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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의화단(義和團)의 구성인물

by 중은우시 2007. 7. 30.

 

 

글: 장명(張鳴)

 

권민(拳民, 拳匪라고도 함. 그리하여 의화단의 난을 권비의 난이라고도 부름)는 바로 의화단의 구성원들이다. 이런 칭호는 의화단사건이 발생하던 당시에도 있었는데, 낮추는 말도 높이는 말도 아니다. 그들의 적수들은 교민(敎民)이라고 불리웠다. 농민반란을 아주 높이 평가하던 시대에도 중학생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의화단은 태평군(太平軍)과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통일된 지도자도 없고, 통일된 조직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통일된 조직이 없던 권민들은 모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황포(黃布)로 머리를 감싸고, 붉은 배가리개, 그리고 행동방식도 아주 일치했다. 모두 같은 곳(拳壇)에 모여서 "양권(亮拳)"을 하고, 신령이 몸에 붙는 의식을 행하고, 칼과 창을 휘둘렀으며, 큰 칼로 맨살을 내놓은 배를 베는 시범도 보였고, 창끝을 인후로 버티는 시범도 보였다. 바로 "도창불입(刀槍不入)"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산동으로부터 직예(지금의 하북성)에 이르기까지, 하남에서 산서에 이르기까지, 북방의 드넓은 대지에는 수천 수만의 의화단이 탄생했다. 모두 비슷했다. 마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동안, 의화단연구는 현학(顯學, 인기학문)이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모두 의화단의 뿌리를 이루는 "아버지"(조직원류)를 찾는데 바빴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다투느라 엉망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의화단의 원류는 산동남부의 반토비(半土匪)적인 성격을 지닌 대도회(大刀會)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역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경력이 있던 민간종교 팔괘교(八卦敎)라고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와 충돌했던 민간 권회(拳會)인 매화권(梅花拳)이라고도 했다. 이 몇 가지 이외에도 학자들은 다른 조직원류를 찾았다. 이런 교(敎), 저런 문(門), 합쳐보면 모두 수십종에 이른다. "아버지"를 제대로 찾을 수 없게 되자, 아들의 비밀도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저서가 한 권 또 한 권 세상에 나오지만 권민이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는 책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여전히 미궁이었다(왜냐하면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사료와 문헌이나 후세의 구술자료들에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화단은 대체로 이런 몇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스승(老師). 사부라고도 한다. 이들은 도와 술법을 전수한다. 의화단의 행위방식은 대부분 이 스승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스승들은 술법을 지니고 있었는데, 모두 아미산(峨嵋山)이니, 곤륜산(崑崙山)이니 하는 곳에서 왔고, 이인(異人)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했다. 김용선생보다 훨씬 일찍 이들은 이런 산들에 기공과 무공의 신비색채를 덧칠해 두었다. 당연히 이런 스승들은 모두 시골사람들이고 원래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세상물을 좀 더 많이 먹었고, 담량이 크고, 일을 잘 벌이는 사람들이어서, 스승이 된 것이다. 마침 가르칠 내용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반은 기공같고 반은 기교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재주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부리는 것이었따. 예를 들면, 칼로 뱃가죽을 내려치는 것이라든지(주의사항: 이 때 절대 그으면 안된다. 그었다가는 난리난다), 창으로 인후를 찌르는 것이라든지(주의사항: 각도를 잘 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들통난다) 등등. 그리고 얼마전에 유행했던 기공같은 것이다. 스승이 귀신들린 것처럼 제자에게 기공을 전해주면 제자는 귀신이 붙은 것처럼 마구 날뛰면는 것이다. 좀 다른 것은 권민들은 창과 봉을 들고, 기공을 받은 후에 왕왕 자신이 무슨 무슨 신선이 몸에 붙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시골의 무슨 무당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충분히 뛰고 나면, 정신이 위축되어 원래의 상태도 되돌아오고, 집에 돌아가서 원래처럼 먹을 걸 먹는 것이다.

