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아편전쟁 이야기 (II)

중은우시 2007. 3. 8. 21:13

4. 임칙서와 Elliot

 

한가지 재미있는 일은 제1차아편전쟁을 지휘했던 영국정부의 전권대표인 Charles Elliot는 본인이 바로 절대적인 아편무역반대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원래 영국령 기아나의 의료선 <<노예수호신>>호의 함장이었다. 전임 영국-중국연락관인 로빈슨도 아편무역의 반대자였다. 그는 영국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어떤 때근 영국정부는 영국선박이 아편불법무역에 종사하는 것을 제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방법은 영국령인도에서 앵속재배와 아편생산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 건의는 인도당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그리하여 그는 면직되었고, 임시로 Elliot가 이 일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Elliot는 취임하자마자 영국정부에 중국에 대한 아편밀수를 금지시키도록 건의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런 무역은 죄악이라고 생각했고, 대영제국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가 런던에 보낸 보고서에서 Elliot는 "아편무역은 천주교의 기치를 든 민족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임칙서는 중국측에서 아편을 금지하는 대표인물이다. 도광황제가 국고의 은이 7000만냥에서 1000만냥도 되지 않게 줄어든 것을 발견하였을 때, 임칙서를 아편금지흠차대신으로 임명한다. 임칙서가 아편을 수거하라고 명을 내릴 때, Elliot는 영국의 승인도 받지 않고, 아무런 협상도 없이 영국상인들에게 모든 재고인 20,283상자의 아편을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영국국왕을 대표하여 영국상인들에게 손실을 배상할 것을 약속한다. 이 조치는 임칙서에게 놀라움과 만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영국의 조야는 분노로 휩싸였다. 중국은 역대이래로 Elliot 개인이 아편을 수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국도 그가 홍콩할양문제를 처리하는데서의 역할을 눈여겨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영국명인대사전>>에도 Elliot가 바로 먼저 홍콩할양요구를 제기하고, 점령을 실시하였다는 점을 언급하지 ㅇ낳고 있다.

 

제1차아편전쟁의 제1단계에서, Elliot는 <<천비조약(穿鼻條約)>>에서 또 다시 런던의 비준을 받지 않았다. 이 조약의 주요한 요구조건은 (1) 홍콩을 영국에 양여할 것. (2) 6백만위안(이것은 중국측 기선에 주장한 숫자임)을 배상할 것, (3) 영국중국관리는 평등하게 대할 것, (4) 1841년구정후10인래로 광주무역을 회복시킬 것. 이 조약은 기선이 그저 홍콩을 할양하는 것에 대하여만 황제의 비준을 받고 나머지는 그대로 집행되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불만이었다. 그들은 더 중요한 것은 영국의 무역봉쇄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중국의 전지역에서 자유무역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841년 8월, Elliot는 면직된다. Henry Pottinger가 승계한다. 빅토리아여왕은 Elliot에 대하여 "명령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고, 임기를 가장 짧게 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는 평을 한다. Elliot는 북아메리카 텍사스의 영국관리로 전보된다.  이것은 임칙서가 신강으로 귀양간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의 도화선인 아편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자체는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본질을 아편이 아니었다. 아편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전제통치의 부패를 폭로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아편은 부식제였고, 이것은 원래 이미 부패했던 체제를 더욱 부패하게 하였다. 마치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천조(天朝, 중국을 가리킴)의 모든 관료계통에 침투하여 종법제도를 파괴하는 사리사욕을 챙기는 행위는 아편상자와 함께 황포에 정박한 영국선박으로부터 몰래 천조로 유입되었다" 임칙서를 대표로 하는 충용지사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였다. 범문란은 임칙서를 세계에 눈을 뜬 첫번째 인물이라고 하였지만, 그의 능력만으로는 되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칙서는 1839년 5월 18일 아편수거를 완료한다. 6월 3일부터 소홰한다. 이때 영국은 거저 20여척의 상선을 겨우 1척의 소형호위함인 HMS Larne호가 호위하고 있었다. 임칙서는 이 아편상인들로 하여금 아편무역을 금지하겠다는 계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Elliot가 상인들에게 중국관청의 요구에 따라 모든 아편을 내놓으라고 하였을 때 아편수거는 완수할 수 있었다. 영국상인인 매디슨, 찰튼등은 영국정부에 Elliot를 고발했다. 이유는 중국관리가 몰래 그들에게 "6,7천상자만 내놓으면 충분하다"고 얘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아편을 소홰할 때, 임칙서는 미국상인인 C. W. King, 미국전도사인 Elijah Bridgman을 모셔와서 보게 한다. King은 임칙서에게 영국은 이미 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증기포함을 보내었으며 이미 오는 중이라고 하였다. 임칙서는 이 정보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소홰하는 것은 아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아편시장을 없앨 수도 없고, 상인들의 폭리에 대한 기대를 없앨 수도 없다는 점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정당한 무역을 하는 상인과 아편밀수상인을 구분해주지도 못했다. 7월 7일, 일단의 영국수군이 배를 저어 구룡의 침사초이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으며, 그 곳 주민의 신감을 훼손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주민 임유희가 상처를 심하게 입어 주게 되었다. 임칙서는 대청률에 따라 수군들에게 한 사람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 Elliot는 사망자의 유족에게 배상하고, 이 일에 관련된 수군을 모두 징벌하겠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청률과 영국법률은 이렇게 서로 충돌했다. 이것은 나중에 치외법권을 요구한 배경이 된다.

