었는데, "중국인민은행"이라는 은행명을 여전히 계속 사용되었다.
제4차인민폐를 발행할 때, 액면금액표시를 인쇄체인 송체에서 다시 마문울이 쓴 글로 바꾸었고, 은행명칭도 번체자에서 간체자로 바꾸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문울의 서체를 그대로 사용했다.
제5차인민폐에서 액면금액표시는 송체로 다시 바꾸었고, "중국인민은행"이라는 6글자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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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초 중국사회에서는 서예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인민폐에 쓰여진 "중국인민은행"이라는 6자의 단정한 한예(漢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 여섯 글자가 누구의 솜씨인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바로 이때 <<산서일보>>에서 보도가 나왔다. 인민폐에 쓰여진 한자는 기조정(冀朝鼎)이 쓴 글이라는 것이다. 이 보도가 나오자, 전국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상해의 <<신민만보>>도 기조정이 쓴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다른 몇몇 신문에서는 중국인민은행의 제1기 행장인 남한신(南漢宸)이 썼다고 보도했다. 왜냐하면 남한신 행장도 서예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바로 <<산서일보>>의 이 보도는 누가 진정한 "중국인민은행"이라는 글을 쓴 사람인지에 대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 3월 22일, 중국인민은행총행판공실은 산서성 곡양현 금사항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된다. 서신을 보낸 사람은 <<산서일보>>의 주장을 부인하고, '누가 썼는지'를 확인해줄 수 있다고 하였다. 총행은 이 서신을 받은 후 즉시 총행 금융연구소의 진용(陳溶)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한다.
며칠 후, 북경에서 온 손님(진용과 고급공예미술사 장작동)이 곡양현 황채촌 금사항의 작은 사합원의 나무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반세기가까이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가 바로 마문울이다. 인민폐의 "중국인민은행"을 쓴 바로 그 인물이다. 진용과 장작동은 총행의 "비밀자료 1호"를 가지고 가서 조사를 하고 감정을 한다. 그리고는 자료에 남겨진 글자의 필체는 마문울의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비록 글자에 서명은 없었지만, 마문울이 쓴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84년 9월, 중국인민은행총행은 공문을 통하여, "마문울 동지는 은행건설에 공헌이 있는 구지식분자이며, 1950년 남한신 행장의 위탁을 받아, 인민폐에 '중국인민은행'등의 글자를 썼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1956년, 국무원이 제1차한자간화표를 공포하였다. 지금 사람들이 보는 인민폐상의 "중국인민은행"의 "국(國)"과 "은(銀)"은 모두 간자체로 되어 있다. 1980년 제4차인민폐를 발행할 때, 본행은 "중국인민은행"의 번체자를 간체자로 바꾸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국"자의 안에 있는 "혹(或)"은 "옥(玉)"으로, "은"자의 왼편에 있는 "금(金)"은 간화된 글자로 바꾸어야 했다. 당시, 곡양현에 거주하고 있던 마문울은 서신을 받았고, 그에게 간체화된 "국"과 "은"자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마문울은 이때 이미 80의 고령이고, 기침가래가 심해서 붓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마문울은 간체자 "국"과 "은"을 쓸 수 없었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 것은 현재의 "국"가의 "口"와 은자의 "艮"은 여전히 마문울이 쓴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옥"과 "금"은 인쇄소의 사람들이 가공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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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문울은 청광서30년(1904년)에 산서성 양곡현 황채촌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문도 읽었고, 장사로 돈도 벌었던 부친 마붕정(馬鵬程)은 아들에게 "문울(文蔚)"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글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했다. 과연 문울의 학업성적은 항상 1등아니면 2등일 정도로 뛰어났다. 부친인 마붕정은 매우 기뻐했지만, 그는 아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사를 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방학이 되면 아들을 불러 가게에서 점원노릇을 하게 했다.
마문울은 그러나 부친의 뜻에 따르지 않고, 1920년 태원으로 도망쳐서 시험을 친다. 성립1중, 제1사범, 국민사범의 세 학교에 모두 합격한다. 그는 결국 성립국민사법학교를 선택하여, 자기의 인생을 연다. 그 해는 1920년 여름이었다. 마문울은 23반에 들어갔는데, 서향전(徐向前)은 그보다 1년 먼저 국사에 들어가 있었고, 정자화(程子華), 박일파(薄一波, 상무부장 보시라이의 부친)는 그보다 1년 늦게 국사에 들어왔다.
국사의 제1기교장은 조대문이었는데, 학문이 뛰어난 선비였고, 국민정부에서 고위직에 있었으며, 인재를 중시했다. 그러나 1923년 그는 사직하게 되는데 또 다른 인물 조비렴을 교장에 추천한다. 조비렴은 부임한 후 여러가지 개선을 하며, 교육학원을 창설했다. 마문울은 조비겸이 아끼는 제자였다. 1925년 졸업후, 국사의 부속소학교에 교사로 부임한다. 1930년에는 조비렴의 중매를 통해서 같은 학교에서 일하던 조혜경과 결혼한다. 그 후 염석산의 남경주둔군의 제3집단군판사처에서 비서를 하기도 한다. 수개월후 그는 남경국민정부 내정부의 직원으로 갔고, 조대문이 원장인 감찰원에서 비서를 했다. 중원대전후 그는 사직하고 북경에서 쉬고 있었다.
