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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주순수(朱舜水) : 일본의 공자

by 중은우시 2007. 2. 8.

 

 

주순수(朱舜水, 1600-1682)

 

명말청초에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방이지(方以智), 왕부지(王夫之)와 주순수는 "오대사(五大師)"로 존경받았다. 그중, '일본의 공부자(孔夫子)'로 존칭되는 주순수는 그의 전설적인 경력으로 중국과 일본의 교류사에 독특한 장을 남겼다.

 

주순수의 자는 노여(魯璵)이고 절강 여요(餘姚) 사람이다. 문인으로서 주순수는 어려서부터 명리에는 담백했고, 과거제도에 대하여는 반감이 컸다. 그는 경세치용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회의 민생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전원에 은거하며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의 난세에 주순수는 우국충정을 유지했으며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1644년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하자, 남명세력은 주산군도(舟山群島)까지 패퇴했다. 사직을 회복하기 위하여, 주순수는 여러차례 일본과 주산을 왕래하며, 일본에서 군대를 빌려 남명을 지원하고 중원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651년, 51세의 주순수는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여러가지 고려 끝에 그의 병력지원요청을 거절했다. 주순수는 할 수 없이, 월남으로 가서 유세하고자 하였따. 그러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바로 이때, 주순수는 주산군도가 이미 청나라 병사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득이 월남에 계속 체류하게 된다.

 

1657년, 주순수는 귀국하여 정성공의 항청활동을 지원하고자 한다. 그런데, 바로 이때, 월남국왕이 학식있는 사람을 모아서 관료로 쓰고자 하였고, 어떤 사람이 주순수를 추천했다. 그래서 주순수의 귀국은 저지되었으며, 월남의 왕궁으로 끌려갔다. 다른나라 국왕의 앞에서 주순수는 죽어도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하였다. 월남관리가 종이에 "배(拜)"자를 써서 그에게 절하라고 명하였으나, 주순수는 붓을 들어 그 앞에 '불(不)
'자를 써서 거절의사를 표시하였다. 관리는 그의 소매를 끌어 강제로 절하게 하려 하였으나, 그는 극력 버티었다. 월남국왕은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주순수는 그러나, "오늘 내가 명나라의 예절을 지키다 죽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죽은 후 시신을 수습할 때는 '명징군주모지묘'라고 해달라". 이런 기개있는 행동에 월남국왕은 그를 존중하게 되고, 결국 그를 귀국하도록 풀어준다. 나중에 주순수는 정성공의 북벌에 참여한다. 그러나, 실패로 끝난다.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하여,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나간다. 일본에 거주한 후에, 주순수는 근검하게 지내면서 죽을 때에는 3천여냥의 백은을 남긴다. 그리고 이 돈은 명나라를 회복하는 경비로 삼고자 하였다.

 

해외에 유랑하던 주순수는 일본문화계의 존경을 받는다. 그는 일본에서 22년간 학문을 가르키고, 많은 제자를 길러낸다. 그래서 나중에  "일본의 공자"라는 존칭까지 얻는다. 그 가운데에 일본의 유학대가인 안동성암(安東省庵)과의 사제간의 우의에 대하여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찌기 주순수가 반청복명을 위하여 중국과 일본을 오갈 때, 안동성암은 주순수에 대한 존경의 뜻을 가진다. 나중에 주순수가 일본에 머무르기로 결정하는데, 일본막부는 외국인이 머무르지 못하도록 하여, 진퇴유곡의 경지에 빠진다. 안동성암은 이를 위하여 사방에 청을 넣어 결국 일본당국이 파격적으로 외국인을 일본에 머무르지 못하게 40년간 지켜왔던 법령을 깨뜨리게 된다.

 

주순수가 막 나카사키에 도착했을 때, 안동성암은 9번이나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일본에서의 첫번째 제자가 된다. 스승의 생활이 곤란할 때는 안동성암이 다시 적은 녹봉중에서 절반을 쪼개서 주곤 하였다. 1663년, 주순수의 집이 화재로 불타버렸을 때는, 호묘사(皓墓寺)의 처마밑에 머무르게 되어 지경이 아주 낭패였다. 안동성암은 이 소식을 듣고 급한 마음에 병이 깊던 누이도 팽개치고 나카사키로 달려가서 스승을 위하여 새집을 지어준다. 주순수는 이 외국제자에게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그에게 지기(知己)라는 글자를 써서 주기까지 하였다.

 

주순수 문하의 엘리트는 안동성암을 제외하고도, 일본의 재상(宰相, 水戶侯)인 덕천광국(德川光國), 유가의 종사인 이등유정(伊藤維楨), 일본 고학(古學)의 비조인 산록소행(山鹿素行), 대유 안적각(安積覺)등이 있다. 일본에 주자학(朱子學), 고학(古學)과 수호학(水戶學)은 모두 주순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3대학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실증을 중시하고, 경세치용을 강조하며, 개혁을 이끄는 사상조류를 형성하였고, 일본사회의 진보를 이끌었다. 특히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주순수는 덕천광국을 도와서 <<대일본사>>를 편찬하였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주순수는 "주왕을 존중하고, 제후를 물리치며, 오랑캐를 물리치는" 춘추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런 사항은 나중에 일본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사상을 형성하여, 막부를 무너뜨리고 명치유신시대를 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