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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의리를 중시한 역대황제는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07. 11. 2.

글: 손옥량(孫玉良)

 

역대의 황제들 중 함께 창업하고, 생사를 함께 하고, 환난을 함께 했던 의형제(창업공신)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3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토사구팽형. 한고조 유방, 명태조 주원장이 대표적이다. 원래 함께 창업했던 의형제들을 대거 죽였다. 둘째, 평화적 권력박탈형. 송태조 조광윤이 대표적이다. 그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술 한잔씩을 주면서 병권을 내놓게 하다)"은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의형제들을 감격시켰다. 셋째, 중상을 내리고 후대하는 형. 당태종 이세민이 대표적이다. 그는 그와 함께 창업했던 24명의 공신을 능연각에 화상으로 걸어놓고, 항상 그들의 공을 잊지 않았으니, 천고명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장 의리를 중시했던 황제를 들라면 아무래도 삼국시대의 소열황제 유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유비는 중국 5천년 이래로 "의리"라는 측면에서는 최고의 수준에 달했다. 그는 의형제와의 의리를 위하여 4가지를 버렸다.

 

첫째, 형제의 의리를 위하여 마누라를 버렸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를 한 후 함께 강산을 닦았다. 세째동생 장비로 하여금 가족을 데리고 서주를 지키라고 하였는데, 장비는 술에 취해서 여포와 그의 장인인 조표가 안팎에서 호응해서 서주를 기습하는 바람에 장비는 놀라서 유비의 가족을 돌볼 틈이 없이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관우가 그에게 "형수는 어디있는가"라고 물으니, 장비는 "모두 성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따. 관우는 그를 원망하면서 말했다. "네가 당초에 성을 지키겠다고 했을 때 뭐라고 했는가? 형님의 분부는 어디로 갔는가? 이제 성도 잃고 형수도 붙잡혔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면서 장비에게 칼로 자결하라고 하였다. 이때 유비가 앞으로 나와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어찌보면 가장 인정미 넘치는 말이지만, 또 어찌보면 가장 몰인정한 말을 한 것이다. 이 말에 의형제들은 감격했지만, 천하의 부녀들로부터 원망을 듣게 된다. 유비가 한 말은 이렇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형제는 수족이요, 처자는 의복이라. 의복은 찢어지면 기우면 되지만, 수족이 끊어지면 어찌 다시 붙일 수 있겠는가?" 형제의 의리와 마누라의 사이에서 유비는 전자를 택한 것이다.

 

둘째, 형제의 의리를 위하여 자식을 버렸다. 저명한 장판파(長板坡)의 전투에서 조자룡은 유비의 아들 아두를 보호하기 위하여 조조의 만마군중에서 포위망을 뚫고 아두를 성공적으로 구해냈다. 유비의 당시 태도는 어떠했는가? 당시의 장면을 보자: 조자룡이 막 잠이 든 아들을 건네주었다. 관우는 기뻐서, "다행히 공자가 무사합니다"라고 외쳤다. 두 손으로 유비에게 넘겨주자, 유비가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집어던지면서 말했다. "너 이 멍청한 녀석 때문에 나의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조운은 급히 아두를 땅에서 안아올리면서 울면서 말했다: "저 조운이 죽더라도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유비가 자식을 던져서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는 장면이다. 필자는 이것이 유비의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나중에 관우가 맥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유비의 의자인 유봉(劉封)이 맹달(孟達)의 유혹에 넘어가서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관우가 목숨을 잃었다. 맹달은 겁이 나서 조조에 투항했고, 유봉에게도 함께 투항하자고 권했다. 유봉은 그러나 기개가 있어 투항하지 않았으며, 글을 가져온 사자를 죽여버리고, 맹달과 싸웠으나, 결과적으로 대패했다. 돌아와 유비를 만난 후에 관우의 일에 대하여 변명했다. "숙부가 난을 당한 것은 제가 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맹달이 저지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화를 내며, "너는 사람음식을 먹고 사람 옷을 입고 있고, 흙이나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가 아니지 않느냐. 어찌 도적이 그만두라는 말을 듣느냐?"라고 하고는 좌우에 명하여 유봉을 참하게 했다. 의형제인 관우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양아들을 죽인 것이다.