 

쌍방의 대치하에, 임칙서는 모든 "해외오랑캐"에게 통고를 내리고, 천조에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8월 15일, 임칙서는 명령을 내려 일체의 무역을 금지시키고, 외국인의 광주에 있는 모든 기업을 폐쇄시킨다. 그리고 병사를 보내어 마카오로 진입한다. Elliot는 홍콩, 마카오의 영국상인 및 그 가족들에게 배에 승선하도록 명령하고 해안을 떠난다. 임칙서는 더 나아가 촌민들이 영국배에 어떤 일용품도 공급하지 말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전함을 보내여 영국배를 봉쇄한다. 일단 해안에 상륙하는 외국인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처결했다. 9월 5일, Elliot는 영국상인 곽사립을 특사로 파견하여,임칙서에게 서신을 보낸다. 거기에서  첫째, 영국선박에 대한 봉쇄를 풀어줄 것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촌민들이 영국선박이 가져가는 물에 오물이나 독물을 푸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임칙서는 거절한다. 오후 2시, Elliot는 최후통첩을 발한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다. 3시, 영국군함은 봉쇄한 중국전선에 대포를 쏘기 시작하고, 포위망을 뚫기 시작한다. <<시대주간>>에서 말하는 아편전쟁의 제1단계이다. 사실 이것은 국부적인 무장충돌이었지, 전쟁이라고 할만한 것까지는 되지 못한다.

 

5. 아편전쟁의 시말

 

충돌이 끝난 후에도, 정상무역이든 아편밀수이든 이 모든 과정에서 하루도 멈춘 적은 없다. 차이는 규모가 축소되었을 뿐이다. 아편소홰의 또 한가지 부산물은 아편가격의 상승이었다. 그러자 위험을 안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쌍방이 수개월을 대치하였지만, 적극적인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임칙서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대치는 영국군함으로 하여금 실력을 계속 증강시키도록 하는 외에 영국에서 아편무역금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며,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이 우세하도록 만들었다.

 

11월 4일, 영국군함과 중국해군은 천비, 관용해면에서 무장충돌이 시작외었다. 13일에 이르러 이러한 충돌은 모두 6차례 발생한다. 쌍방이 모두 손실을 입었다. 9월 5일의 제1차충돌을 포함하여, 임칙서가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에는 "7번싸워 7번승리했다"고 되어 있다. 도광황제는 매우 기뻐했고, 조정의 멍청한 관리들은 모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도광황제는 12월 명을 내려, 광동해안의 모든 대외무역을 금지한다고 명령했다. 임칙서는 1840년초에 명을 받아 정식으로 항구를 봉쇄하고, 중국과 외국간의 일체의 무역거래를 단절시킨다.

 

이런 전면적인 무역금지는 4개월여간 계속되었다. 갈등의 촛점은 이미 아편이 아니었다. 이제는 봉쇄쇄국과 자유무역의 충돌이었다. 부패한 청정부와 함포정책을 시행하는 영국정부는 이제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이견을 해소할 수 없는 지경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임칙서와 Elliot간에는 서신왕래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Elliot는 운송, 무역 및 아편제한의 각종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임유희사건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다. 1840년 5월까지 대치는 계속되었다. 주강입구에 도착한 영국군함은 이미 48척이었고, 대포는 540문이었다. 군대는 25000명에 이르렀다. 영국군은 반대로 주강입구를 봉쇄했다. 5월 9일저녁, 임칙서는 화주(火舟) 10척을 보내어 먼저 공격했고, 영국의 배 11척을 불태웠다. Elliot는 방비가 삼엄하지 않은 광주로 반격했고, 함선 40척을 이끌고 북상하여 하문을 공격하고, 정해를 함락시켰다. 7월 12일에는 대고구에 도착해서 청나라 조정을 위협했다. 도광황제는 영국군함이 북경부근을 위협하자, 급히 대학사겸 직예총독인 기선(琦善)을 천진 대고구로 보내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황제는 "아편소홰조치는 적절하지 못했다. 대황제는 일찌기 들은 바 있는데, 반드시 상세히 조사하여 중죄로 다스리겠다. 이제 흠차대신을 파견하니 억울한 점을 얘기하면 대신 풀어줄 것이다. 그러니 배를 다시 남쪽으로 돌리고 처리결과를 기다리라"

