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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초삼걸(漢初三傑)의 서로 다른 최후...

by 중은우시 2006. 10. 9.

작자: 진측의(陳則義)

 

유방이 천하를 얻었을 때, 수하의 문신과 무장은 부지기수였다. 그 중에 소하(蕭何), 장량(張良), 한신(韓信)의 공이 가장 컸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을 이들을 "한초삼걸(漢初三傑)"이라고 부른다. 유방의 평가는 정확하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술자리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왜 자신이 천하를 얻고, 항우는 자신보다 세력이 훨씬 큰데도 천하를 잃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여러 신하들의 대답은 모두 정곡을 찌르지 못하였다. 유방은 웃으면서 말했다. "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다. 장막에 앉아 의사결정을 하고 계책을 세워서 천리밖의 승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나는 자방(子房, 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독거리며, 물자를 조달하여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데 있어서 나는 소하만 못하다. 백만의 군사라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데 있어서 나는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이다. 내가 이들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항우는 범증 하나가 있었으나, 쓸 줄 몰랐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붙잡힌 이유이다."

 

그러나, 유방에 의하여 친히 "인걸"이라고 칭해졌던 세 사람은 모두 공로가 하늘을 덮었지만, 이후 유방이 이들을 대한 방식은 전혀 달랐다. 삼걸중에서 유방은 한신에 대하여는 어떡하든 전혀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소하에 대하여도 약간은 의심을 하였다. 그러나 장량에 대하여는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한신은 손에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제나라를 공격한 후에 스스로 제왕에 봉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제왕가의 금기를 범했었으므로 유방이 그에 대하여 약간의 의심을 가진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소하는 유방과 같은 고향사람이고, 관중에 자기의 세력이 있었으며, 민심을 깊이 얻고 있었으므로 유방이 그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장량은 유방의 신변에 있었고, 명리에 담백하였으므로 유방이 그에 대하여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장량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었으므로 소하처럼 뿌리가 깊지 못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이후 유방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삼걸을 처리한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장량은 대대로 한(韓)나라의 귀족이었다. 장량도 백여명의 집단을 조직하여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했다. 유현에서 유방을 만나서 얘기를 하면서 유방은 장량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이로써 "약법삼장"을 만들어 진나라를 멸망시키게 된다. 홍문연에서는 위험하기는 하였지만 죽지는 않았고, 한왕에 봉해진다. 잔도를 불로 태움으로써 항우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게 하였고, 나중에 한신이 "명수잔도, 암도진창"을 실행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나중에 장량은 팽성에서부터 다시 유방에 귀의하고 천하를 평정한다. 유방이 공신들에게 상을 내릴 때, 장량에 대한 상은 "제나라 3만호를 선택"하도록 하였으나, 장량은 사절한다. 그저 "유(留)"라는 지방만을 달라고 한다. 공을 세운 장량은 이 때 이미 은거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수도를 정하는 문제에 대하여 몇가지 의견을 낸 것이외에, 나중에 태자를 보호하는데 있어서 역할을 한 것이외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 유방의 삼걸중에서 장자방은 황노지학(黃老之學. 황제와 노자의 학문)에 가장 정통했다. 공을 이루고 물러나는 도리를 잘 알았다. 그래서 유방은 일생동안 장량을 존중하였다.

 

