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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132소조" : 중남해 전용담배 생산경위

by 중은우시 2007. 5. 7.

작자: 곽원단(郭媛丹)

 

사천 십방(什)은 200여년간 담배를 심어온 담배의 고장이다. 모주석의 시가담배로 이곳의 특공연(特供煙) 생산조(生産組)에서 제조한 것이다.

 

1950년대말부터 시작하여, 십방연창(什煙廠)은 하룡(賀龍) 원수를 위하여 시가담배를 만들었다. 올해 82세인 범국영노인은 당시 기술이 좋아서 하룡을 위하여 담배를 만들도록 뽑혔었다.

 

"1964년 가을, 하루는 공장의 서기가 우리 몇 사람에게 통지해서 내일 하루를 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창고에서 가장 좋은 담배잎을 가지고, 세면도구를 지참하고, 침구는 가져갈 필요없이 청두(成都)로 가서 정치임무를 완성하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4명이 뽑혔는데, 모두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문제없는 오래된 노동자들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뭐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청두의 나과항(羅鍋巷) 연마국(煙麻局)에 가서야 하룡원수를 위하여 담배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청두에 머무는 4개월동안 매일 8시간씩 일을 했고, 매일 한 사람당 100-200개비의 시가를 만들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위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모주석이 피우는 것은 종이담배였는데, 그 후에 어떤 사람이 시가를 피워보라고 권했다. 모주석은 시가를 맛본 후에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청두에서 공장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모주석을 위한 시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임무를 받은 십방연창은 모두 35가지 배합을 했고, 샘플제조에 성공한 후 북경으로 보냈다. 그중, 1, 2, 13, 33호가 제품으로 선정되었다. 모주석이 선택한 것은 2호시가였다.

 

"하룡원수는 33호시가를 피웠습니다. 맛이 아주 진한 것입니다. 모주석은 담담한 맛을 좋아했습니다. 식지만큼 굵은 중호의 시가를 좋아했습니다. 시가담배의 제작기술은 특별히 엄격합니다. 먼저 좋은 담배잎을 고르고, 먼저 거친가공을 하고, 담배잎의 줄기를 없애야 합니다. 습기를 높이기 위해서 월남계피, 국주로 끓이고, 그 후에 특급화차에 띄웁니다. 이 단계의 구체적인 방식은 담배맛에 따라 다르게 합니다. 그후에 햇볕에 말리고, 말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건조기에서 건조시킵니다. 10개비를 1개로 포장합니다. 전문인력을 통해서 위로 보냅니다"

 

"시가는 맛이 좋아야 할 뿐아니라, 담배재에 대한 요구조건도 까다롭습니다. 대체로 3가지가 있는데, 마회색, 흑회색, 백색입니다. 좋은 시가담배의 담배재는 눈처럼 하얀 색이어야 할 뿐아니라, 땅바닥에 떨어져서도 완벽한 담배의 형상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중앙지도자를 위하여 만드는 담배이므로 안전이 매우 중요했다. 범국영 노인에 따르면, "당시 내가 담배를 만들던 작은 집은 안전조치가 아주 대단했습니다. 주위에는 철조망를 치고, 집에 들어가면 특별히 만든 담배를 열쇠가 달린 큰 쇠상자 안에 넣어둡니다. 쇠상자안에는 또 하나의 열쇠가 달린 작은 상자가 있습니다. 매년 명절을 쇠기 위해 휴가를 갈 때에는 문과창문까지 모두 봉조(封條)를 붙여서 봉합니다"

 

"한번은 휴가에서 돌아와서, 문에 있던 봉조를 뜯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전등줄을 당기는데, 손으로 문입구벽을 더듬어도 전등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위에 보고한 후에 현공안국에서 왔습니다. 청두군구에서는 즉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봉조와 문열쇠는 괜찮은데, 등의 줄은 안보이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지붕위까지 올라가서 검사를 했는데, 기왓장을 들어냈을 때에야 발견했습니다. 등줄을 쥐들이 가지고 가서 깔고 앉았던 것입니다"

 

1971년, 범국영과 황병복(黃炳福), 강약영(姜躍榮)은 함께 십방에서 북경으로 옮겨와서 담배를 만들게 된다. 일부 지도자들에게 공급하는 것은 13호시가이고, 모주석에게 공급하는 것은 2호시가이므로, 북경으로 옮겨온 이후에 시가생산조는 "132소조"라고 불리게 됩니다. 소조는 남장가(南長街) 80호에 위치해 있었으며, 담장에는 전기망을 설치했고, 입구에는 초병이 근부를 섰으며, 건너편이 바로 문패번호가 81호인 중남해입니다.

 

"안에는 13명의 보통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범국영은 손가락으로 헤아리면서 설명했다. "우리 세 사람을 제외하고, 보안(保安)이 1명, 요리사가 1명, 운전기사가 1명, 보일러공 2명, 서기 1명, 바깥에서 데려온 견습공 4명이 있었습니다."

 

"132"의 업무는 중앙판공청이 직접 지휘했고, 생산원료는 여전히 십방연창에서 제공했다. 매월 15-20개비의 시가를 생산했다. 1976년이후, "132소조"에서 더 이상 특공연을 제조하지 않게 되어, 범국영등 3명은 북경연창의 직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