 

당연히, 스승이 기공을 전수해주는 것은 나주의 기공대사들처럼 제자들에게 돈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하나의 권단에는 하나의 스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승은 이곳 저곳을 출장다닌다. 의화단은 바로 스승들이 마을과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승들은 비록 전수하는 기공이 오묘하다고 얘기했지만, 최근에 유행했던 기공들과 마찬가지로, 문파가 서로 다르면 각각의 비법도 서로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비슷했다. 그리하여 동서남북의 권민들은 외부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여러해 후에, 화북의 향촌에서 홍창회(紅槍會)가 흥성하기 시작했을 때, 유사한 스승, 유사한 기공전수가 다시 나타났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얼굴에 옛날 수법이다.

 

의화단 권단의 진정한 핵심인물은 대사형(大師兄), 이사형(二師兄)으로 불리웠던 인물이다. 이들은 기공에 대한 학습능력이 뛰어났던지, 아니면 무공의 기본이 튼튼했던지, 혹은 성격이 비교적 포악했던지, 권민들이 행동할 때,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들이 제일 앞장섰다. 그리하여 교당(敎堂)을 불태우고, 교민(敎民)을 죽여버리는 실제 행동은 모두 이런 인물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당연히, 손을 쓸 때는 원래 권단에서 배웠던 기술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상대방이 약하면, 예를 들어 부녀자들, 상대방을 절단내어버리지만, 상대방이 강하고, 끝까지 버티면, 그만두기도 하였다. 권단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권민이었고, 노인과 어린아이가 다 있었다. 어린 자들은 10살 정도였는데, 이들은 의화단의 아동단에 소속되었다. 노인은 7,80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스승의 지도하에, 그리고 대사형, 이사형의 지휘하에 권단에서 권법을 수련하였다.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북을 치고 음악반주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수련은 미국학자인 주석서(周錫瑞)가 보기에 공연적인 성격과 의식적인 성격이 강했다. 확실히 당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권단은 자주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 구경하는 가운데, 극을 보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나중에 기공이 붐을 일으킬 때 대가들이 나타나서 여러명이 함께 기공수련을 하면 구경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과 비슷하다. 고금의 도리는 같은가 보다.

 

당연히, 권민은 자기 동네서 공연하지만은 않았다. 외부로 돌아다니기도 했다(사실, 권민들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겠는가. 그저 자기 동네에서 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당시 산동순무를 하던 원세개는 그들을 북상하도록 핍박했다. 북쪽에 귀자(鬼子, 서양인)가 있다고...). 바깥에 나갈 때에는 죽이기도 하고, 불태우기도 하고, 먹고 마시고 소리치는 것은 모두 이런 보통 권민이었다.

 

이외에 하나의 권단에는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있다. 그들은 권단의 후대(後臺, 배후) 혹은 은주(恩主)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들은 거개가 향신(鄕紳)이거나 부호(富戶)였다. 무거인(武擧人, 무과2차급제자) 또는 무수재(武秀才, 무과1차급제자)가 많았다. 명청 두 시대에는 비록 문, 무에 모두 과거가 있었지만, 군대의 군관은 기본적으로 무과급제자로 구성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군인출신이었다. 무과과거는 그저 사람들이 공명을 얻는 용도로만 쓰였고, 신분을 바꾸는 것으로 활용되었다. 신사(紳士)자격을 얻는 가장 간편한 길이었다(문과 과거에 비하여는 통과하기 아주 쉬웠다). 그리하여, 무과급제자들은 향촌사회에서 저급의 지방귀족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사람들은 한가하고, 일벌이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이 독려하고, 권민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그들도 그 안에 끼어서 권단을 위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는데 가담하게 된 것이다.

