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신중국건국초기에 모택동은 주로 무력방식으로 대만을 해방하고자 하였다. 일찌기 1949년 5월,모택동은 화동야전군(華東野戰軍) 부사령관 속유(粟裕)에게 명령을 내려 삼야(三野)부대를 조직하여 대만공격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당시 상해전투가 막 끝났고, 화동의 많은 지역이 아직 해방되지 않았으며,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도 병력을 나누어 잔여부대 소탕작전을 펼쳐야 했으므로, 겨우 야전군의 주력인 제9병단의 4개군부대로 하여금 대만공격훈련을 하게 하면서, 상해지역의 경비부대도 겸임하게 했다.
금문도상륙이 실패로 끝난 후, 화동야전군의 수장은 도해작전의 어려움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졌고, 대만전투계획도 계속 수정되었다. 1949년 가을에 제정한 대만전투계획은 8개군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고, 그 중에는 제9병단의 4개군(제20, 제23, 제26, 제27군)을 제1선부대로 하는 것이었다. 1949년말, 화동야전군의 수장은 연구끝에 투입병력을 증가하기로 결정한다. 삼야부대는 소탕작전을 담당하고 지방경비를 담당하는 외에, 주력인 12개군을 전부 대만공격에 참전시키기로 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즉시 이 의견에 동의한다.
당시, 미국이 공개적으로 대만국민당당국과 거리를 두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일반적으로 대만공격시 미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속유 부사령관은 <<화동군구1950년정치공작지시>>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직접참전은 정책적으로, 군사적으로 모두 미제에 불리하다. 일찌기 일본이 장개석군대를 도와서 작전할 가능성을 생각했었으나. 이러한 '지원병'은 소멸시킬 자신이 있었다. 당시의 국제국내정세에 비추어, 중앙군사위원회는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대만전투준비를 완성해야 하고, 하루빨리 전중국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성하여, 조국통일을 실현해야 한다"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연해도서지방의 국민당주력을 섬멸시키기 위하여, 인민해방군은 주산(舟山), 해남도(海南島), 금문도에 공격을 가할 때, 모두 병력을 집중하여 상륙지점을 확보한 후 섬멸전을 벌이도록 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의 동의를 받아, 제4야전군은 해남도를 공격하는 동시에 화동야전군은 제7, 제9병단의 합계 6개군(제20, 제21, 제22, 제23, 제26, 제27군)의 20만병력으로 주산전투를 개시한다. 그리고 제24, 제25, 제32군을 복건성에 투입하여, 제10병단(제28, 제29, 제31군)을 대체하여 소탕작전 및 도로, 공항수리등 임무를 맡겼다. 이 병단을 빼내서 금문도를 공격하였다. 화동야전군은 또한 주산, 금문에 대한 공격을 대만공격에 대한 실전연습으로 삼았다.
더욱 자세하게 대만전투의 구체적인 사항을 마련하기 위하여, 1950년 3월 11일 신임 해군사령관인 초경광(肖勁光)은 속유와 대만공격의 준비업무를 협의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화동야전사령군의 지휘관과 해군의 의견에 동의하고, 50만부대를 투입하여 바다를 건너 대만을 공격하며, 2차로 나누어 수송하기로 한다. 당시 이 계획을 만든 것은 동남연해지구에서 쌍방의 군사역량을 비교분석한 후에 내린 개산이었다.
국민당육해공군은 모두 50여만명이었다. 그중 주산, 금문과 해남도의 부대는 언제든지 대만으로 철수하여 역량을 집중하여 방어할 수 있었다. 여기에 소량의 일본 "지원"인원의 도움이 있을 수 있었다. 해방군은 배수의 상륙작전을 벌여야 한다. 일반적인 상륙작전규칙에 의하면, 제1차 상륙부대는 아마도 방어선을 돌파한 후 종심으로 전진하기에 충분한 인원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금기는 기름붓는 식의 축차증원이다. 그래서 제1차부대에는 충분한 병력이 있어야 하고, 이어서 제2차부대가 상륙해야 한다. 총병력을 최소한 대만수비군대와 대체로 비슷해야 한다. 당시 인민해방군의 각부대의 전투력은 분명히 동등수량의 국민당부대보다 높았으므로, 50만의 상륙부대는 단기간내에 승리를 거두고 전 대만섬을 점령하기에 충분했다.
모택동의 조기대만해방전략에 따라, 도해작전시의 전략적인 우세를 차지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대만해방을 위한 각종 준비작업에서 특별히 공군과 해군을 건립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1949년 7월 10일, 모택동은 주은래에 서신을 보내어, 도해작전에 공군을 건설하자고 얘기했다. 그는 "우리는 반드시 대만진공의 조건을 준비해야 한다. 육군외에 주로 공군에 의지해야 한다. 양자중 하나가 있으면 성공할 수 있지만, 양자를 모두 갖추면 성공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우리 공군이 적의 공군을 압도하려면 단기간내(예 1년)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3,4백명을 멀리 보내서 6내지 8개월을 훈련시키고, 비행기 100여대를 구매하고, 현재 가진 비행기와 합쳐서 공격부대를 만든다면..."
1949년 7월 중순, 유소기를 우두머리로 한 중공중앙대표단이 소련을 비밀방문한다. 7월 26일, 유소기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중국의 공군건립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고, 중국이 1950년에 대만을 진공할 계획임을 설명한다. 그리고 소련에 200대가량의 비행기를 보내주고 조종사를 훈련시켜달라고 한다. 스탈린은 아주 시원스럽게 응락한다. 그러나 소련에 작전시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스탈린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하면 반드시 미국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고 했다. 이후, 중소는 담판을 통해서, 스탈린으로부터 중국이 적당한 시기에 대만을 해방시키는데 필요한 준비를 하기로 합의한다. 이렇게 하여 소련의 대만해방에 대한 지원을 확인하였고, 중공중앙은 대만해방준비업무를 1950년의 군사업무의 첫번째 임무로 정했고, 신속히 전개했다.
화동군구는 이미 대만해방을 업무의 첫번째로 정했다. 1950년 5월 17일, 중국인민해방군 제3야전군은 3개병단, 12개군 합계 50만의 병력으로 대만작전에 투입할 준비를 한다. 속유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전선총지휘부가 구성되었다. 공군건설측면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소련으로부터 작전기를 구매하고, 조종사를 훈련시켰다. 6개월의 기간내에 2개의 전투기단과 1개의 폭격기단의 전부 공중지상인원을 확보한다. 1950년 5월, 공군첫번째 작전부대인 제4혼성여단이 성립된다. 1950년 4월 23일, 화동군구해군은 서명식을 거행하여, 133척의 함정을 가진 함대를 구성한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은 무장으로 대만해협에 침입하였다. 6.25참전의 필요에 따라, 인민해방군의 전략중점은 동남에서 동북으로 옮겨졌고, 대만무력해방계획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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