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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 말기 "북양계(北洋係)"의 출현배경

by 중은우시 2007. 7. 13.

북양함대의 함선 

 

 

청나라정부는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립했는데, 이는 중국이 유럽의 국제관계체제를 받아들여 대외교섭사무를 처리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중국에서 채택한 대외정책인 "조공체제(朝貢體制)"에서 일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전문적인 외교기구이지만 권한이 완전히 통일되어있지는 않았다. 많은 외교권력이 여전히 봉강대리(封疆大吏)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소위 "북양계"도 여기서 이름이 나온다.

 

"북양(北洋)"이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북양수사(北洋水師), 북양정부(北洋政府),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떠올릴 것이며, 심지어 중국의 첫번째 대학인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등 일련의 청말민초의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된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이를 보더라도 "북양"이 중국근대정치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청나라의 멸망도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북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의 풍자일 것이고, 곰곰히 생각해보게 하는 측면이 있다.

 

청나라정부는 대외교섭을 "지방"으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 연유는 중국의 전통관념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스스로를 천하의 중앙에 있다고 생각했고, 문화가 가잘 발달한 화하지방(華夏之邦)이라고 생각했다. 사방은 모두 문화, 제도가 중국만 못한 "남만, 북적, 동이, 서융"이라고 생각하며, 중국이 천하의 주인이며, 주변 각국은 중국의 번속국(藩屬國)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종주국"과 "번속국"의 관계에서 중국황제는 "천자"이고, "덕화만이(德化蠻夷, 오랑캐를 개화시킴)", "함양사방(涵養四方, 사방의 국가를 먹여살릴)"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번속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하고, 번속국이 새로 왕을 세울 때에는 반드시 중국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한다. 아편전쟁전에는 중국에 서방적인 의미의 외교라는 관념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대외업무를 전담하는 부서도 없었다. 전통개념으로는, 대외적인 교류는 바로 "종주국"의 "번속국"에 대한 관리이며, 그리하여 대외적인 교류를 담당하는 기관의 이름도 "이번원(理藩院)"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당시에는 "이번(理藩, 번속국을 다스림)"이 있었지, "외교"는 없었던 것이다.

 

아편전쟁이후, 청정부는 부득이 영국, 프랑스등과 협상해야 했다. 비록 중국은 패전했지만, 청정부는 여전히 "천조상국(天朝上國)"의 관념과 체면을 중시했다. 여전히 이때의 서방열강을 전통적인 "적이(狄夷, 오랑캐)"로 취급했으므로 근본적으로 "외교"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매번 외교교섭이 필요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 그때 조정에서 임의로 사람을 뽑아서 처리하게 했고, 전문적인 기구나 인원을 둔 것이 아니었다. 중국과 영국이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체결한 후, 중국은 어쩔 수 없이 5개의 항구를 개방하여 통상하게 허용하고, 중국과 외국의 교류가 증가했다. "5개항구"는 외국인이 각종 활동에 종사하는 합법적인 장소가 되었고, 중외교섭의 합법적인 장소가 되었다. 청정부는 1844년 오구통상대신(五口通商大臣)을 두어, 이 지방의 중외교섭사무를 처리하게 했다.

 

전통적인 제도에 조그마한 틈이 생긴 것이다. 이 "5개항구"는 모두 남방에 있었고, 광저우는 역대이래로 대외교류가 활발한 곳이었으므로, 오구통상대신은 처음에는 양광총독(兩廣總督)이 겸임했다. 그러나, 상해의 항구가 개방되면서, 외국인들의 활동중심이 북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1859년부터 강소순무(江蘇巡撫) 혹은 양강총독(兩江總督)이 겸임하게 된다. 이홍장이 강소순무를 맡았을 때 오구통상대신을 겸임했다. 오구통상대신을 둔 목적은 사실 대외교섭을 단지 '지방'에 국한시키겠다는 의미였고, 외국인을 북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국의 전통체제에 맞았다. 청정부의 관념속에는 중국이 여전히 "천조상국"이고, "오랑캐국가"는 그저 중국의 지방정부와 교류할 수 있을 뿐이었고, 중국의 중앙정부와는 교류를 할 수도 할 자격도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대문을 더욱 활짝 열게 하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는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도 중국은 참패하고, 불평등조약인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끝이 난다. 영국프랑스등은 공사를 북경에 주둔시킬 권리를 획득한다. 청나라정부에 있어서, 이것은 체제상의 일대 변혁이었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공친왕 혁흔등은 1861년초에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해서 대외교섭사무를 책임지도록 할 것을 주청했다. 조정은 "북경에 총리각국통상사무아문"을 두는 것에 동의했다. 혁흔등이 요청한 것에서 "통상"이라는 두 글자를 추가시켰는데, 혁흔은 다시 한번 주청을 하면서 "통상"이라는 두 글자를 빼버리도록 하고, "총리각국사무아문"으로 하였다.

