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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난정서(蘭亭序)에 대한 새로운 해석

by 중은우시 2007. 4. 1.

 <<난정서>> (당. 풍승소 모본, 신룡본,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난정서>> (원. 조맹부 모본)

 

<<난정서>> (송. 인종 조정 모본)

 

<<난정서>> (수. 개황 모본)

<<난정서>>(청. 강희 모본)

 

<<난정서. 현대. 모택동 글씨)

 

<<난정서>> (청. 정판교 모본)

 

글: 예방육(倪方六)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 진본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 나타났다 다시 사라져, 중국서예사상에서 아주 전설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어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永和九年, 勢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事也)"  이것은 예전에 모두가 외우던 명문장이다. 작자는 바로 왕희지인데 관직이 우군장군(右軍將軍)에 이르러 세상에서는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부르고 있다.

 

<<난정서>>의 유래는 이 글에서 명확히 하고 있다. 동진 목제 영화9년(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사안(謝安), 손작(孫綽)등 41명이 산음(지금의 절강성 소흥)의 난정에서 '수계' 즉 모여서 각자 시를 짓는 일을 했는데, 왕희지가 그들의 시에 서문을 쓴 원고가 바로 <<난정서>>이다. <<난정서>>는 <<난정연집서(蘭亭宴集序)>>, <<난정집서(蘭亭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書)>>, <<계첩(禊貼)>>이라고도 한다. 행서(行書)로 쓴 서첩중에서 정품중의 정품으로 불리우며, 중국서법사상 지고무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천하제일행서"로 불리운다.

 

<<난정서>>의 행방에 관하여 비교적 전통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왕희지는 <<난정서>>를 자신의 가장 마음에 드는작품으로 보았고, 집안의 가보로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었다. 그의 7대손인 수나라때의 왕법극(王法極)에게까지 이어졌는데, 왕법극은 불교에 흥미를 느껴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고, 불가에 귀의하여 중이 된 후 법호를 "지영(智永)"이라고 했다. 나중에 절강성 오흥현 경내에 있는 영흔사(永欣寺)에서 승려로 30년을 지냈다.

 

지영이 원적한 후 진품은 제자인 변재(辨才)에게 전해진다. 당나라초기에 명가의 묵보(글씨)를 무척 좋아하던 당태종 이세민은 왕희지, 종요(鍾繇)등의 글씨를 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엄청난 돈을 걸고 <<난정서>>의 진본을 구했으나 얻지 못했고, 나중에 진적이 회계의 변재화상의 수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세민은 변재를 불러서 만나고, 진본 <<난정서>>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변재는 짐짓 멍청한 것처럼 행세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세민이 어렵게 구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주군의 심리를 잘 아는 상서 방현령이 아이디어를 냈고, 감찰어사 소익을 보내어 <<난정서>>를 훔치게 한다.

 

