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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정원함(定遠艦)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7. 8. 3.

정원함

 

일본에서 회수한 정원함의 쇠닻

 

 

청일전쟁때 북양수군의 비장한 운명은 백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중에서 북양수군의 주력함이었던 정원호(定遠號) 철갑함(鐵甲艦)은 더욱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원함은 1880년 독일의 Vulkan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정원"급 철갑함으로는 같은 형의 자매함정인 "진원함(鎭遠艦)"이 있는데, 이들은 중국해군역사상 첫번째 주력함들이며, 당시에는 "아시아제일거함"이라는 칭호 얻었다. <<실락한 휘황 - 정원급 철갑함>>이라는 글에 따르면, 이 함선은 길이 94.5미터, 너비 18미터, 흘수 6미터, 정상배수량 7220톤, 만선배수량 7670톤, 동력은 2개의 복합평와식증기기관이고, 8개의 원식 석탄보일러가 있으며 6200마력이었고, 항속은 14.5노트였다. 항해능력은 4500해리/10노트이며, 조도8천의 등과 2만의 등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3대의 발전기는 70킬로와트의 전력을 제공해주었다. 장갑총량은 1461톤이고, 철갑보의 길이는 43.5미터, 철갑보해수면상장갑두께는 14인치(355.6밀미리터), 해수면하의 장갑두께는 12인치(304.8밀리리터), 주포대의 구경는 304밀미미터, 포의 두께는 15밀미리터, 사령탑의 장갑두께는 205밀리미터, 석탄적재량은 700톤, 최대적재량은 1000톤, 편재는 329명-363명이었다. <<북양해군장정>>의 규정에 따르면 총병(總兵)의 계급을 지닌 사람이 함장이다.

 

정원함 이후의 근 100년동안 중국은 이 정도 급의 주력함을 지니지 못했다. 전체 청일전쟁기간동안, 정원함은 중국해군의 핵심전투함이었다. 대동구해전에서 처음부터 정원함의 신호깃발시스템이 파괴되었는데, 이것이 중국해군패전의 주요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원함의 병사들은 해전에서 군인의 기질을 발휘했고, 제독인 정여창(丁汝昌)은 용감하게 분전했으며 병사들도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나가서 싸웠다. 청나라측 배들이 속속 침몰되는 상황하에서 정원함은 진원함과 함께 일본함선의 포위공격에서 용감히 싸웠다. 200여발의 포탄을 맞고, 상부건축물이 완전히 파괴되고, 여러 곳에서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이 두 척의 큰 배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포위공격중이던 일본함선은 정원함, 진원함의 305밀미미터 포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주력함인 송도함은 포격을 받아 크게 상처를 입었다.

 

격렬한 전투를 거쳐, 불을 끈 정원함(靖遠艦), 내원함(來遠艦)등과 육군의 상륙을 도우던 평원함(平遠艦)이 도우러 오자, 일본군함은 어쩔 수 없이 전장터에서 빠져나갈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 함선을 모두 바다에 침몰시키겠다"는 목표는 이룰 수 없었다. 정원, 진원함이 휴대한 포탄이 모자라지만 않았고, 포탄중 불발탄이 많지만 않았다면(일본군의 여러 기록에는 포탄이 폭발하지 않거나, 포탄에 폭약이 장전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온다), 이번 해전에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나중에 일본군의 군가중 오래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에 "정원함이 아직 침몰되지 않았는가?"라는 것이 있다.

 

이후, 정원함은 다시 북양수군의 최후해전인 위해위보위전에 참전한다. 이번 전투에서, 정원함의 거포는 여전이 일본군을 겁주었다. 정원함의 활동기간동안 일본군은 감히 위해위내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정원함은 여러차례 출격하고, 육군의 저항을 지원하여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중국군함이었다. 1895년 2월 4일, 일본군은 어뢰정으로 위해위를 기습하고, 정원함은 어뢰를 맞고 가라앉는다. 이로써 북양수군의 전투력은 크게 감쇄된다.

