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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교육

임천일중(臨川一中) : 북대청화 38명합격신화의 배후

by 중은우시 2007. 9. 13.

임천1중(중국은 우리나의 중학교 고등학교를 초중, 고중이라고 하여 모두 중학교로 부름. 중국에서 고등학교는 우리나라의 대학교임)의 대학입시신화의 배후에는 1만여명의 대학입시유학생들이 있고, 거액의 학교선택비용과 한 작은 도시의 생태변화가 있다.

 

금년에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은 강서성(江西省)에서 모두 166명을 선발했다. 그런데, 임천1중은 38명을 합격시켜 강서성 전체의 1/4을 차지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임천1중의 학생수는 5년만에 4100명에서 11000명으로 늘어났다. 강서성내의 다른 도시나 현들에서 온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다른 성에서 유학온 학생들도 있다. 여기에 임천2중까지 합하면 겨우 7만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에 외부에서 유학온 중고등학생과 학부모만 1.7만명에 이른다. 이들 학생들에게 방을 임대해주는 것이 현지주민들의 큰 수익원이 되고 있다. 임대료는 1인당 1달에 650위안가량 하고 있다. 현지 사람들에 의하면 "두 학교가 작은 도시를 먹여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입시신화의 배후에는 "교육산업화"가 있다. 임천에는 교육그룹을 만들어서 일부 교육경비와 교사급여만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 '학교선택비'는 학교의 주요한 수입이다. 학교선택비는 아주 복잡한 공식에 의하여 계산되는데, 외지학생인 경웅는 한꺼번에 3년치 총 24000위안의 학교선택비를 납부하여야 한다. 현지학생인데, 합격점수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에는 모자라는 점수 1점당 100위안씩을 더 납부하여야 한다.

 

38명의 재학생이 북경대학,청화대학에 입학하게 된 배후에는 바로 이 '교육항공모함'이 있다. 교육산업화는 학교로 하여금 더 많은 학생, 더 많은 학비를 벌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대학진학률을 높이는 기반이 되었다.

 

"강서의 작은 도시에서 50명이 북경대학, 청화대학에 입학했다"

"한 중학에서 북경대학 청화대학에 38명이 합격했다"

 

올해 대학입시결과가 발표난 후, 신화를 만드는 것같은 선전문구가 떠돌았다. 강서성 무주시 임천구에 있는 임천일중과 이 학교가 소재한 상돈도진(上頓渡鎭)는 여론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갔다. 전국의 미디어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농촌의 소도시를 주목하게 되었다. 임천1중의 교문에는 큰 폭의 축하표어가 걸려있고, 교문 뒤에는 홍방(紅榜)에는 청화대학, 북경대학에 합격한 학생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고, 일부 다른 명문학교에 합격한 학생의 이름도 쓰여 있다.

 

상돈도진은 임천구의 정치,경제중심이다. 면적은 크지 않고, 마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는데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마을에 시내버스도 없고, 사람들이 바깥나들이할 때는 삼륜인력거를 탄다. 시내버서 2호차는 향후 7킬로미터 떨어진 무주와 연결될 예정이다.

 

일찌기 어느 풍수가가 상돈도의 지형을 분석한 후, 남으로 감강, 숭강, 무하가 있고, 북으로 장강과 파양호에 들어가며, 서북에는 환행산맥이 서북풍을 막아주고 있어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에 감싸있으니 반드시 좋은 기운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천은 인재가 모이는 풍수길지가 된다고 한다.

 

현지 공상국의 한 간부에 의하면 일찌기 풍수가가 이 도시에는 탑 하나를 세워야 흥성할 것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2004년 임천구정부는 400만위안을 모아서, 의황하중간의 작은 섬에 임천문탑(臨川文塔)을 세웠다. 이 탑은 56.8미터의 높이로 임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공교롭게도, 문탑이 완공된 후 3년동안 풍수가의 예언처럼 흥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흥성은 이 마을에 있는 두 곳의 학교에서 유래된다. 임천1중과 임천2중이 바로 그 학교들이다. 이 두 개의 학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연속 몇년동안 대학입시에서 성과를 냈고, 심천시고급중학이나 호북황강중학과 같은 명문학교들에서까지 방문을 왔다. 두 학교 사이에도 차이는 있다. 비록 두 학교 모두 강서성의 우수중점중학이고, 한때는 서로 호각을 보였지만, 2중의 성세는 10분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1중에 비하여 손색이 있다.

