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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의 두 곳 낭낭부(娘娘府)

by 중은우시 2007. 5. 5.

글: 만항선(萬恒先)

 

북경교외지도를 펼쳐보면, 이화원의 뒷편을 이은 청룡교(靑龍橋)에서 서쪽으로 가면, 도공부(道公府), 사왕부(四王府)등의 지명이 나온다. 다시 취미산(翠微山, 八大處있는 곳)의 남쪽산등성이에는"부(府)"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이 더욱 많아진다. 예를 들면, "옹왕부(雍王府)", "신왕부(申王府)"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북경토박이들이 말하는 "산을 지나가다보면 72개의 부(府)"라고 부르는 곳이다. 여기의 "부(府)"는 "묘부(墓府)" 또는 "지부(地府)", 즉 무덤이라는 뜻이다. 바로 북경의 또 다른 명나라 왕릉인 것이다. 이곳에는 수백의 명나라 황자(皇子), 공주(公主) 그리고 비빈(妃嬪)들이 매장되어 있다. 그중에 두 곳은 황후(皇后)가 묻혀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낭낭부(娘娘府, 낭낭은 마마라는 뜻임)"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주유검(朱由檢, 나중의 숭정제)이 신왕(信王)으로 있을 때, 그는 내시에게 물었다. "서산(西山)에 신의왕분(申懿王墳)이라고 있는가?" 내시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옆에 유낭낭분(劉娘娘墳)이라고 있는가" "있습니다" 주유검은 자신이 황제위에 오른후 바로 사람을 보내어 유낭낭을 명십삼릉의 경릉(慶陵)으로 이장했다. 원래, 이 유낭낭이 바로 숭정제의 생모였는데, 광종에 의하여 버림받게 된 효순황후(孝純皇后)였다.

 

명광종 주상락(朱常洛)은 태자를 20년간 하였는데, 지위가 항상 불안하였다. 그는 비록 황장자(皇長子)이지만, 부황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명신종(만력제)은 정귀비(鄭貴妃)만을 좋아했고, 그녀와의 사이에 주상순(朱常洵)을 두었다. 그는 매일 폐출될 위험에 놓여 있었고, 정귀비의 음해를 방비해야 했다. 그래서, 주상락은 성격이 조급하며, 자주 왕부 안에서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유왕부(裕王府)안에는 유(劉)씨성의 궁녀가 있었는데, 만력 38년(1610년)에 주유검을 낳았다. 그녀의 지위는 그러나 전혀 바뀌지 않았다. 억압과 두려움속에 주상락은 궁녀들에게 화풀이를 해대었다. 주유검이 5살되던 날, 유씨는 사소한 일로 주상락의 질책을 받고, 핍박을 받아 자결하게 된다. 유씨가 죽은 후, 주상락은 정귀비가 이를 빌미로 잡고, 부황이 조사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전혀 외부에 눈치채지 않도록 유씨를 서산에 묻어버리고 만다.

 

12년이 흘렀고, 주유검이 황제가 되었다. 유씨를 부황과 합장시켰을 뿐아니라, 그녀를 효순황후로 봉하였다. 400년전의 이 궁중의 억울한 사건은 오늘날 경서(京西, 북경서쪽)에 "유낭낭부"라는 지명을 남겼다.

 

경서에는 또 하나의 "낭낭부"가 있다. 청룡교에서 향산(香山)으로 가는 길에 시내버스가 상홍기(상홍기)를 지나면, "낭낭부"라는 버스역이 나타난다. 길의 북쪽에는 작은 산이 서쪽으로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다. 이 산은 옛날에 금산(金山)이라고 불렀다. 명나라때의 기록에 의하면 7명의 황후(그중 4명은 나중에명13릉으로 옮겼다고 한다)가 경서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초기에는 대부분 금산에 묻었고, 말기에는 취미산에 묻었다. <<장안객화>> <<완서잡기>>등의 서적의 기재와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옛날에 금산일애의 명나라 황실묘는 백여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금산에는 송백나무사이로 누각과 무덤이 하나하나 세워져 있었고, 군사들과 분호(墳戶, 분묘를 지키는 백성)가 주야로 순찰을 돌았다(부근에는 豊戶營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옛날의 墳戶村이다).