 

권민이 들고 일어난 것은 기독교가 금지에서 풀린 이후에, 특히 태평천국의 실패이후, 수십년간 이어내려오던 교민(敎民)간 충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민"은 교도가 아닌 일반 백성이고, "교"는 기독교(천주교, 신교와 동방정교를 포함)교회와 기독교를 믿는 신도들이다. 양자의 충돌은 어떤 경우에는 이익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한 지방에 종교집단이 나타나면 이들은 새로운 중심이 되어 새로운 권위로 등장하고, 이들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원래의 권위자들은 약간 불안감을 느낀다. 최초의 문화충돌은 민간의 오락활동에서 시작된다. 창극과 이와 관련된 사당에 제사지내고, 농가를 부르는 활동은 중국농민의 오락이다. 그런데, 이런 오락은 왕왕 신에게 제사지내고 연극을 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배척한다. 그리하여, 교화는 신도들에게 총리아문에서 얻어낸 '특권'을 들이밀면서 교도들에게 이러한 활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신도들에게 극에서 분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활동은 기우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기우활동을 한 후에 비가 오지 않으면 몰라도, 비가 내리면, 비는 기우제를 지낸 사람들에게만 내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도들도 비의 혜택을 보게 되므로, 일반 백성들은 이들이 불로소득을 얻는 것이라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었다.

 

자주 보게 되는 문화충돌은 교회의 일상적인 의식과 관련이 있었다. 출생부터 입교할 때의 세례, 죽기 전의 종부례, 평일의 미사, 그리고 밀실참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국의 백성들에게 신비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쉽게 오인하기 좋았다. 쌍방간에 약간의 마찰만 생기면, 쉽게 악의적인 도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인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여자아이를 집안에 가둬둘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녀가 섞여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남녀가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야외나 시장과 같은 넓고 탁트인 공간에서였지, 밀폐된 공간에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미사를 드릴 때에는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 함께 했다. 이는 손쉽게 통간, 난교, 군교를 연상하게 하였다. 밀실참회에 대하여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손쉽게 밀실음란을 연상하였다. 그리하여, 1844년 중국프랑스간의 황포조약으로 기독교에 대한 금지가 해제된 후, 중국의 도시와 농촌에서는 무수한 기독교, 교화, 교민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져갔고, 무수한 교회를 해꼬지하는 전단과 글이 퍼져갔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모두 "음란"과 관련있었다. 문화의 차이로 이러한 것들은 확대재생산되어간 것이다.

 

