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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묘지명: 가장 후안무치하고 역겨운 글

by 중은우시 2007. 10. 18.

글: 장계합(張繼合)

 

세계에서 가장 후안무치하고 역겨운 글은 죽은 자를 기리는 문자, 통상적으로 "묘지명"이라고 칭하는 것일 것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끝도 없이 끌어올리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을 함부로 고쳐버리며, 잘못된 점을 감싸주는 것에 이르면 보는 사람이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묘지명"은 고명조예(沽名釣譽, 이름을 팔고 명예를 낚다), 기세도명(欺世盜名,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치다)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비장하면서도 화려한 문자는 한마디로 말하면 적막하면서도 절박한 광고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웃으면서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묘지의 앞에서 인생을 종합하고, 공과를 평가하는 것은 간이 작은 사람은 할 수도 없다. 얼굴이 두껍지 않아도 할 수가 없다. 죽은 자에 대하여 값싼 찬미를 늘어놓지 않는다면, 음양의 두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묘지명"은 "지(誌)"와 "명(銘)"이라는 두 가지 문체가 함께 섞인 것이다. "지"는 산문체로 성씨, 관적, 생전의 내력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다. "명"은 운문으로 공덕을 칭송하고, 애도하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중국의 묘지명의 기원은 4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유송(劉宋) 대명(大明) 8년인 것이다. 이때, 유회민(劉懷民)이라는 사람의 묘지명이 중국의 첫번째 묘지명이다. 나중에 묘지명을 쓰는 것은 순수하게 "장인"의 일이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대필하는 것이 많았고, 문체가 특수하므로 역사상 전해져 내려오는 좋은 작품은 거의 없다. 기효람의 <<열미초당필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한 명문가의 자제가 길을 잘못들어 바위동굴에 들어갔다. 거기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을 만났는데, 용기를 내서 인사를 했다. 예를 마친 후 젊은이가 물었다. "어르신의 묘지는 어디어디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곳에 계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나는 살아생전에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글을 읽은 것도 그저 살기 위한 것이었으며, 관리를 할 때도 본분을 지켰을 뿐이며 일생동안 무슨 내세울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생각도 못하게, 내가 죽어서 묻힌 후 몇년이 지나자 묘앞에 비문이 세워졌는데, 위에 쓴 내용들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런저런 말들을 하고, 귀신들도 그곳에 모여서 놀려대니, 내가 도저히 참ㅇ르 수가 없어서, 아예 멀리 이 곳으로 도망쳐 와서 조용히 지내는 중이다. 자기의 시비공과는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이처럼 죽은 자에게 아부하는 것은 누구든 부끄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자, 비야(碑者, 也)". 이는 <<문심조룡(文心雕龍)>>에 있는 말인데, 비()는 "더하다, 증가시키다"는 뜻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원래 장엄한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할수록 황당해져서, 공덕이 있건 없건, 비석을 세울 때는 거짓말, 빈말, 과장된 말, 의례적인 말로 채워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비문을 믿었지만, 나중에는 신뢰를 잃어버렸다. 읽는 사람들은 아예 그 내용을 반대로 생각한다. 동쪽이라고 적혀 있으면, 읽을 때는 서쪽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돌멩이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무측천은 아예 자신을 위하여 "무자비"를 세운 것이다. 그녀는 말이 많아지면 헛소리가 많아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무슨 시비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너무나 총명한 선택이었다. 남자들은 어째서 이런 걸 생각지도 못했을까? 아마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감시 시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죽어서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었겠는가? 그것은 인생의 절창(絶唱)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