 

기선은 Elliot에게 영국군함이 광주로 돌아가기만 하면, 조정은 반드시 임칙서, 등정정(鄧艇楨)등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군함은 그래서 남하한다. 8월에 도광제는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위임하고, 9월 28일 임칙서와 등정정을 면직한다. 11월 29일, 기선이 광주에 도착한다. Elliot는 전쟁비용 및 몰수상품(아편포함)손실에 대한 배상 및 부두를 다시 열 것, 영국상선에 전용부두를 마련해줄 것, 세칙을 정할 것, 행상제도를 개선할 것 및 치외법권을 인정할 것든 14개항의 요구를 하게 된다. 기선은 600만위안을 배상할 것을 답변하고, 광주외에 다른 한 곳도 개방할 것을 약속한다. 영국측은 복건, 절강, 강소에 따로 2곳을 개방해달라고 한다. 기선은 도광황제에 보고하였는데, 도광제는 대노한다. 그는 원래 임칙서를 면직시키고 무역을 다시 허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지금 영국인들이 중국의 자유무역을 요구하니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1841년 1월 20일, 황제는 긴급명령을 기선에 전달하여 담판을 중단하고, 상, 천, 검의 여러 성의 병력을 광주로 지원가서 전쟁을 준비하라고 한다. 동시에 양강총독인 이리포에게 영국선박이 나타나면 포격하여 섬멸하라고 지시한다.

 

1월 6일, Elliot는 중국측이 영국의 요구를 거절할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기선에게 공문을 보내서 전쟁을 마친 후에 다시 협상하자고 선언한다. 그리고, 영국군함에 홍기를 달도록 한다. 기선은 Elliot에게 서신을 보내서, 영국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응락했던 것들도 무위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7일 영국군함 20척, 1500여명은 사각(沙角), 대각(大角)의 두 포대로 진공한다  청나라군 2천명은 적수가 되지 않았고, 두 곳의 포대는 함락된다. 20일, Elliot는 작전을 중지하고 마카오당국을 통하여 기선에게 <<천비조약>>초안을 보낸다. 그리고 홍콩할양을 요구한다. 기선은 이 조약에 서명은 하지만, 위에 올려 비준을 받아야 효력이 발생한다는 꼬리표를 달아둔다. 도광황제는 이 말을 들은 후 콧방귀를 낀다. 1월 26일, 영국군은 황제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유황호>>를 보내어 홍콩에 상륙한다. 그리고 이제는 홍콩주민은 영국의 신민이라고 포고령을 내린다. 광동순무 이량은 2월 10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사실 도광황제는 이미 1월 27일 대외에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 다시 이 소식을 듣자, 조정에서 "기선은 임의로 홍콩을 넘겨주니 이는 은혜를 망각하고 나라를 잊은 짓이다. 바로 직위를 해제하고 체포하여 데려오며 모든 가산은 몰수하여 궁에 입고시키라"고 지시한다.

 

도광황제의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군사충돌에서 전쟁으로 비화된다. Elliot는 즉시 2월 26일 호문(虎門)을 공격한다. 27일에는 오용(烏湧)으로 진격하고, 3월 3일에는 영국군이 이미 광주성의 아래에 다다른다. 부패한 청나라정부는 공개적으로 선전포고한지 1달여가 지났는데도 전쟁준비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후임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3월 5일, 기선을 교체하는 후임자인 양방이 광주에 도착한다. 18일, Elliot는 미국영사에 부탁하여 조정을 요청한다. 양방이 동의한다. 쌍방은 20일 전쟁을 끝내고 무역을 회복한다. 양방과 광동순무 이량은 상소를 올려 "호문을 이미 빼앗겼으며, 가까운 성의 대황곡등에도 난입했었니다. 성성인 광주는 막을 곳이 없어 지키기 힘듭니다. 계속 관병을 동원하여 비록 8천이 되기는 했으나 해전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영국은 광주는 공격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통상을 하고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영국화물선 9척은 서양쌀을 가득싣고 와 있습니다. 광동동부는 쌀이 부족하니 영국인들이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변통방법을 써서 광주에서 영국상인들의 무역을 허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도광황제는 "만일 무역으로 일이 끝날 것같으면 왜 장수와 병졸을 동원했겠는가. 그리로 왜 기선을 붙잡아 문초하겠는가" 4월 18일 양방과 이량은 모두 직위해제되고 처벌받는다. 며칠 지나지 않아 23일 다시 유임된다.