분명히 문을 부수고 들어온 서양인들은 수입한 종교 그 자체가 어떻든지간에,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선천적인 불량아였다. 그리고, 또한 악의적으로 선전된 내용중에는 교회가 버린 영아를 맡아서 키우는 것도 들어있다. 과거에 중국농촌에서는 영아유기사건이 많았다. 특히 여자아이같은 경우.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쨌든 악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중국인들중에서도 영아를 맡아 키우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버린 아이를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을 크게 벌인 것은 역시 교회의 육영당이다. 육영당이 맡아키우는 버린 아이들은 원래 신체조건이 좋지 못하였다(버려진 기간의 장단과도 관계된다). 수양된 이후, 양육자들은 왕왕 영아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그들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욱 신경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하여,  육영당의 영아사망률은 비교적 높은 편이 되었다. 육영당이 이런 죽은 영아를 모아서 매장할 때, 골치아픈 일이 생긴다. 과거에는 버린 영아는 어디에서 죽건 어디에 버려지건 이리가 먹든 개가 물든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러나, 한 장소에 너무나 많이 묻히게 되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아이들은 모두 교회가 죽인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중국의 어린아이들을 유괴하여, 심장과 간을 꺼내서 약을 만들고, 눈을 파내서 은을 만든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어떤 육영당은 사람들에게 버린 아이를 많이 거두어오도록 하기 위하여 왕왕 아이를 보내온 사람에게 약간의 보수를 주곤 했었다. 그런데 바로 나쁜 인간들은 이런 보수를 위하여 아이를 유괴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런 나쁜 일이 폭로되자, 모든 욕은 육영당이 뒤집어썼다. 마치 그동안의 소문이 확인된 것처럼.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1870년의 천진교안(天津敎案, 천진 종교사건)은 바로 이런 원인으로 발발한 것이다. 당연히 문화차이로 인한 충돌은 기독교의 전파역사상 드문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차이는 교류가 늘어나면서 사라진다. 기독교의 일부 풍습은 괴이하긴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도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어서 이상하게 더 이상 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는 이해하게 되고, 심지어는 화해까지 하게 된다. 그저 상호간에 오해가 대항으로까지 승화되지 않고, 피차간의 적의가 이미지로 고착화되지 않는다면, 충돌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정부의 행위는 이런 화해를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기독교는 금지에서 해제되었고, 유입되도록 허용되었지만, 청나라정부에 있어서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미봉책이었다. 청나라정부의 관리들은 겉으로는 금지를 풀면서, 속으로는 계속 금지하는 것이었다. 혁흔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천주교는 이단에 속하므로, "비록 금지는 풀었지만, 여전히 암중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부관리들은 직접 나서서 교회인사를 제한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일부 향신들은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거부했다. 배후에는 역시 관청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교충돌의 종교사건은 관청에 접수되기만 하면, 대부분 일이 번져버린다. 고의적으로 쌍방간의 적의를 인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나중에 종교사건에 대하여는 하나의 말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관청은 일반적으로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여 교회의 편을 든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절반만 얘기한 것이다. 진실한 말은 뒤의 절반에 있는데, 필자가 조사한 종교사건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매번 종교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아문에 제소되기만 하면, 심리를 책임진 관리는 처음에는 모두 백성편을 든다. 어떤 때에는 아무런 이유없이 편을 들어준다. 전체 심리는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서방국가의 공사나 영사는 왕왕 직접 나타나서 간섭을 한다. 이런 간섭은 어떤 때에는 심지어 대포와 함선을 동반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대등하지 못한 외교적 압력하에서 총리아문이 관여하면 사건은 뒤집어진다. 바로 이때, 관청은 다시 교회와 교민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변신한다. "교회측이 항상 이기고, 백성측은 항상 억울하게 진다" 이것은 통계가 불완전한 결과일 뿐이다. 이런 결과가 나타난 과정은 사람들이 왕왕 눈여겨보지 않는다.

 

가장 기괴한 것은, 어떻게 심리하든지간에, 관부는 절대 백성들에게 진상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의 음란행위, 심장등을 꺼낸 행위등에 대한 고소에 대하여 소송이 끝나고 나면, 제소한 사람이 패소하게 되지만, 아무도 나서서 확실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관청이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여, 아무렇게나 사건을 처리한 것으로 생각되고, 원래 기세있게 제소했던 백성들은 더욱 억울하다고 소리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해는 전혀 풀리지 않고, 오히려 불공대천의 원수로 발전하게 된다. 어떤 종교사건에서는 심리과정에서 충돌이 있던 백성측이 원래 교회와 교민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것이 발견되지만, 관청은 고의로 이 일을 축소해버리고, 과도하게 "일을 벌인" 백성을 심하게 처벌한다. 이리하여 갈등을 격화시킨다. 관청은 정보통제와 통치술을 운용하여, 기본적으로 서양에 양보하면서, 백성들의 서방에 대한 분노를 점화시키는 목적을 달성했다. 관청은 나중에 서방과 투쟁하면서 백성들의 분위기를 이용하는데 복선을 깔아둔 것이다.