소익은 이세민으로부터 왕희지의 서첩 진본 몇 개를 들고 가난한 서생인 것처럼 가장하고 영흔사로 간다. 일부러 변재와 가까워진다. 하루는, 소익이 변재와 서법에 대하여 얘기하였는데, 몇 건의 왕희지의 서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변재화사에게 감정을 해봐 달라고 한다. 변재는 자기를 속이려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그에게 그 서법들은 확실히 왕씨의 진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주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고 얘기하면서, 무의식중에 그가 <<난정서>>의 진본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소익은 못믿겠다고 말하고, <<난정서>>의 진본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라고 말한다. 변재는 자기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가 <<난정서>>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천정의 서까래에서 <<난정서>>진본을 꺼내서 소익에게 감상할 수 있도로 ㄱ해준다. 소익은 고의로 이것은 가짜라고 하여 변재를 미혹시킨다. 이렇게 서로 교류하면서 소익은 <<난정서>>를 비장하고 있는 서까래의 정확한 지점을 확인한다. 하루는 변재가 절에 없을 때, <<난정서>>를 훔쳐서 장안으로 간다. 그리고 진품을 이세민에게 바친다. 변재는 <<난정서>>가 도둑맞은 것을 알고는 화가나서 크게 병을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적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이 아주 널리 알려진 "당태종이 계교를 써서 <<난정서>>를 얻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른 판본은 이 견해와 전혀 다르다. 이것도 <<난정서>>에 관한 새로운 견해이며, 아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난정서>>의 진본이 제1차로 소실된 것은 4세기로, 치담(曇)이 묘속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치담은 서법명문가에서 태어났고, 진나라때 왕희지와 함께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의 부친인 치감(鑑)도 역시 서법에 능통했다. 그의 형인 치음()도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초서에 능했으며 대표작에 <<지경첩(至慶帖)>>이 있다. 후세의 평론에 의하면 왕희지의 초기 작품은 치음의 것보다 못했다는 것이다. <<난정서>>가 어떻게 치담의 수중에 들어갔는가? 이는 치가와 왕가의 두 집안관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치감은 왕희지의 장인이다. 즉, 치담은 왕희지의 처남이 되고, 왕희지는 치담의 자형(姉兄)이 된다. 이런 관계로, <<난정서>>가 치담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난정서>>외에 왕희지의 정서인 <<낙의론(樂毅論)>>도 치담이 수장하고 있었다. 치담이 죽은 후, <<난정서>>등 일련의 서예작품들을 자기의 묘 속에 넣게 하였다.

 

2백년후인 남북조시기에 진패선(陳覇先)이 진나라를 건립했다. <<난정서>>등 왕씨의 진적들도 이때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남사. 시흥왕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북벌군인들은 지금의 진강 단도경내에 있는 치담의 묘를 도굴했고, 대량의 부장품을 얻었는데, 그 중에는 왕희지등 명가의 서예작품들이 있었다. "시흥왕"은 진백무며 진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특히 서예를 좋아했다. 도굴사건후, 이 도굴품은 관청에서 몰수해서 비장하며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진세조는 아들이 서예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이것을 진백무에게 주었다. 진백무는 보물을 얻은 것처럼 정성스럽게 임모(臨摹, 베끼는 것)하면서 많이 배웠고, 정수를 깨쳤다.

 

<<진서. 세조구왕열전. 시흥왕백무>>에는 이러한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백무는 성격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아랫사람을 공경했다. ...세조는 아주 아꼈다. 북벌군인들이 단도에서 진나라 치담의 묘를 도굴하면서 진나라 우장군 왕희지의 글 및 유명한 사람들이 남긴 글을 얻었다. 이일이 발각되어 그 글들은 현의 관리가 몰수했고,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하였다. 세조는 백무가 고서를 좋아하여 대부분 그에게 하사했다. 그래서 백무는 초서와 예서를 익혔는데, 왕우군의 서법을 많이 익히게 되었다"

 

진백무는 개략 565년 전후하여 왕희지의 이 작품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후인 568년말에 진나라에서는 궁중정변이 일어나고, 진백무는 그의 숙부인 진욱(陳頊)에게 길거리에서 살해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난정서>>는 다시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고, 이후 당태종 이세민이 얻을 때까지 소식이 없게 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세민은 생전에 왕희지의 서법을 매우 숭앙하여, 유조로 죽은 후에 머리에 <<난정서>>를 배게 해달라고 하였다. 즉, "살아서도 같은 침대, 죽어서도 같은 장소"에 있기를 원한 것이다. 시인 육유가 읊은 바와 같이, "글은 소릉이 보관되어, 천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이세민은 649년에 죽었고, 생전에 그의 무덤인 소릉(昭陵)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가 소릉에 묻힌 후, 지궁의 석문이 봉쇄될 때 <<난정서>>도 영원히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 약300년후, 절도사인 온도(溫韜)가 관중18제왕릉을 도굴할 때, <<난정서>>는 다시 한번 세인의 시선을 받는다. 그리고, <<난정서>>진적의 행방에 대한 수수께끼는 더욱 신비스럽게 된다.