 

임천1중이 대학입시에서 성과를 나타낸 것은 2004년부터이다. 이해에 12명의 학생이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에 합격했다. 이 숫자는 이후 2년동안 14명과 24명으로 불어났다. 이 숫자가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증가한 것은 재학생의 수이다. 2002년경에 1중은 4100명에 불과했으나, 5년만에 1중은 눈사람이 구르는 것처럼 늘어났다. 현재 1중에는 11000명이 있다. 임천1중은 학교를 항공모함처럼 운영하고 있다.

 

무주시정부의 최근 몇년전의 계획에 의하면, 1중은 만명을 유치하는 학교로 만들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 현재 면적이 105무에 불과한 옛날 학교부지로는 이미 학교의 팽창하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학교는 입학생수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1중의 교실에는 70명이상의 학생이 공부한다. 어떤 고3반에는 심지어 90여명이 앉기도 한다. 가장 뒷줄에 앉은 학생은 왕왕 뒷벽에 의자가 닿게 되고, 교실안의 통로는 몸을 옆으로 하여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다.

 

금년에 임천1중은 신도시구역에 300무의 새로운 부지를 마련했다. 1중의 교장사무실주임인 서무평은 100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교사가 건설되면, 이 곳을 임천1중의 고중부(우리나라의 고등학교)로 만들겠다고 한다.

 

금년도 대학입시가 발표된 후, 교장판공실 부주임인 요예희의 이름은 '통신원'의 신분으로 여러 미디어에 등장했다. 학교측은 적극적으로 선전하여 미디어에 호응했다. 1중의 학생들도 미디어의 방문을 많이 받아서인지 잘 호응을 해주었다. "CCTV와 호남위성TV도 왔었어요. 선생님들 말을 들으니 미국에서도 우리 학교를 보도했다고 합니다"

 

이같은 영광은 1중의 사람들에게 자신감으로 작용한다. 웹사이트네은 "우리 학교는 강서사대부중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다"고 호언한다. 학생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의 하나는 올해 대학입시전에 몇번 남창(강서성의 성도)과 함께 모의고사를 치렀는데, 올해 졸업생의 성적만을 보냈는데도, 강서사대부중보다 오히려 조금 나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학생의 성적을 다 보냈으면 그들은 아마 놀라자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분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서무평의 소개에 의하면 금년 임천1중에서 시험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3800명이다. 학생들이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강서성의 원래 최고명문학교인 강서사대부중은 올애 25명이 북경대학, 청화대학에 합격하였는데, 입시에 참여한 학생수는 겨우 600명이었다.

 

"어떤 사람은 임천1중이 왜 이렇게 시험성적이 좋으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우리에게 특별한 비결은 없다. 그저 각방면에서 다른 곳보다 좀 더 잘하기 때문이다" 모든 학년은 0반, 중점반, 평행반으로 나누는데, 0반은 청화, 북대를 노리는 최우수학생들이다.

 

임천1중의 교장사무실주임인 서무평은 이처럼 좋은 성적을 낸 것은 "학생들이 힘들게 공부하고, 선생들이 힘들게 가르치고, 학부모들이 힘들게 기르고, 학교관리자들이 힘들게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무평에 의하면 원래 임천1중의 건너편에 몇 개의 PC방이 있었다. 매번 방학이 되면 교무주임은 사람을 데리고 PC방을 둘러싸고 학생을 막았지만, 여전히 몰래 가서 인터넷을 즐기는 학생들이 있었다. 결국 학교측은 임천구정부에 요청했고, 임천구정부는 모든 PC방은 신도시로 옮겨가도록 조치해주었다.

 

교사, 학부모, 학생들은 모두 임천1중의 학생들의 자질이 좋다고 얘기한다. 이것이 임천1중이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한 조건이다. 이에 대하여 서무평의 주장은 1중이 최근 몇년동안 대학입시에서 성과를 내니까 많은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몰려오고, 그들이 다시 좋은 성적을 내니 더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순환구조가 이루어져서 현재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학교 교사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남창에 임천직통차를 개통하고, 무상으로 학부모들이 학교를 참관하게 해주었으며, 학생모집전담인원을 곳곳에 보내어 설득하고, 심지어 학생모집창구를 개설하기도 해서, 주변지구의 학교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이외에 "성적이 좋은 학생을 돈을 주고 데려갔다. 특히 성적이 높은데도 그해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을"

 

임천2중의 한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 작년에 각각 임천에서 전체 2위, 5위를 했던 임천2중 초중부의 장대봉, 장소봉 형제들이 무슨 연유인지 모르게 임천1중의 고중부로 진학하게 되었다"

 