 

이외에 열강의 압력하에 다시 여러개의 연해, 연강의 항구를 개방했다. 장강이남에는 원래의 5개에서 13개로 증가했고, 장강이북에도 새로 우장(牛莊), 천진, 등주(登州)의 3곳을 개방했다. 그러자, 청나라정부는 원래의 '오구통상대신'을 "판리강절민월내강각구통상사무대신'으로 변경한다. 나중에 "남양통상대신(南洋通商大臣)" 또는 "남양대신(南洋大臣)"으로 통칭하게 된다. 한편 천진에는 "판리우장천진등주삼구통상사무대신"을 두게 되는데, 나중에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 또는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통칭된다. 남북양대신은 모두 "통상"때문에 설치한 것이다. 조정의 원래 의도대로라면, 총리아문에도 앞에 "통상"을 붙였는데, 이때는 대서방외교업무를 통상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 혹은 서양오랑캐와는 통상을 할 뿐 외교(정치적 관계를 맺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예총독이 청정부의 외교체제에서 지위를 확립하다.

 

남양통상대신은 설립초에는 강소순무 또는 양강총독이 겸임하였다. 강소순무나 양강총독은 청나라정부의 대외교류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북양대신은 설치초기에는 전문적으로 서양사무와 해안방어를 맡았다. 직예총독이 북양통상대신을 겸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체제상으로 말하면, 이 시기의 직예총독은 외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북경과 지척의 거리에 있었고, 청나라정부는 가능한 한 외교사무를 중앙이 아닌 지방에 귀속시키려 하였으므로, 북양통신대신은 천진에 설립된 초기부터 국가의 외교사무에 간여하게 된다. 예를 들어, 1861년에서 1869년의 9년동안, 청정부가 일부 국가와 10여개의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중에 북양대신인 숭후(崇厚)가 9건의 조약협상을 책임졌고, 서명장소는 모두 천진이었지,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 아니었다. 어떤 국가는 원래 대표를 북경으로 파견보냈는데, 청정부는 다시 천진으로 가게 해서 체결하도록 고집했다.

 

각국의 외교인원은 그저 중국의 "지방"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주로 "지방관리"와 교섭했는데, 이것은 국제관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으며, 각국의 강렬한 불만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계속 북경에 들어오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전통관념에 얽매여 계속하여 각국과의 교섭은 그저 국문(國門)인 천진에서 진행하고 북경에서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만일 북경에 들어와서 교섭하고 싶으면, 반드시 먼저 천진에서 기다린 후,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고하여, 비준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북경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만일 북양대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총리아문에 접촉하면 반드시 거절당하게 된다. 이리하여 북양대신은 국가의 외교사무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북양대신은 전직(專職)이었으므로, 직예총독과는 각자 따로 일했고, 상호 견제했으며, 서로간의 갈등이 있었다. 일찌기 천진교안을 처리하면서, 직예총독인 증국번과 북양대신인 숭후간의 갈등을 뼈저리게 느꼈던 공부상서 겸 총리아문대신인 모창희(毛昶熙)는 1870년 10월 상소를 올려 "총독, 순무에서 독립하여 전문적으로 대외교섭을 처리하는 통상대신을 두게 되니 서로간에 협조가 힘드니, 삼구통상대신(북양대신)을 별도로 따로 둘 필요없이, 모든 대외업무와 해상방어업무를 직예총독이 책임지고 처리하게 하여 남양대신과 마찬가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11월 12일, 청정부는 명을 내려, 전직인 북양대신의 직위를 취소하고, 남양대신의 예에 따라 북양대신도 직예총독이 겸임하기로 결정한다. 이 변화는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이 따로 업무처리하던 병폐를 해소시키게 되고, 직예총독의 권한은 대폭 강화하게 된다. 그의 업무는 "성의 방위"업무에서 "해상 방위"업무, "대서양업무"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로써 직예총독은 청정부내의 외교체제에서의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직예총독부는 보정(保定)에 있고, 북양대신 아서(衙署, 관청)은 천진에 있어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양대신아서를 직예총독행관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후부터 직예총독은 천진과 보정을 왔다갔다하며 일을 보게 된다. 다만, "천진에 상주하고" "만일 천진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보정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직예총독은 천진에 우선적으로 머물게 하게 된다. 이는 직예총독의 "해상방어"업무가 "성방어"업무보다 중요하게 처리하는데 대한 하나의 보장이 되었다.