 

셋째, 형제의 의리를 군법(軍法)을 버렸다. 자고로 행군전투에서 군법이 가장 중요하다. 군법이 없으면 군대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군법과 형제간의 의리라는 난제에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 "대의멸친" "멸사봉공"을 주장할 것이다.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인하여 대의를 희생할 것인가. 그러나, 유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의연히 형제간의 의리를 선택했다. 적벽전투에서, 제갈량은 관우를 보내어 조조가 도망칠 때 지나갈 화용도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제갈량은 관우에게 군령장을 쓰게 했다. 그러나, 관우는 사사로운 정으로 인하여 예전에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조조를 고의로 살려주게 된다. 그러나 군령장을 썼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벌해야 했다. 제갈량은 "이는 관운장이 조조와의 옛정을 잊지 못해서 고의로 풀어준 것입니다. 군령장이 있으니 군법에 따라 처결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주위의 병사들에게 참하라고 명했다. 만일 제갈량이 이후의 마속의 경우처럼 '읍참관우"를 했다면 포청천과 더불어 천고의 미담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새로 쓸 필요는 없다. 유비는 "우리 세 사람이 예전에 결의를 맺을 때 같은 날 죽기로 맹세했다. 관우가 비록 법을 어겼지만, 예전의 맹세를 어길 수는 없다. 과오를 기록한 후, 향후 공을 세워서 이를 속죄받도록 하자" 그리하여 제갈량도 관우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비록 천고의 천재이지만, 여러 관계들로 인하여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기산을 6번이나 나서지만 큰 공을 세우지 못한 것에 아마 군법이 엄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넷째, 형제의 의리를 위하여 천하를 버리다. 형제의 의리와 천하는 어느 것이 중요한가. 99.99%의 사람들은 천하를 택할 것이다. 유비는 그렇지 않았다. 관우가 해를 입자, 형제의 복수를 위하여 유비는 만리강산을 버렸다. 관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의 반응을 보자: "나는 관운장과 같은 날 죽기로 맹세했다. 그가 없다면 나 혼자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마량, 이적이 보고하기를 유봉, 맹달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고 하자, 유비는 울면서 말했다. "나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할 때, 같은 날 죽기로 맹세했다. 이제 관우가 이미 죽었으니, 내가 어찌 홀로 부귀를 누릴 수 있겠는가?" 조자룡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이롭지 못함을 고하고 반드시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적(漢賊, 조조)의 복수는 공적인 것이요, 형제의 복수는 사적인 것이다. 천하를 중히 여기소서". 조자룡의 말은 아주 당당하였다. 결국,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는 것은 바로 한나라의 강산을 통일하고 문무장군들이 나라를 세우는 공을 세워 결국 집안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함인데, 당신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대계를 무너뜨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유비가 어떻게 대답하였겠는가? 그는 "짐은 동생을 위하여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록 만리강산이 있은 들.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이런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오다니, 정말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관우의 행동이 천리를 단기로 달려 관문을 넘고 장수들을 죽이며 형수를 보호해서 형을 만나러 온 것이 의리의 전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유비의 행위는 관우보다 만배는 더 하다. 유비가 진짜 의리있는 사람이다.

 

유비가 결국 동생의 복수를 하다가 백제성에서 패주하다 목숨을 잃는다. 고래로 관포지교가 유명하고, 백아와 종자기의 지음지교가 유명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러 입에 올릴 뿐이다. 그러나,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는 후세 사람들이 방회세력을 만들 때마다 그들은 신처럼 모시고, 제사지낸다. 이것은 절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풍속이 중화문화의 하나로 계속 전해져 내려갈지도 모르겠다.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법제의 관념이 약했다. 인치가 법치보다 중요했다. 대체로 중국인들의 뼛속에는 유비와 비슷한 "�시학" "의리우선", "인정이 법제보다 우선"한다는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