 

권민은 바로 대부분은 실제로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후, 완고파관리들이 "백성을 이용"할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이용당한 무장군중이다. 권민들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그들이 떠들었던 "도창불입"의 술법과 그 배후의 신령이었다. 즉, 권민의 "도창불입"은 그들이 법술을 운용했을 때 신선이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도 진짜 도창불입인 경우는 없으므로 이 술법은 그들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면서, 다른 사람도 속이는 장난인 것이다(그저, 서양인들을 속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권민이 법술을 쓸 때 나타날 확률이 비교적 높은 인물에게서 우리는 또 하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당연히 신령이라는 것은 농민들이 잘 알고 있는 희곡의 인물이다. 예를 들면, <<삼국연의>>의 관장조마(관우, 장비, 조자룡, 마초), <<서유기>>의 저팔계, 손오공, 사오정, 그리고 공안극안의 황천패(黃天覇)등이다. 통계를 내본 적이 있는데, 이 세 유형의 사람은 권민들이 법술을 쓸 때, 출현한 빈도수가 가장 높았었다. 즉, 그들은 자신이 법술을 쓸 때, 모두 이 세 종류의 신령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삼국지 영웅이 많았는데, 권민들은 위나라 오나라 진영의 인물을 전혀 고르지 않았다. 전위, 허저, 장료, 서황, 주유, 황개, 태사자등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그저, 관우, 장비, 조운(조자룡), 마초와 황충등이 보일 뿐이다. 보기에 서태후가 돌봐준 권민들은 자기의 "충의"와 자기의 "정통"에 관심이 많았던 것같다. 당승 삼장법사의 세 제자는 모두 원래 재야에 있다가 나중에 관청에 흡수되어 마침내 정통으로 된 인물들이다. 특히 손오공은 금강불괴의 몸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리 일을 많이 벌여도 죽지 않는다. 그리하여 많은 권민들이 좋아했던 인물이다. 황천패의 경우, 그는 조정의 손발이고, 전문적으로 청백리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며, 도적을 섬멸하는데 앞장섰다(암중으로 음란한 서양인, 서양종교를 가르킬 가능성이 많다). 조정에서 특히 권민의 행위를 칭찬했던 대신중에 청백리로 불리우던 강의는 어느 의화단의 대사형을 그의 황천패라고 말한 적이 있다.

 

권민들이 넓은 땅에서 일어나기 전날, 어떤 동기에 의해서이건간에, 서태후의 무술정변은 청나라의 서방에서 배우겠다는 변혁의 길을 분쇄하게 된다. 그러나, 당초 이런 변혁을 일으킨 외부압력은 육군자의 목이 떨어졌다고 하여 전혀 감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청나라정부가 받는 압력은 더욱 커졌다. 압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니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백성의 여론"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에서 "도창불입"까지, 권민은 그저 완고파 관리들이 서태후에게 찾아내준 도구에 불과했었다. 도구가 되기를 자처한 권민들은 비록 일하는 것이 조금 황당하기는 했고, 함부로 죽이고 함부로 불태웠지만(북경 전문의 대책란-大柵欄-상업지역은 그들에 의하여 불타버린다. 그리고 수만의 무고한 신도와 서양물건을 쓰는 사람들이 살해당하였다), 팔국연합군이 아직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일체 서방적인 것은 깨끗치 청소하고자 했다. 사실 그들의 사상은 중앙정부와 일치했다(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누구로부터 주입을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저, 그들이 도구로 삼은 자본이 너무 가련할 뿐이다. 법술이라는 것은 민간의 무술과 기공활동일 뿐이고, 그럴듯하지도 않은 무술과 기공, 혼령이 몸에 붙는 것, 그리고 잘 아는 희곡의 인물의 힘을 빌리는 것일 분이다. 복장은 비록 통일되었지만, 이것은 그저 길리(吉利)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고(황색과 홍색은 길한 색이다), 팔괘분단(八卦分團)을 하였지만, 모두가 스스로를 건자단(乾字團)이라고 우기면서 우두머리가 되고자 했고, 다른 일곱개의 괘는 거의 아무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마신 부적, 외우는 주문도 도교와 거의 관계가 없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이런 권민의 비밀은 당시와 이후 한동안 사실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우리가 일부러 밝히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비밀로 되었다. 이런 비밀을 분명히 밝혀두지 않는다면, 권민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