1935년 마문울은 부작의 장군의 소개로 재정부장인 공상희의 아래에서 중앙조폐창 심사위원회 문서부주임을 맡고 금융계에 발을 디딘다. 1937년, "8.13"항전이 발발하고 상해지구의 공장은 내지로 이전했다. 비용이 많이 들게 되자 당시 중앙,중국,교통,농민등 4개은행이 합하여 "4행연합첩방위원회"를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4련총처"의 전신이다. 1939년 10월 1일, 사련총처는 전시금융의 최고의사결정기구가 된다. 주식은 장개석이 맡고, 부주석은 공상희가 맡았다. 당시 마문울은 "사련총처"의 시찰로서 조사연구업무를 담당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보고서를 작성해서 공상희의 칭찬을 들었다. 1942년, 마문울이 중앙신탁국인사과 견핵과 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공상희로부터 오해를 받아 반년만에 면직당하고 만다. 이후 진상이 밝혀진 후 공상희는 다시 그를 불렀지만, 그는 다시는 당신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면서 거절한다. 이 일은 당시 중경에서 유명해졌고, 당시 중경에서 지하공작을 하고 있던 남한신도 이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직위를 잃은 마문울은 스승인 조비렴과 어울리며 북경에서 놀고 있었다. 북경이 공산당에 점령된 후, 하루는 길 가에서 유연히 북경군관회 정치위원인 박일파를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눈다. 박일파가 마문울의 현재상황은 묻자 마문울은 하는 일이 없다고 얘기한다. 박일파는 쪽지를 써서 그에게 남한신을 찾아가보라고 얘기한다. 당시 중국인민은행은 막 성립되는 때여서 각 방면의 인재가 필요한 때였다. 며칠 후, 마문울은 남한신을 찾아가고, 남한신은 그가 공상희에 감히 대들었던 마문울이라는 것을 알고는 바로 일자리를 준다. 1949년 6월, 마문울은 중국인민은행 금융연구원의 연구원이 된다.
당시 중재위의 주임인 진운은 친히 나서서 화폐발행을 주도한다. 이는 당시 국민당정부와의 하나의 전쟁이었다. 북경, 천진, 상해등의 도시에서는 은원에 대한 투기가 성행을 했다. 그리하여 제2차인민폐를 발행하면서 제1차와는 1:10000의 비율로 하기로 정한다. 즉, 제1차의 10000위안이 제2차의 1위안이 되는 것이다.
남한신은 제2차인민폐의 중요성을 잘 알았고, 인민폐의 표면에 쓰인 동필무의 중국인민은행이라는 해서를 그대로 쓸 것인지를 가지고 고민했다. 스스로 결정하기 어렵자 인쇄국 국장인 왕문환과 함께 주은래총리의 사무실을 찾았다. 주은래총리는 화폐는 국가의 얼굴이므로 함부로 결정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이에 남한신은 마문울을 찾는다. 1950년의 어느 날, 마문울은 남한신의 사무실에 간다. 남행장은 붓을 내주면서 마문울에게 살펴보라고 한다. 마문울은 궁정의 어필이라고 답한다. 남행장은 잘 보았다고 말하면서 몇 글자 써보라고 권한다. 마문울은 주저하면서 이 붓으로 쓰는 것보다는 내 붓으로 쓰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남한신은 그럼 가져와서 써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둘이 한번 누가 더 서법에 진보가 있었는지 겨뤄보자고 말한다.
마문울은 자신의 붓을 들고 남한신의 사무실로 갔다. 남행장은 파란색의 호피선지를 네모나게 접었고, 마문울에게 내가 뭐라고 말하면 그대로 쓰라고 말한다. 마문울은 그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남한신이 좀 다르다고는 생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세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한신은 먼저 "중(中)"자를 쓰자고 했고, 그 다음은 "국(國)"자를 쓰자고 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인,민,은,행,원,각,분등 19개 글자를 모두 썼다. 글자를 다 쓰자 남한신은 당신 글씨는 쓸 수록 개성이 잘 나타나는데 나는 오늘 제대로 수준이 나오지 않는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써보았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가볍게 '중국인민은행' '원각분'을 다시 썼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선택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글자는 다시 썼다.
마지막으로, 남한신은 마문울에게 자신이 생각하기에 잘 쓴 글자를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남한신은 기밀유지를 위해서 마문울에게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지 않고, 글자를 모두 쓰게 하였던 것이다. 마문울은 자기가 남한신의 사무실에서 쓴 그 글자들이 인민폐의 표면을 장식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였었다. 마문울은 이후에도 이 사실에 대한 기밀을 유지했고, 심지어 그의 처와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남한신은 1967년에 해를 입어 죽었는데, 마문울은 1978년이 되어서야 그 소식을 들었다.
1988년 3월 25일 저녁 10시 15분 마문울은 곡양현인민병원에서 서거했다. 향년 8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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