 

북양대신을 맡은 이홍장은 국가외교사무의 주재자가 되다.

 

이러한 변화가 있기 조금 전에 이홍장이 직예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리하여 그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을 맡은 첫번째 사람이 된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이 된 후 얼마되지 않아, 국가외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체제상으로 말하자면 총리아문의 설립후 남북양대신은 그저 지방에서 외교를 대표하는 지위이고, 총리아문의 통할을 받고, 총리아문의 명을 받아 대외적으로 중대한 교섭을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남북양대신 특히 북양대신은 자주 총리아문을 대체하여 국가외교의 총대표가 되었다.

 

이홍장의 노력과 운영하에, 북양대신의 활동범위는 신속히 확대된다. 총리아문은 매건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북양대신에 통보하고, 그의 의견과 건의를 듣게 된다. 많은 외국주재외교관들도 자주 그에게 보고하고, 그의 지시를 듣게 된다. 이홍장은 엄연히 국가외교사무를 주재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가 천진에 머무는 관아는 점점 청정부의 실질적인 외교부공관으로 되어 버리고, 외국인들도 그와 점점 더 많이 교류하게 되어, 이는 다시 그의 지위를 높여주는 작용을 했다. 한 영국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그가 사실상 중국의 외교대신이라는 것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현재와 같이 구성되고, 현재와 같이 운영되는 총리아문은 그저 이홍장 대학사의 천진에 있는 공관의 한 소속기관에 불과하다"

 

원래 총리아문에 소속된 북양대신이 오히려 총리아문을 넘어서게 된 것에는 이홍장의 개인적 원인도 있지만, 체제적 원인이 더욱 크다. 대외교섭을 책임진 납묵양대신은 원래 병권(兵權)이 없다. 그러나, 총독, 순무가 겸직하게 되면서 병권도 가지고, 지방행정권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연히 국방과 외교에서 중요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북양대신의 중량감으로 보면, 남양대신이 20년이나 먼저 설치되었고, 초기에는 남방이 북방보다 대외교섭사무가 많았기 때문에 "남양대신이 북양대신보다 훨씬 중요하였지만", 나중에는 외교의 중심이 북으로 옮겨가고, 북양대신은 전국적인 외교에 참여하게 되면서 점차 북양대신이 남양대신보다 훨씬 중요하게 변모해갔다.

 

"북양계"는 마침내 중앙정부가 통제하기 힘든 거대한 정치적 집단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말기에서 민국까지 모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청말 정치국면에서 하나의 특색은 지방세력이 천천히 굴기하고, 중앙정부는 점차 권한을 상실해 갔는데, 이것이 바로 청나라멸망의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조성한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청정부가 구미의 비바람에 흔들렸다는 것도 있지만, 천조상국의 개념에 얽매어서 외교라는 중요한 국가정치권한을 지방으로 하여금 행사하게 했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지방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여러해가 지나서, 북양대신의 자리에 앉아 있던 원세개는 청나라를 종결시킨 인물이 되지 않았는가. 이런 결과는 처음에 전통적인 "예제(禮制)"와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외교를 '지방'에 넘겨주었고, 남북양대신을 설치할 때까지도, 청나라정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확실히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