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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중국역사상 대간대재(大奸大才)의 서예가

by 중은우시 2008. 1. 1.

글: 유진(庾晋)

 

중국의 역대 서예작품에 대한 평가중에는 서품(書品)과 인품(人品)은 혈육처럼 연결되어 있는 합일체이고, 인품은 서품보다 높으며, 서예라는 것은 학식 재능 품격이 고도로 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사마광(司馬光)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재승덕자, 소인야(才勝德者, 小人也, 재주가 덕보다 뛰어난 자는 소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품이 저열한 서예가의 서예작품을 수장하는 것은 사악한 기운을 수장하는 것과 같고, 가풍을 더럽히게 될 뿐아니라, 자신의 인품에도 손상이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간신인 채경(蔡京), 진회(秦檜), 엄숭(嚴崇)등은 서예의 대가로 일컬어지지만, 그들의 서예작품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품때문에 작품을 없앴기 때문이다.

 

채경(蔡京) : 서예의 일가를 이루다.

 

채경(1047-1126)은 복건성 선유 사람이다. 자는 원장(元長)이고 송휘종때 육적(六賊)의 우두머리이다. 송휘종 조길은 그를 매우 총애하였는데, 조정에서 매번 채경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송휘종은 형세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강급시키거나 외직으로 내보내서 여론을 무마시키곤 했지만, 그는 항상 금방 원직에 회복시키곤 했다. 숭녕원년에 채경을 상서우복야(제2재상의 직위) 겸 중서시랑에 임명한 때로부터(반년후, 채경은 정식으로 좌복야 겸 문하시랑 즉 제1재상이 되었다), 정강원년(1126년) 채경이 관직에서 파직될 때까지 거의 20여년동안 4번 파면당하고, 4번 다시 기용되었다. 결국, 채경은 나이 80에 귀가 멀고 눈이 보이지 않으며, 걷지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는데도 송휘종은 여전히 퇴위할 때까지 그를 중용했다.

 

채경의 서예는 일가를 이루었다. 광오하기로 이름난 미불조차도 일찌기 자신의 서예는 채경만 못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한번은 채경이 미불에게 "당금의 서예는 누가 제일 나은가?"라고 묻자, 미불은 "당나라의 유공권이후에 당신과 당신의 동생 채변(蔡卞)이다"라고 하였다. 채경이 다시 그 다음은 누구인지 묻자, 미불은 당연히 자신이라고 답한다. 당시 "소항미채(蘇黃米蔡)"라고 할 때의"채"는 원래 채경이었는데, 그의 간사함으로 인하여 후세인들은 채양(蔡襄)으로 바꾸어 말하게 된 것이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어느해 여름, 두 명의 하급관리가 아주 공손하게 채경을 모셨고, 계속 부채를 부쳐 주었다. 채경은 기뻐서, 부채를 달라고 하여, 그 위에 두 구의 두보시를 써주었다. 생각도 못하게, 며칠 후 이 두 명은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 며칠 후 한 친왕이 이 부채를 2만냥에 사간 것이다. 2만냥이라면 보통집안에서 1년동안 쓸 수 있는 돈이다. 이 친왕이 바로 등극하기 이전의 송휘종이었다. 이를 볼 때, 원래 그 자신이 서예가인 송휘종이 채경의 서예작품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건중정국원년(1101년)의 초가을에, 환관인 동관(童貫)이 내정봉공관이 되고, 항주로 파견나가 명금국을 설립하게 된다. 그의 직책은 황제를 위하여 글과 그림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때, 채경은 항주로 좌천되어 온지 이미 1년가량 되었었는데, 그는 동관에게 리스트를 만들어주고, 그에게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주어, 항주에서 민간에 소장되어 온 불후의 전세작품을 동관이 얻게 해준다. 그 중에는 왕우군(왕희지)의 글도 있고, 고굉중의 그림도 있다. 그리고, 송휘종이 꿈속에서도 찾던 남당 주문구의 <<중병회기도(重屛會棋圖)>>도 있었다. 이로 인하여 동관은 송휘종에게 큰 칭찬을 듣게 된다. 그리고 환관 동관이 중간에서 말을 잘 해주는 바람에 황제는 채경에 대하여 더욱 호감을 가진다. 이후 동관과 채경은 서로 결탁하여 송휘종을 끼고 돌게 된다. 이는 북송왕조에게는 하나의 재난이었다. 북송이 망한 데에는 상당한 정도로 채경과 같은 간신과 동관, 고구와 같은 환관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송휘종은 무능하고, 황음무도하여 결국은 아들인 송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잡힌다. 80세가 된 채경도 군에 끌려간다. 그가 군에 끌려가는 동안에 백성들이 그에게 밥 한숫가락, 국한그릇 주지 않는 바람에 굶어죽게 된다. 죽은 후에 관도 없어서, 갈곳없는 부랑아들이 묻히는 누택원에 묻힌다.