소하는 유방과 같은 고향이고, 유방이 반란을 일으킨지 얼마되지 않아 조참과 함께 유방을 따랐다. 유방에 대하여는 죽을 때까지 일심으로 충성하였다. 소하의 혜안은 아무도 따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시정무뢰배인 유방을 알아보았고, 평생을 쫓아다닌다. 다음으로는 한신을 잘 봐서 강력하게 추천한다. 소하의 공이 높고 직위가 혁혁했으므로 당연히 사람들을 각박하게 대했던 유방의 의심을 샀다. 일찌기 세번 의심하여 소하를 시험한다. 한나라 삼년에 유방이 경현, 색정의 사이에서 항우와 대치할 때 유방은 한편으로 전선에서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후방의 국면을 우려했다.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어 소하를 위로했다. 어떤 사람이 소하에게 말하기를 "지금 폐하가 전장터에서 싸우고 풍찬노숙을 하므로 스스로를 돌볼 시간도 없는데, 여러차례 사람을 파견해서 각하를 위문하는 것은 각하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각하를 위하여 아이디어를 드릴테니, 각하의 가족중에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전선으로 내보낸다면, 대왕이 각하를 더욱 신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하는 그 계책에 따랐고, 유방은 과연 크게 기뻐하였다. 한나라 11년에, 한나라 장군 진희가 모반하였고, 유방이 친히 평정에 나섰다. 그 사이에 소하는 여후를 도와 한신을 죽인다. 유방은 한신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소하를 상국으로 삼았고, 식읍5천호를 추가로 주었으며, 병사 500명, 도위 1명을 주어 상국의 호위부대로 삼게 하였다. 모든 문무대신들이 소하에게 와서 축하를 하였다. 그러나 소평만이 앞으로 나와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소하에게 말하기를 "아마도 화는 여기서 비롯될 것입니다. 황상이 바깥에서 전쟁을 벌이고, 각하는 조정에 남아 지키고 있어, 각하에게는 위험이 닥칠 일이 없는데도, 아무 이유없이 각하에게 상을 내리고, 호위부대를 증설하였는데, 이것은 회음후 한신이 막 조정에서 모반했으므로 각하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위부대를 늘여서 각하를 보호하는 것은 사실 은총이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상을 사절하시는 것이 좋겠고, 모든 집안 재산을 내놓아 군대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황상이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하는 그가 말하는대로 하였다. 유방은 과연 매우 기뻐하였다. 한12년 회남왕 경포가 모반하였다. 유방은 다시 친히 정벌에 나섰다. 바깥에서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어 경성에서 소하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보고하기를 "소상국은 경성에서 백성을 다독거리고, 재산을 꺼내어 군수물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진희의 반란을 진압할 때와 같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소하에게 말하기를 "각하에게 멸족의 화가 미칠 것이 멀지 않은 것같습니다. 각하의 공이 너무 높아서 더 이상 상을 내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초 나라를 세울 때 각하는 깊이 백성의 민심을 얻고 있었고, 10여년동안 백성들이 모두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먹으면 백성들의 추대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이것은 전혀 좋은 일이 아닙니다. 황상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각하의 행위를 알아보는 것은 바로 각하가 관중을 지배하여 한왕실을 동요시킬까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라리 각하께서 백성의 논밭과 집을 빼앗고, 고리대를 놓거나 하여 명성을 조금 더럽힐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명성을 더럽혀야 황상이 마음을 놓으실 것입니다" 소하는 그의 계책에 따랐고, 유방은 매우 기뻐했다.

 

유방이 세번 소하를 의심하였는데, 소하는 반군여반호(황제의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는 도리를 잘 알았고, 잘나간다고 하여 머리가 어지럽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하는 세번이나 전혀 놀람이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히 물흘러가는 것처럼 유방의 의심을 없앴으며, 화를 불러오지 않았던 것이다.

 

유방이 한신에 대하여 한 것은 "토사구팽, 조진궁장(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먹고, 새가 없어지면 활은 집어넣는다)"는 제왕철칙에 딱 맞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방이 일부러 트집을 잡은 측면이 있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한신이 정치적인 대국관이 없으며, 지위가 명확하지 않았던데에서도 기인한다. 그는 유방의 부하였으나, 그러나 공을 내세워 제왕에 봉함을 받는 중대한 원칙상의 잘못을 저지른다. 만일 유방의 신하로 남아있지 않으려고 했으면, 손에 병사를 가지고 있을 때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약해서 결국은 유방을 배반하지는 못하였고, 결국 자신의 이용가치가 사라진 후에 유방에게 수습당하게 된다. 직접적인 원인은 매우 많았다. 첫째는 제왕들은 병권을 장악한 장수에 대하여는 항상 꺼려하는 점이 있다. 그리고, 한신은 병사를 잘다루는 군사사령관이었으므로 어떤 제왕이라고 그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둘째는 한신은 중간에 유방에 귀순하였다. 번쾌, 주발, 조참등과 같은 유방의 직계부하가 아니었다. 원래 유방은 그를 믿지 않았었다. 셋째 그가 제나라 노나라 땅을 얻은 후에 유방에게 직위를 요청했고, 공을 내세워 스스로를 제왕에 봉해달라고 하였다. 이것은 제왕의 큰 금기를 범한 것이다. 넷째는 비록 군사적으로는 천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백치였다. 장량처럼 명리에 담백하고. 은일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소하처럼 노련하고 깊이가 있으며, 각종의 복잡한 국면을 잘 처리하는 정치적인 수완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된다. 다섯째, 자질구레한 몇가지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유방에게 빌미를 주게 된다. 처음에는 종리매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종리매를 죽인 것이라든지, 여러 곳에서 원망을 늘어놓는다든지, 진희와 암중으로 소식을 주고 ㅂ다는다는 것등은 직접적으로 그의 멸망을 촉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