서무평은 이에 대하여 "우리의 현재 영향력을 볼 때 다른 학교에서 학생을 빼내올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일부 성적좋은 학생들이 1중으로 전학오는 경우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학생들은 임천1중의 명성을 보고 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진학률이 버젓이 있는데, 동등한 조건하에서라면 사람들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장대봉, 장소봉 형제의 일에 대하여도 서무평은 형제 둘이 소학교에서 초중에 진학할 때 원래 1중에 합격하였는데, 무슨 연유인지 모르게 2중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은 1중과 약정하여 고등부에서는 1중으로 오기로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원래 우리 학생을 데려온 것뿐이다"

 

임천교육그룹 사무실주임인 등고평은 학교간에 서로 학생을 빼내가는 일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고, 임천1중은 이것으로 인하여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2002년 2003년에 학생모집창구를 둔 일은 인정한다. 파견내보냈던 선생이 현지에서 체포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우수한 학생을 빼오기 위하여 매년 고중입시가 끝나면 임천1중, 임천2중, 무주1중의 세 학교가 모두 100여명의 교사를 보내어 학생을 모집했고, 3학교는 이것을 위하여 250만위안을 썼다. 동시에 3학교는 교사들도 서로 빼내갔다"

 

재수생(復讀生)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금년에 청화,북대에 합격한 38명중에서 18명이 재수생이다. 그래서 3학년이 되면 학생수가 거의 2배로 늘어난다. 올해 시험친 학생 3800명중에서 1800명이 재수생이다.

 

임천1중의 건너편 골목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전(錢)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조카딸인 전가기(錢佳琦)는 작년에 588점의 고득점을 하였는데, 청화북대에 합격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임천1중에 와서 재수를 했다. 바로 0반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재수할 때 학교는 그녀의 잡비, 자료비, 보충수업비, 주거비를 일체 면제해 주었다.

 

담임교사인 증장근에 따르면 전가기의 성적은 아주 좋았고, 매월 시험칠 때마다 10등내에 들었다. 그래서 북대,청화에 합격할 가능성이 컸따. 그러나, 시험때 실수를 하여 영어객관식문제에 답을 잘못 표기해서 객관식에서 겨우 18점밖에 못받았다. 총점수도 618점이었다.이 점수도 낮지는 않지만, 입학점수가 높은 강서에서는 북대,청화에 합격할 수 없는 점수였다. "그녀의 평소 영어점수는 130점이상이었습니다. 이런 차이를 감안하면, 올해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북대, 청화에 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득점 재주생에 대한 우대정책을 취하고는 있지만, 임천1중도 자신의 우수학생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다. 작년 강서성의 이과 수석은 원래 임천1중출신인데, 대학입시전날 그의 고향인 여천현의 한 학교로 돌아와서 대학입시에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당시 그 학생에거 4만위안을 주고, 부모의 직장도 해결해주었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요"

 

대학입시 몇 개월 전에 다른 도시의 학교에서 임천1중으로 와서 학생을 빼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부현장이 직접 나서서 빼내갑니다" 임천1중으로서는 학부모를 설득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대학입시전에 환경을 바꾸면 성적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몇만위안보다는 학생의 장래를 생각하십시오"라고.

 

임천2중의 교장사무실주임인 웅해수에 의하면 현재 임천1중,2중이 이런 실적을 낸 것을 그들도 몰려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전에 두 학교는 '교육산업화'의 바람에 밀려 떠돌고 있었다.

 

2002년, '교육산업화'사조의 영향을 받아 재정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던 임천구정부는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하였다. 그 때 홍콩의 한 기업이 1중, 2중을 살펴보고는 돈을 내서 두 학교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무주시교육국의 전임국장인 유약비는 무주시정부를 설득하여 원래 임천구관할이던 임천1중, 임천2중, 무주1중을 묶어서 임천교육그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무주시정부가 직접 관할하게 하였다. 이것은 결국 무주시정부가 세 학교의 재정부담을 떠안기로 한 것이다.

 

현재도 세 학교의 초중부 교사의 급여는 임천교육집단이 부담하지만, 고중부 교사의 급여는 각 학교가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 학교는 교사를 모집할 때 임천교육집단이나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학교에는 다섯가지 자유가 부여되었다: 학교개설자유, 학생모집자유, 학교인사자유, 경비모집자유, 경비사용자유.

 

임천은 예로부터 재자(才子)들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했다. 왕안석(王安石), 안수(晏殊), 안기도(晏幾道), 증공(曾鞏), 탕현조(湯顯祖)가 이곳 출신이다. 임천은 진사도 많이 배출했다. <<임천현지>>의 통계에 의하면 송나라때부터 청나라때까지 175번의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임천사람이 모두 726명이다. 남송 함순원년의 한 해에만 임천에서 22명이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당시 합격한 총인원수의 7.33%에 해당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