 

진회(秦檜): 송체자의 창시자.

 

진회(1090-1155), 자는 회지, 강녕(강소 남경) 사람이다. 1126년, 금나라병사가 변경을 함락시키자, 진회는 휘종, 흠종의 두 임금과 함께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다. 이후 금태종의 동생인 달뢰에게 의탁한다. 나중에 석방되어 남으로 돌아온 후, 그는 남송의 예부상서, 두 차례에 걸친 재상의 직위에 앉아서 19년간 집정한다. 송고종 조구의 총애하는 신하였다. 그는 악비를 모함하여 죽였고, 충신양장을 많이 쫓아냈으며, 주화파로 금나라에 투항할 것을 주장했다. 금에 대하여 신하를 칭하고 돈을 바치는 정책을 썼다. 그는 남송고종시기의 유명한 간상이다.

 

진회는 장원출신으로, 박학다식하였고, 다재다능하였다. 서법에는 아주 조예가 깊었다. 관직에 있을 때도 처음에는 아주 명성을 얻었고, 송휘종의 총애도 받았다. 그리하여 파격적으로 어사대 좌사간에 발탁되어, 어사대아문의 공문을 담당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가 공문을 처리함에 있어서, 진회는 전국각지의 공문서의 글자체가 일치하지 않아서 규범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공무의 짬짬이 글자체를 연구한다. 특히 송휘종의 글자체에 대하여는 깊이 연구한다. 나중에 송휘종 조길의 "수금체(瘦金體)"의 자체를 기초로 새로운 자체를 만들어냈다. 아주 단정하고 간편하여 배우기 쉬웠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창조한 새로운 글자체를 올렸다. 이는 송휘종의 관심을 끌었고, 진회로 하여금 신자체를 써서 전국에 반포하여 보급하도록 하였다. 전국에서 기본적으로 이 모범글자체로 공문을 쓰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금방 보급되었다. 이 글자체는 점차 변화하여 인쇄용의 "송체(宋體)"가 된다. 송휘종 조길의 "수금체"와 "송체"는 일맥상통한다. 어떤 사람은 송체가 바로 "수금체"의 인쇄체라고 한다. 오늘날도 송체는 가장 널리 쓰이는 자체이다. 이처럼 송체는 한자의 보급과 전파에 공이 크다. 이 점만으로도 진회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서예가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자체의 명명법으로 따지자면, 이 글자체는 당연히 "진체(秦體)"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진회가 간신이므로 이 글자체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그저 "송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도 그의 사람됨 때문이다.

 

엄숭(嚴崇) : 대체할 수 없는 "지공당(至公堂)"

 

엄숭(1480-1567), 자는 유중(惟中), 호는 개계(介溪), 면암(勉庵)이다. 강서성 원주 분의 사람이다. 엄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5세때 엄씨사당에서 글을 배우고, 9세때 현학(縣學)에 입학하고, 10살때 현시(縣試)에 발군의 성적으로 뽑히고, 19세에 거인이 되고, 25세때 전시 중이갑으로 한림원에 들어간다. 이 학력,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엄숭은 우등생이었고, 어려서부터 신동이었다. 당시 가정황제는 장생불로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청사(靑詞, 신에 제사지내는 문서)를 써서 하늘에 복을 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엄숭은 청사를 아주 잘 썼기 때문에 가정황제의 환심을 샀다. 그리하여 내각수보(재상)의 지위에 까지 오른다.그리하여 세상사람들은 그를 "청사재상"이라고 풍자하여 부르기도 했다. 그의 권력은 조야를 휘둘렀고, 시류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그에게 붙었다. 30여명의 관리들이 그의 의자(義子)였다.

