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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정교금(程咬金): 수말당초의 혼세마왕

by 중은우시 2007. 9. 20.

글: 허휘(許暉)

 

정교금(程咬金, 589-665). 수나라말기의 난세에 먼저 이밀(李密)의 수하가 되었다가, 다시 왕세충(王世充)의 수하가 되며, 최종적으로 이세민(李世民)에게 의탁한다. 당나라건립과정에서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능연각24공신중 19번째로 올라있다. 당고종때 서돌궐평민을 무고하게 죽인 죄로 파면되었다. 당고종 인덕2년(665년)에 천수를 마친다.

 

<<수당연의(隋唐演義)>>라는 역사소설을 보면 정교금이 등장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두 눈썹이 곧게 서 있고, 두 눈은 부리부리하다. 뾰루지가 가득찬 얼굴에는 살덩이가 출렁거린다. 지저분한 입술로는 날카로운 이빨이 나와 있다. 뺨에는 담홍색의 구렛나룻이 말려져 있다. 귀의 뒤에는 봉두난발이 있다. 거칠며 호기있는 기질에, 마치 쇠로 만들어진 듯하다. 재빠르고 강인한 몸은 마치 구리로 빚은 것같ㅌ다. 실로 강직한 사나이며 누구나 보통내기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정교금의 용모와 기질에 대한 묘사는 정사(正史)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정교금의 원래 이름은 교금(금을 깨물다)이다. 나중에 관직을 얻은 후에 이 이름이 너무 우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개명하여 정지절(程知節)이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역사서에 나오는 정지절이 바로 정교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정교금은 제주동아(濟州東阿,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사람이다. 청년시절에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사용한 병기는 삭(?)이었지, 전설에 나오는 판부(板斧)가 아니었다. 삭이라는 것은 자루가 긴 세모난 창(矛)이다. 말위에서 휘두르면 확실히 위풍당당하다. 조조가 전선(戰船)에서 지었다는 횡삭부(橫?賦)에 나오는 삭이 바로 이 병기이다. 물론 정교금은 조조처럼 운치가 있지는 않았다. 그는 수나라 말기의 난세에 태어나서, 삭을 들게 된 것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 수백의 무리를 모아서 세상에 나온 것은 무슨 와강채(瓦崗寨)의 혼세마왕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고향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정교금은 강도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사람들을 이끌고 강도로부터 지키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당시 전국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정교금의 시골무리들이 살아가기에는 매우 힘든 세월이었다. 반드시 강대한 역량을 지닌 자에게 의탁해야만 계속 생존해나갈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정교금은 이 수백명의 작은 부대를 이끌고 와강군(瓦崗軍)의 대장인 이밀(李密)에 의탁했다. 이밀은 수나라말기의 난세에 나타난 걸출한 인물이었다. 군령이 엄숙하여, 한번 명이 내려지면 산처럼 위엄이 있었다. 사병들을 형제처럼 대하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정교금이 그의 수하가 되자 물만난 고기와 같았다. 이밀은 군내에서 8천명의 정예병사를 뽑아서 사표기(四驃騎)라고 불렀고, 자신의 호위부대로 삼았으녀 내군(內軍)이라고 하였다. 정교금은 바로 그 내군중 한 부대의 두목이었다. 관직은 내군표기(內軍驃騎)였다. 이밀은 자주 자신의 이 8천부대는 백만대군에 필적한다고 자랑하곤 하였는데, 이것을 보아도 그가 정교금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 무덕원년(618년), 이밀은 연속 4번 수나라의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진공한다. 북망산전투에서 정교금은 처음으로 그의 영웅적인 기개를 드러내고, 이때부터 아주 두각을 나타낸다. 와강군과 수나라의 대장 왕세충(王世充)은 북망산에서 결전을 벌였는데, 이밀은 정교금에게 명하여 내군을 이끌고 이밀을 호위하게 하였다. 유명한 대장 선웅신(單雄信)이 외군(外軍)을 이끌고 바깥에 주둔했다. 왕세충은 선웅신의 군영을 몰래 기습했고, 선웅신은 이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밀은 정교금과 또 다른 대장 배행엄(裴行儼)을 보내어 선웅신을 구원하게 하였다. 배행엄은 별명이 "만인적(萬人敵)"이었다. 당연히 제일 앞장서서 뚫고 나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무렇게나 쏜 화살에 맞아서 말에서 떨어지고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긴급상황에 정교금은 말을 몰고 달려나갔다. 연속으로 여러명을 죽이며 나가니 수나라군대가 짚단처럼 쓰러졌다. 정교금이 배행엄의 곁으로 달려가서 몸을 숙여 그를 말에 끌어올려 안고는 자신의 군영으로 퇴각했다. 이때 수나라군대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어, 죽어라 정교금을 추격했다. 정교금은 한 사람을 안고 있어 말 위에서 행동이 민첩하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며 장삭(長) 한 자루가 가슴을 뚫고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정교금은 천천히 머리를 돌려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뜨고 쳐다보니 상대방은 간담이 서늘했다. 정교금이 벽력같이 소리지르는 순간에 장삭을 부러뜨리고, 삭두(頭)로 상대방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군영으로 돌아왔다. 장삭이 가슴을 뚫고 나왔음에도 정교금이 죽지 않은 것을 보면 부위가 그다지 중요한 부위는 아니었나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교금의 이번 전투에서의 행동은 그의 전설적인 명성을 얻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렇지만, 이번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결국 이밀이었다. 정교금, 배행엄, 진숙보(秦叔寶), 선웅신이 모두 왕세충의 포로가 되었다. 이밀 본인도 겨우 도망쳐서 목숨을 구하고, 이연(李淵)에게 의탁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피살되고 만다.