 

청일전쟁은 중국의 패배로 끝난다. 2월 8일, 북양수군의 제독 정여창은 자살로 순국하고, 잔존한 위해위의 수비군은 일본에 투항한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정원함의 역사가 여기에서 끝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본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시 태재부(太宰府) 천만궁(天滿宮)에는 "정원관(定遠館)"이라고 부르는 건축물이 남아 있다. 이 곳에는 정원함의 대량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을 뿐아니라, 일본의 저명한 원혼이 떠도는 장소이다. 추산홍엽(秋山紅葉, 일본선박모형학회이사)가 발표한 <<정원관시말기>>에 의하면 북양수군의 병사들의 원혼이 이곳을 계속 떠돌고 있다고 한다.

 

소위 "정원관"은 일본의 전직 향천현지사인 소야륭개가 만들었다. 이 사람의 신분내력은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가 일본대외침략전쟁의 지지자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선박애호가라고도 한다. 어찌되었든간에, 이 은퇴한 고위관리는 1896년 2만원을 주고 일본해군으로부터 전리품인 정원함의 잔해를 구매했다.

 

정원관을 걸어들어가면, 거의 모든 곳에서 정원함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기둥도 정원함의 못구멍이 드러나 있고, 선체강판으로 장식했다. 강재로 만든 벽판, 갑판재료를 가공한 지면, 욕실의 문은 정원함 탄약고의 문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아주 견고하다. 화장실의 변기도 원래 정원함에서 병사들이 쓰던 변기 그대로이다.

 

이 별장이 이렇게 특수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일본의 군인들이 방문하곤 했다. 일본해군대장인 도전번태랑등이 이 곳을 다녀가면서 기념품을 남겼는데, 정원함의 어뢰, 부포, 포탄등이 그것이며, 모두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별장에 소야륭개가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다. 이후 그의 가족들도 이 곳에 정식으로 거주하지는 않았으며, 손님들용으로 사용했다. 나중에 태재부 천만궁(현지의 신사)에 관리를 맡겼다. 그 원인은 소문에 의하면 북양수군의 유령이 자주 이 곳을 떠돌아 다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1895년 2월 9일 위해위전투에서 패배한 후, 정원함의 유보섬은 병사들에게 배를 폭파하도록 지시한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한 것이다. 그 후 그는 자결한다.

 

추산홍엽이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정원관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현지 민간에서 계속 전해져 왔다. 내용은 아주 이상하고 버전도 여러가지이다.

 

현지 신사의 신관은 정원관을 받은 후, 방메 정원관에 가서 물건을 꺼내다가, 중국수군복장을 한 사람과 만났는데, 깜짝 놀라서 꼼짝도 못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좀도둑이 정원관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남방사람들의 발음으로 "누구냐"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좀도둑은 깜짝놀라 현지 관청에 자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잤는데, 깨어난 후에 자기가 별장의 철문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3일간 허리를 펴지 못했는데, 마치 태형을 당한 것같았다고 한다.

 

정원관의 대문은 정원함의 20센티미터 두께의 선체 장갑판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여전히 당시 일본군과 전투한 탄흔이 남아 있다.

 

현지인에 의하면, 정원관에는 술을 마시고 들어가도 안되고, 의관을 정제하지 않아도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원함은 엄숙한 군함이므로 군대규율상 술을 마셔서도 안되고, 복장이 흐트러져도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위반하면 허리와 다리에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다.

 

소야융개가 죽은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 곳에 위패를 세웠다: "비록 적군이었지만, 몸을 숨기지 않고 계속 대포를 쏘아대었으며, 국가에 충성했던 용감한 병사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한다"라고 적었다.

 

2차대전후, 중국은 해군을 파견하여 일본에서 청일전쟁때 일본에서 약탈해간 정원함의 철묘(鐵錨, 쇠닻)등을 회수했다. 정원함 안에 보관하던 어뢰, 화포등은 모두 제2차세계대전때 일본군이 공출해가서 무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 곳까지 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정원함 꼬리대포의 포좌등 장비가 여전히 이 곳에 남아 있다. 국민당정부는 내전에 바빴으므로 다시 사람을 파견하지는 않았었고, 정원관내에 있는 정원함의 물건들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서, 지금 정원관은 이미 일본 모회사의 창고로 바뀌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