 

4월 14일 기선의 후임인 정역장군 혁산, 참찬대신 융문이 광주에 온다. 계획을 세워, 5월 10일부터 영국군에 진공을 시작한다. 21일밤에, 영국배 2척을 불태운다. 영국군은 남쪽해안으로 물러난다. 양방과 Elliot간에 이루어졌던 정전과 무역회복은 다시 물건너갔다. 이미 멈추었던 전쟁은 다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22일, 영국군이 반격을 시작한다. 청나라군대의 피해는 참혹하였다. 24일 오전, 광주성의 교외의 각 거점은 모두 영국군이 장악한다. 광주는 완전히 영국군의 화력 아래 놓이게 된다. 삼원리등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가하기는 하였으나, 영국군 몇명을 살상했을 뿐이고 형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27일 <<광주화약(廣州和約)>>을 체결하여, 성을 풀어주는 대가로 6백만위안을 지급하며, 영국상인의 손실 30만위안을 배상하며, 청나라군대는 광주에서 60여리 물러나기로 하고, 영국군도 해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전권대표 Elliot에 대하여 불만이었다. 5월 3일, 임칙서는 광동을 떠나 신강으로 유배간다. 이후 Elliot도 면직된다. Elliot의 뒤를 이은 Pottinger는 영국정부의 요구하에 영국군을 이끌고 북상한다. 다시한번 중국의 대문을 열어제킨다. 하문, 영파, 정해, 진해, 오송, 상해, 보산, 징강등에서 연속으로 청나라군대를 무찌른다. 1842년 8월, 영국군은 남경성아래에 이른다. 29일,청나라정부는 어쩔 수 없이 영국과 중국근대사에서 불평등조약의 시작을 알리는 <<남경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서는 첫째, 중국은 2,100만은원을 배상한다. 둘째, 홍콩을 할양한다. 셋째, 광주, 하문, 복주, 영파, 상해를 통상항구로 개항한다. 넷째, 관세협정을 통하여 영국에서 중국에 수출입하는 해관화물의 세율은 양국이 합의하여 정한다. 다섯째, 중국영국의 상인은 자유무역을 할 수 있고 이를 부인할 수 없다. 이 조약은 <<천비조약>>, <<광주화약>>에 비하여 훨씬 가혹했다.

 

<<남경조약>>은 아직 아편전쟁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다. 1843년 7월의 <<다섯항구통상장정>> 및 10월의 <<호문조약>>은 <<남경조약>>의 보충이고, 영사재판권과 일방적최혜국대우조항이 들어갔다.

 

6. 아편의 뒷이야기

 

우리는 아편전쟁의 원인,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편은 전쟁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편은 영국인들이 중국에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중국에서 커다란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편으로 부패가 초래된 것이 아니라, 부패로 인하여 일찌감치 아편시장이 존재했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아편은 부패를 촉진시켰다. 만일 약간의 위로를 받자면, 청나라정부는 가장 먼저 아편의 해악을 깨달은 정부이고, 가장 먼저 아편을 금지한 정부라는 점이다.

 

그 시대에, 인류의 아편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천양지차였다. 세계각국, 영국본토를 포함하여, 모두 아편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었다. 문제는 중국사회에서만 아편흡입이 성행하였다는 것이고, 거대한 폭리시장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영국상인은 사냥개처럼, 이익을 쫓아 온 것일 뿐이다. 만일 중국관리들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영국아편상인들은 아편밀수의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서방은 그때무터 근 백여년간 "황화설(중국이 전세계의 화가 된다는 설)"이 돌았는데, 이것은 현재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징기스칸의 야만적인 침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편귀"의 재해를 말하는 것이었다.