 

청나라중기이후에는 이 곳의 능원은 관리가 소홀해지고, 날로 황량해 졌다. 지금의 금산에는 황가능침의 기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낭낭부"에는 여전히 경제릉(景帝陵)이 있으며, 이곳에 매장된 것은 황형(皇兄, 明英宗)과 황제의 지위를 다투던 주기옥(朱祁鈺, 明代宗)이 묻혀 있다. 명영종의 "탈문지변(奪門之變)"으로 황제위에서 쫓겨난 후, 왕의 예로 이곳에 안장된 것이다. 당시 명대종보다 먼저 이곳에 묻힌 황실구성원이 있었으니, 바로 정통8년(1443년)에 "빈어례(嬪御禮)"로 간략하게 이곳에 매장된 "공양호황후(恭讓胡皇后)"이다.

 

금산에 매장된 황후들은 모두 황제의 총애를 잃은 후 황후에서 폐위된 여인들이며, 모두 처연한 신세내력을 지니고 있다. 이 호황후도 예외는 아니다. 호씨는 이름이 선상(善祥)이며 제녕(濟寧) 사람이다. 일찌기 주첨기(朱瞻基, 선덕제)가 명성조(영락제)의 황태손으로 있을 때, 호씨를 비(妃)로 삼는다. 선덕제가 즉위한 후 그녀는 황후가 된다. 선덕2년(1427년), 손귀비(孫貴妃)가 돌연 황자를 낳았다. 사실 이 아이는 누구인지 모르는 무명의 궁녀가 낳았는데, 손귀비가 빼앗아와서 자기 아들로 삼았다. 선덕제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모른 척 눈감아주었고, 손귀비를 더욱 총애하였으며, 그녀가 하는 말은 뭐든지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호황후를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한다. 황후인 호씨는 아들도 없고, 몸에 병도 있으며, 선덕제의 총애도 받지 못하였다. 다음해 봄에 황제는 명을 내려 황후의 지위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녀는 할 수 없이 명을 따라 장안궁으로 물러난다. 황자를 낳은 궁녀도 그 이후 사라졌고,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씨는 "모이자귀(母以子貴, 어미는 자식에 따라 귀해진다)"의 원칙에 따라 황후에 책봉된다. 호황후는 그저 정자선자(靜慈仙子)라는 봉호를 받고, 실의와 절망속에 15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명영종실록에 의하면 정자선자묘는 그다지 격이 높지 않게 매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녀소생인 아이가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이다.

 

명영종은 자신이 손태후의 친아들로 알았었는데, 천순6년에 손태후가 사망한 후, 전황후(錢皇后)가 그에게 사실을 알려준다. 꿈에서 깨어난 듯, 주기진은 생모를 찾아해멨으나, 생모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친에 대한 그리움으로 "현명하고 죄없이 폐위된" 정자선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게 된다. 먼저 호씨를 "공양...장황후"에 봉하고 능묘를 다시 짓고 묘를 만든다. 그리하여 원래의 자리에 황후의 예에 따라 능침을 마련해주게 된다. "공양호황후"는 명나라에서 처음으로 생전에 황후에서 폐위된 후 금산에 묻힌 황후이다.

 

취미산의 산자락에 있는 유낭낭부의 능침은 일찌감치 없어졌다. 이곳은 현재 팔대처하이테크과기원구가 되었다. 금산의 자락에 있는 낭낭부도 일찌감치 이름만 남았다. 그러나 경태제의 능은 한번 가볼만하다. 지금의 경태제능은 비록 그저 정자 하나, 문 하나, 토구(土丘) 하나가 남았을 뿐이지만, 정자안에는 청나라 건륭황제가 쓴 어제시(御製詩) <<제명경제릉(題明景帝陵)>>이 남아 있는데, 그 글 내용과 서예를 감상할 만하다.  건륭이 말한 "동생은 공(恭)이 없었고, 형은 인(仁)이 없었다"는 말은 곰씹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