 

제여산이 쓴 책에서 보면, 청나라때 경성에는 순천부향시를 치는 공원(貢院)이 있는데, 순천시향시는 북위(北위)라고 하여, 천하향시중 최고였고, 황제도 아주 중시했으며, 주시험관은 상서급이 맡았다. 그런데 이 공원의 대전편액에는 "지공당(至公堂)"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는데, 바로 엄숭이 쓴 글자이다. 이처럼 조정에서 준재를 선발하는 당당한 장소에 걸려있는 것이 바로 대간신이 쓴 편액이었다는 점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누구라도 이를 마음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건륭황제가 이를 갈아치우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리하여 조정에서 글을 잘 쓰는 신하로 하여금 이 세 글자를 써보도록 하였고, 스스로 서예에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륭도 여러 번 써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어필이나 다른 사람의 글이 모두 엄숭이 쓴 글만 같지 못하여,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간신의 글자를 그대로 걸어놓게 하였다.

 

엄숭이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고인의 서예작품을 아주 좋아했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북송의 저명한 화가인 장택단의 불후의 작품 <<청명상하도>>를 얻기 위하여, 엄숭은 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가정년간에 엄숭은 이 그림이 원외랑 왕진재의 수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계문총독 왕천을 보내어 구매하겠다고 한다. 왕진재는 엄숭의 권세가 무섭고, 이 그림을 내놓기 싫어서, 명인을 불러 그림을 베끼게 한 다음 베낀 그림을 엄숭에게 보냈다. 엄숭은 가짜인 줄 몰랐다. 그런데, 원그림을 표구한 적이 있는 표구사가 가짜라는 것을 알아냈다. 엄숭은 화를 참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재상을 기만한 죄를물어 왕진재를 잡아들인다. 왕진재는 진품이 외삼촌인 육치의 수중에 있다고 이실직고한다. 엄숭은 권세를 이용하여 육치의 수중에서 진품을 빼앗아 버린다. 가련한 왕진재는 감옥에서 죽는다. 엄숭은 권력을 이용하여 진품을 빼앗은 내역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왕천이 걱정되어, 가정 38년(1559년) 엄숭은 "치군실기"의 죄명을 뒤집어씌워 살인멸구한다. 명말청초의 희극가인 이옥은 이 사실을 기초로 <<일봉설>>이라는 글을 써서 희극무대에 올린다. 나중에 엄숭은 점차 권력을 잃고 그 아들도 처단당하고, 가산도 몰수된다. <<청명상하도>>는 다시 궁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엄숭은 붕당을 만들고 충신양신을 해쳐 결국은 삭적되어 평민으로 되고, 가산은 몰수당한다. 가산몰수된 금액이 황금3만여냥, 백은200만냥으로 당시 전국의 1년간 재정수입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외에 전답이 백만무, 집이 6천여칸이고 무수한 골동, 서호ㅏ작품이 있었다고 한다. "자여기인(字如其人, 글은 그 사람과 같다)"이라는 말은 헛된 것인가? 엄숭이 죽기 직전에 썼다는 스스로 억울하다는 점을 표현한 글이 이런 오차를 보여준다.

 

평생보국유충적(平生報國惟忠赤)

신사종인설시비(身死從人說是非)

 

죽을 때까지도 그는 자신은 충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간신이지만 스스로 정의에 가득찬 충신이라고 생각하는 심정은 그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의 글은 호방하고 청아하며 고결하다. "자여기인"이라는 것은 사실 글을 통하여 글을 쓴 사람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을 뿐이고, 품행은 글로서 알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