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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주환(朱紈) : 역사를 후퇴시킨 명말의 충신

by 중은우시 2007. 6. 17.

글: 황파(黃波)

 

주환이 누구인가? 이 사람은 명말역사상의 한 비극적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의 "해금(海禁,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 정책, 즉 해상무역봉쇄정책)"정책에서 강직불아(剛直不阿)하게 가장 노력했던 사람이면서, 효과도 가장 많이 거두었다. 그러나, 결국 약을 먹고 자진하는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환의 비극을 얘기하면서 그저 이런 전통적인 충성이 어리석다는 생각만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다. 주환이 비극적인물이 된 것에,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아니다.

 

일찌기 세계의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이 언제부터 쇠락했는가? 이에 대하여 사람들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주원장때부터 대명왕조가 해금정책을 시행하면서부터라고 하였고, 바로 이때부터 중국은 점차 대외교류의 기백과 능력을 상실했으므로, 쇠락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대체로 이론이 없다. 현대적인 경제학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나무조가리 하나라도 바다로 나갈 수 없다"는 고압적인 정책하에서 어느 편도 이로 인해서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바다에서 먹고 살 것을 마련하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리들도 관세등 많은 현실적인 이익을 버려야 했다. 해금정책을 시행하면서 대외적인 창구는 엄밀하게 봉쇄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에 대하여 만족을 느낀 사람은 주원장과 그의 후손들밖에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이러한 봉쇄를 통하여 허황된 안전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입에 풀칠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항거할 수 없는 진리이다. 해금정책으로 연안의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되니, 사람들은 들고 일어나 이를 타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해금정책과 반해금활돌의 투쟁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가정(嘉靖)연간에 들어서는 소위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역사학자들은 일찌감치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여 증명한 바 있다. "왜구"의 수령 및 구성원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해상에서 밀수하는 무역상인들이었다. 왜구토벌전쟁은 실제로는 중국내부의 해금과 반해금의 투쟁이었다.

 

주환은 바로 이 해금과 반해금의 투쟁이 날로 격화될 때, 절강순무(浙江巡撫)를 맡아 해금의 최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해금정책의 창끝은 당연히 밀수무역에 종사하는 무역상인들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왜 정부의 엄격한 금지명령하에 목이 날아갈 위험을 무릎쓰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현대인이라면 한번만 생각하면 바로 알아낼 것이다. 바로 정부가 무역금지정책을 쓰고 있으므로, 원래 박한 이익을 가져오던 해상무역이 폭리산업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죽음까지도 무릎쓰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당연히 주환은 이런 것은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조정에서 정한 정책을 엄격하게 집행할 뿐이었다. 그가 절강, 복건에 온 후에 군대를 이끌고 이미 무장을 갖추고 있던 해상밀수무역단과 죽기를 다해서 싸웠을 뿐아니라, 현지민중에 대하여 부저추신(釜低抽薪, 가마솥의 아래에서 장작을 빼버리는 정책, 즉, 근원을 잘라서 싹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정책)의 방법을 사용하여, 선박을 불태워 백성과 무역상인들의 '결탁'을 막고, 보갑연좌제를 사용하여 백성들이 감히 모험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방법은 효과를 나타냈다. 역사서에서 "복건 사람들은 먹을 거리와 입을 거리를 바다에서 얻었는데, 점차 그 이익이 사라져, 사대부의 집안마저도 불편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대부들까지 불편하게 되자, 주환은 바로 상류계층의 사람들의 공적이 되어버렸고, 결국은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게 된다.

 

주환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명사>>에는 두 군데서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하나는 그가 "청렴하고 강직하며 일을 함에 있어서는 용감하게 처리하고, 국가를 어지럽히는 근원을 막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굳건하여, 세력있는 가문들도 모두 무서워했다" 이로써 볼 때, 봉건왕조에서 드물게 보는, 강직하고 청렴하며, 능력있으며, 도덕적이고 사명감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비극은 여기에 숨겨져 있었다. 당시 그가 얻은 효과가 크면 클 수록, 사회발전에는 역작용을 하게 된 것이다. 복건의 쌍서항(雙嶼港)은 당시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무역항구였고, 주환이 오기 전에 번성했었는데, 주환은 군대를 이끌고 점령하여 후환을 제거했다. 그러나, 군대가 머물기 불편하여, 나무와 돌로 항구를 막아버리는 조치를 취하였고, 이로 인하여 천연의 좋은 항구는 무역항구로서의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을 읽으면서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강렬한 도덕적 사명감과 개인적인 양호한 인품과 능력을 가지고도, 세상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이로 인한 역할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본다면, 이런 역할은 그저 차를 뒤에서 끌어 후퇴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환의 비극은 지금의 우리도 되돌아볼 만하다. 원인은 바로 이에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