 

개략 1820년대에, 광동과 복건연안의 중국노동자들은 일정한 규모로 해외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속칭 매자(賣仔)이다. 그들 중 약 95%는 계약노동자였다. 대우는 비인간적이었고, 각종 착취에 시달렸다. 그들은 국내의 '사두(蛇頭, 인력송출두목)에게 돈을 갚아야 했다. 그래서 고뇌를 해소하기 위하여, 아편을 흡입하는 악습도 함께 가지고 갔다. 동남아 일대의 아편흡입은 중국인들이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량의 중국인들이 오면서 이 기호는 확대되었다. 중국인이 95%이상을 점하는 싱가포르는 1/3이상의 남자가 아편을 피웠고, 필리핀에는 190여개의 아편관이 있었는데, 중국인들에게만 서비스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인지역에는 아편이 광범위한 놀이방식이 되었다. 백인이 중국인을 배척하고, 중국인이 백인부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1888년 "아프간"이라는 한 척의 배가 멜버른에 도착했다. 현지주민들은 규찰대를 조직하여 배위의 250명의 중국인들이 하선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유는 아편이 멜버른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대량의 아편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아편은 이미 널리 쓰였다. 중국노동자들이 오면서 이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중국인사회에서는 반드시 중국인이 연 아편굴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노동자들이 수입중 절반을 아편에 쓰도록 만들었다. 1885년, 한 조사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는 26개의 아편굴이 있었다. 매 아편굴에는 동시에 24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편흡입뿐아니라, 도박, 매음, 고리대금업등도 모두 여기서 만연하기 시작했다. 페루에는 아편과 중국노동자들이 함께 수입되었다. 폭리에 눈이 어두운 중국상인들은 금방 중국아편을 미국을 통하여 페루로 운송하는 루트를 개발하였다.

 

아편전쟁의 한 결과는 중국이 단순한 아편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신하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쿠리(苦力, 노동자)들과 함께 수출되었다. 예를 들면, 1888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아편수입은 17,648파운드에 달하였는데, 1890년 4월에는 빅토리아주에서만 유럽계 아편흡입자가 700여명으로 늘어났다. 1875년, <<로스엔젤레스 포스트>>의 통계에 의하면, 전미국에 모두 12만의 아편흡입자가 있었다. 이 신문에서는 특히 이 수치는 중국계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라고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1885년 미국에 수입한 아편은 모두 208,152파운드에 달하였다. 미국의 배화법안은 아편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 참의원 J. P. Newman이 1874년에  한 연설이 대표적이다. "중국인들은 집안시종, 세탁공, 체력노동자, 광산노동자등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그들을 문명화 기독교화하려고 하였다(우리는 그들에게 공부할 학교와 종교의 전당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왔을 때 모두 이미 허약했었고, 아편은 그들로 하여금 온 몸에 힘이 빠지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체력노동자로 필요하고, 우리는 그들을 집안시종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을 시민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미주리주에서 금문에 이르는 광활한 토지에서 겨우 100만의 백인종주민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환영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편흡입자라면 우리는 그들을 환영할 수 없다"

 

아마도 아편의 폐해는 바로 글로벌화의 시작이다. 마약은 전인류가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그것은 절대 한 민족, 한 인종만을 해하는 것이 아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지배권을 빼앗는다. 그곳의 아편은 미국점령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그래서 한 위원회가 1903년 성립되었고, 아편굴을 단속하고, 아편수입을 금지하는 강제조치를 취하였다. 미국은 만일 전세계가 공동으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아편은 금지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1906년 이 위원회의 부룬터주교는 루스벨트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냈고, 미국은 정식으로 전세계에 아편과 기타 마약밀수를 반대하도록 호소하기 시작했다. 1909년 2월, 인류는 처음으로 마약금지의 국제회의를 상해에서 개최했다. 13개국가가 이번 국제아편위원회 회의에 참가했다. 아주 풍자적인 것은, 이 회의는 자희태후의 사망으로 그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는 의미로  1달을 연기하여 개최하였다는 점이다. 자희태후가 바로 아편중독자였는데. 이번 회의는 비록 실질적인 어떤 제약조치를 강구하지는 못했지만, 인류가 국제적으로 마약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논의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국제아편위원회는 각국정부가 자기의 영토에서 조치를 취하여 마약과 기타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는 아편류의 생물의 생산, 판매를 금지하도록 할 것을 희망한다"

 

1924년에 출판한 영국여자각 Allen La Mott의 <<아편민족>>이라는 책에서 그녀는 강력하게 식민국가들의 마약에 대한 태도를 비난한 후, 예언했다. "만일 아편을 동방을 위하여 생산한다면, 아마도 남은 물건은 다시 유럽과 미주로 되돌아올 것이다." 나중에 마약의 역사는 그녀의 예언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것은 이런 철학적이치를 알려준다. 일부 인류를 향한 차별이나 상해는 결국 전 인류에 대한 상해가 된다. 혹은 더 간단한 중국의 말로 얘기하자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결국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害人終害己). 이런 마약의 폐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또한 피해가 적지도 않다. 인류의 영원한 고통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