 

온도가 당릉을 도굴한 때는 당나라말기의 오대시기였다. 바로 10세기전후였다. <<신오대사. 잡전. 온도전>>의 기재에 의하면, 후량왕 개평2년(908년)에 "온도는 7년간 절도사로 있었는데, 당나라의 여러 제황릉이 그의 경내에 있었고, 모두 발굴하였으며, 부장된 금은재보를 취했다. 소릉이 가장 견고하여, 온도는 길을 내려가보니, 궁실제도가 화려했고, 인간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가운데가 정침이었고, 동서로 석상(石床)이 늘어져 있었다. 석상위의 석함(石函)에는 철갑(鐵匣)이 있었고, 전대의 도서, 종, 왕희지의 필적이 있었는데, 왕희지의 필적은 새것과 같았다. 온도는 이를 다 취했다." <<신오대사>>는 북송의 문학가이자 사학가인 구양수(1007-1072)가 편찬하였다. 구양수의 글을 보면 <<난정서>>는 온도의 도굴품에 들어있었던 것같다.

 

온도가 죽은 후, 이 무가지보인 도굴품은 정현소(鄭玄素)의 수중에 들어간다. 정현소는 온도의 생질이다. 일찌기 옛글을 좋아했고, 유명한 장서가이다. 집안에는 고서가 천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바로 온도가 소릉에서 도굴해온 왕희지등 명가의 서법작품이 있었다. 후세에는 그 안에 분명히 <<난정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온도의 당시 도굴품등기목록에 이 글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난정서>>는 어디로 갔는가? 온도는 절도사에 있었지만, 군인나부랑이에 불과했고, 문화적인 소양은 없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왕희지, 종요등의 글을 도굴한 후, 마음에 들어한 것은 서적을 포장하고 장정한 화려한 비단외피였고, 그것이 더 값나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비단을 뜯었고, 글은 폐지로 생각해서 버렸따는 것이다. <<난정서>>고 그가 찢어버린 것일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의 추측에 의하면, 온도의 도굴품등기에 <<난정서>>가 없지만, 이것은 아마도 당고종 이치와 대주 여황제 무측천이 합장한 건릉안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이세민이 <<난정서>>진품을 얻은 후에 일찌기 우세남, 저수량, 풍승소, 구양순등 당시의 명가들로 하여금 <<난정서>>진본을 임모하도록 하였고, 이를 나누어 황자, 그신에 주었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전하는 "당나라 모본"의 유래이다. 마찬가지로 왕희지의 진품을 좋아했고, 대권을 승계한 이치는 완전히 부황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고, 모본을 부장하고, <<난정서>>진본은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건릉에 부장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난정서>>의 행방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견해이며, <<난정서>>가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불을 댕겼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로, 이런 견해는 거저 선량한 상상일 뿐이다. 이곳에 없다면 저곳에 있다는 식이고, 아무런 논리적 합리성이 없다. 이 견해는 건릉을 도굴하자는 주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제왕릉의 부장품은 일반적으로 내부 목록이 마련된다. 그러나 사료에는 보이지 않고 야사에도 아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만일 어느날인가 건릉이 비준받아 발굴되고, <<난정서>>의 진본이 출토된다면, 그것은 중화문화의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진품이 건릉에 있다고 하더라도, 한 장의 얇은 비단이 1천여년동안 부패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만일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난정서>>가 건릉에 묻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없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고, 그저 장난치는 것일 뿐이다. 필자는 오히려 <<난정서>>는 온도에 의하여 도굴되었고, 진품은 아직도 민간에 존재하며, 지금까지 어느 곳인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고 믿고 싶다.

 

당나라 정관(당태종 이세민의 연호)이후, <<난정서>>의 여러 당나라 임모본이 있고, 송, 원, 명, 청, 및 당대에까지도 여러 시기에 걸쳐 도굴되었다는 소문을 불러온 적이 있다.

 

한가지 말해야 할 것은 현대에 이르러, <<난정서>>의 진본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작가의 진위에대한 의문까지 불러오고 있다. 곽말약의 <<왕사묘지의 출토로 본 난정의 진위>>라는 글은 1960년대에, <<난정서>>의 작가가 도대체 누구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곽말약은 왕희지의 작품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화상이 선조의 이름을 빌린 위작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은 당시의 최고권력자 모택동까지 가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