 

왕세충은 이 용맹한 투항장수를 아주 중시한다. 정교금은 용맹한 장수일 뿐아니라, 관상의 대가이기도 했었다. 그는 진숙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왕세충은 도량이 좁고, 헛된 소리를 많이 한다. 주술을 외고 맹서하기를 좋아하니, 무당나부랭이에 불과한데, 어찌 난세의 주군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정교금의 마음 속에 있던 주군은 누구인가? 역사서에서는 당연히 사후제갈량으로 진왕 이세민을 꼽는다. 정교금과 같은 난세효웅에 대하여 이연, 이세민 부자도 일찌감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공작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의 희극적인 일막이 연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왕세충과 이세민의 병사들이 근접전을 벌일 때, 정교금과 진숙보는 전방의  말위에 있었다. 멀리서 왕세충을 향하여 읍(揖)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를 잘 봐서, 잘 돌보아주었으니, 우리는 그대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본성이 의심이 많고, 주변의 소인들도 자주 선동한 우리가 몸을 의탁할 곳이 아닌 것같다. 이제 떠난다"라고 말하고는 수십명의 동료들과 함께 말을 달려 이세민의 군영으로 도망쳤다. 정교금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의 위명에 겁을 먹은 왕세충의 부하들은 그저 두는 둥그렇게 뜨고 정교금일당이 달아나는 것을 보기만 했지,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정교금과 진숙보가 당나라에 귀순하는 희극적인 일막이다.

 

이후 정교금은 이세민의 오른팔이 된다. 매번 전투마다, 반드시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 당나라의 건립에 큰 공을 세운다. 동시에 태자 이건성의 미움도 산다. 이연이 등극한 후, 정교금은 숙국공(宿國公)에 봉해진다. 이건성집단과 이세민집단은 태자의 지위를 놓고 피바람나는 암투를 벌인다. 정교금은 제일 먼저 이건성에 의하여 정리할 대상으로 지목된다. 그리하여, 이세민의 곁에서 멀리 떨어진 강주로 보내어 강주자사(康州刺史)를 하도록 한다. 강주는 지금의 광동성 덕경현이다. 장안으로부터 10만8천리가 떨어진 곳이다. 정교금은 다급해졌다. 이세민에게 "나를 이동시키는 것은 대왕의 팔을 자르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순망치한이라고, 팔이 없어지면 왕의 세력이 모자라니, 그들이 금방 손을 쓰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빨리 아이디어를 내주십시오. 생사존망이 이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들의 옹립하에 이세민은 현무문사건을 일으키고, 이건성집단을 주살하며, 2달후에는 부친 이연을 핍박하여 황위까지 물려받아. 이세민이 정식으로 등극한다. 정교금은 이번 공로로,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이 되고, 칠백호를 하사받는다.

 

이후, 정교금은 손을 내밀면 옷이 들어오고, 입을 벌리면 밥이 들어오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능연각24공신의 항렬에까지 오르는 것이다. 정교금의 명망은 중천에 뜬 해와 같았다. 개국원로로 전설적인 영웅으로 뱅대한 제국은 그들의 뒷마당과 같았다.

