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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 자금성(紫禁城)

by 중은우시 2007. 5. 24.

 

명나라때의 제3대황제인 영락제 주체(朱)는 주원장의 넷째아들이다. 1402년 주체가 황위를 빼앗은 후, 북경성에 자금성을 건축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자금성은 72만평방미터이며, 궁전누각을 포함한 건축물이 모두 786종이 있어, 세계최대의 건축군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금성은 원래 명나라, 청나라 양대의 황궁이었고, 모두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 거주했다. 자금성의 집은 전설에 따르면 9999칸반이어서 옥황상제의 1만칸보다 반칸이 적다는 것이다. 현대 고건축물전문가의 과학적통계에 의하면, 고궁의 대소 궁, 전, 당, 루, 각은 합하여 8700여칸이라고 한다.

 

태화전(太和殿)은 외조(外朝)의 주전(主殿)이다. 속칭 금란전(金鸞殿)이라고 한다. 현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태화전은 강희34년에 새로 지은 것이며, 전각앞의 광장은 면적이 3만평방미터에 달한다. 이곳은 황제의 등극, 혼례등 중대한 의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의식을 거행할 때는 문무관리, 의장대열이 근 천명 이곳에 줄을 맞추어 서서 황제를 배알했다. 다만 너무 넓어서 신하들은 전각 안의 황제를 볼 수도 없고, 금란전과 그 안의 황제는 더욱 신비막측하게 느껴진다.

 

태화전과 이어진 계단에는 구름과 용의 문양을 새겨두었는데, 이러한 계단은 오로지 황제 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었다. 위에는 중국민간에서 말하는 금란보좌(金鸞寶座)가 놓여있다. 보좌의 바로 위에는 "반룡조정(盤龍藻井)"이다. 조정에는 용이 한 마리 새겨져 있다. 용의 입에는 빛나는 둥근 구슬이 무려져 있는데, 이를 "헌원경(軒轅鏡)"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전설에 의하면 중국고대의 헌원씨가 만들었다고 하며, 천자의 진짜가짜를 가려낼 수 있는 신기라는 것이다. 원세개가 등극할 때, 헌원경이 떨어져서 자기를 칠까봐 두려워하여, 명을 내려 용상을 약간 옮겨놓게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영락제가 자금성을 지을 때, 각종 공무를 처리하는 장소인 외조와 황제의 개인생활장소인 내정(內廷)으로 구분하였다. 보화전(保和殿)의 북쪽이 내정이고, 황제가 머무는 것이다. 내정의 출입문은 건청문(乾淸門)의 앞에 자웅의 각각 한마리씩의 금사자를 놓아 두었다.

 

비록 당시 영락제가 궁전을 매우 크고 높게 만들었고, 경비를 삼엄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이러한 동으로 만들고, 돌로 만든 맹수로 신하와 백성들을 겁주려고 하였지만, 1911년 신해혁명은 전세계를 뒤흔들고, 결국 자금성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선통황제 부의는 자금성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황제라는 칭호를 듣게 된다. 자금성은 북경시의 중심에 있고, 오늘날에는 고궁(故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의미는 "과거의 황궁"이라는 뜻이다. 고궁은 동서가 750미터, 남북이 960미터이며, 면적은 72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고궁의 전체 건축물은 두 개의 견고한 방어선으로 둘러싸인 중간에 있다. 바깥둘레는 너비 52미터, 깊이 6미터의 호성하(護城河)로 둘러싸여있고, 강물이 성을 둘러 흐른다. 이어서 둘래 3킬로미터의 성벽이 있는데, 성벽의 높이는 근 10미터이고, 바닥너비는 8.62미터이다. 성벽에는 4개의 문이 있는데, 남쪽에 오문(午門), 서쪽에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성벽의 4귀퉁이에는 4개의 각루(角樓)가 서 있고, 각루는 3층구조로 되어 있으며, 아주 조형이 아름답다.

 

방대한 고궁의 곳곳에는 중국문화가 체현되어 있는데, 고궁은 크게 두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남쪽은 업무구역, 즉 외조이며, 북쪽은 생활구역 즉 내정이다. 외조내정의 모든 건축은 중축선(中軸線)을 따라서 있는데, 동서가 대칭적이며, 질서가 분명하다. 외조의 주요건물은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다. 이 세개의 전각은 모두 8미터높이의 거대한 평대(平臺)위에 세워져 있다. 총면적은 85000평방미터이고, 그중 태화전이 가장 높고 휘황하다. 태화전의 뒤에 있는 중화전은 황제가 중대한 의식에 참여한 후 쉬거나 접견하는 곳이다. 가장 북쪽의 보화전은 황제가 연회를 베풀거나 과거중 전시의 장원을 만나던 곳이다. 내정은 건청, 교태, 곤녕의 삼궁이 있도 동서양측에 동육궁과 서육궁이 있다. 이것은 바로 황제와 그의 후궁들이 머무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삼궁육원(三宮六院)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거주구역의 북쪽에는 자그마하나 아름다운 어화원이 있다. 이곳은 황실인원이 놀던 곳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초의 황제는 모두 건청궁에 거주했고, 황후는 곤녕궁에 거주했다. 교태전은 황후가 활동하던 장소였다. 청나라 후기에는 황제와 황후가 모두 서육궁등으로 옮겨서 거주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양심전(養心殿)이다. 옹정황제때부터 이곳은 황제가 정사를 돌보고 잠자던 곳이 되었다. 자희태후(서태후)도 이 곳에서 수렴청정을 40년간이나 했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고궁의 풀하나 나무하나도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중국문화의 정수를 나타낸다. "자금성"이라는 이름도 중국고대의 천문학과 철학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들은 "천인감응(天人感應)"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궁의 구조는 전설 속의 천궁(天宮)을 본떠서 만들었다. 고대천문학에서는 항성(恒星)을 삼원(三垣)으로 나누었고, 주위를 28수(宿)가 둘러싼 것으로 하였는데, 그중에서 자원(紫垣, 즉 북극성)은 하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고, 모든 성수(星宿)의 중심이었다. 자금성의 "자"는 바로 "자원정중(紫垣正中)"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황궁을 예로부터 금지(禁地), 금궁(禁宮)이라고 불렀으므로, 이를 합하여 "자금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