 

당고종 현경원년(656년)전에 정교금은 이런 걱정없는 기생충같은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현경2년, 이미 68세된 정교금은 총산도행군총관(蔥山道行軍總管)이 되어, 서돌궐을 원정하는 사령관이 된다. 응사천전투에서 2만의 서돌궐군과 좁은 길에서 맞부딛친다. 전군총관 소정방(蘇定方)은 선봉부대였다. 소정바은 친히 5백의 기병을 이끌고 서돌궐을 맞이한다. 결과적으로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이겼으며, 서돌궐이 대패했다. 소정방은 승기를 틈타 20리를 추격하며 15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고, 노획한 마필, 무기는 부지기수였다. 소정방의 이번 승리는 한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바로 당나라군대의 부대총관인 왕문도(王文度)였다. 왕문도는 소정방의 공로를 시기하여, 사령관인 정교금에게 계책을 보고한다: "이번 전투는 비록 승리했지만, 우리 군대에 사상자가 있습니다. 소정방처럼 5백의 기병을 깊이 적에게 돌입하게 되면 너무 조급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군대를 모아서 방진(方陣)을 만들어 물자를 가운데 두고 천천히 진공해야 하다가 적군을 만나면 다시 결전을 벌이는 것이 만전지책일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왕문도는 정교금에게 슬쩍 말을 덧붙인다. 즉, 황상이 따로 밀지를 자기에게 주었는데, 황상은 정교금이 너무 용맹하고, 나이도 많아서 전체를 보고 의사결정하는게 어려울 수 있을지 몰라, 자기에게 정교금을 견제하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정교금은 황상이 별도로 밀지를 내려 부사령관에게 주었다는 말을 듣자 어쩔 수 없이 왕문도의 계책을 따르게 되었다. 당나라군대는 방대한 군수물자를 가운데 두고 천천히 전진했다. 당나라군대가 서역에 들어가면, 식량과 풀이 모자라니 당연히 적극적으로 진공해야 하고, 속전속결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병가의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당나라군대는 하루종일 말 위에 있어야 하고, 갑옷을 벗지도 못하며, 진을 만들어 행군하게 되므로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게 되었고, 심지어 많은 말들이 죽기까지 하였다. 소정방은 이것을 보고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몰래 정교금에게 건의했다: "병사를 데리고 적을 토벌하러 나와서는 지금 지키기만 하고 있으니 앉아서 피곤해졌고,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떻게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주상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 부장에게 명령을 내리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바라옵건데 왕문도를 체포하고 조정에 글을 올려 회신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정방은 확실히 왕문도가 말하는 밀지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68세의 정교금은 확실히 늙었다. 젊을 때처럼 날카롭지 못했다. 소정방의 이 말도 그냥 흘러듣고 말았다.

 

대군이 항독성(恒篤城, 지금의 카자흐스탄 동남부)에 이르렀을 때, 성안에 있던 수천의 소그드인들이 항복을 청해왔다. 왕문도는 "이들 오랑캐들은 거짓으로 투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가기만 하면 그전 처럼 싸울 겁니다. 아예 그들을 전부 다 죽이고 재물은 몰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소정방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한다. "대당은 정정당당한 정의의 부대이고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도적이 되는데, 어떻게 반란을 평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하였다.

 

정교금은 소정방의 조언을 듣지 않고, 수천명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성안의 재물도 모조리 노략질했다. 정교금은 상당한 재물을 나눠얻었다. 소정방만은 자신에게 배분된 재물을 굳이 받지 않았다.

 

이번 살륙에서 도살된 자들은 투항한 평민들이었다. 이후 서역지방에서 아주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서역의 각 부는 더 이상 감히 당나라에 의탁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된 것이다. 당나라군대는 홀로 적진에 깊숙히 들어갔는데, 현지부족의 지원도 받지 못하여 결국 아무런 성과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장안에 돌아와서, 왕문도는 "조서를 날조한 혐의"로 사형을 받았다. 당고종은 그를 사면해서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 정교금은 사형은 면하고 관직은 파면되었다. 정교금은 너무 늙었다. 그래서 스스로 나서서 은퇴를 신청한다. 그후 그는 집안에서 말년을 지내다가 인덕2년(665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