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모문룡(毛文龍) : 명나라 말기의 장수

by 중은우시 2007. 5. 29.

모문룡(1576-1629). 절강 인화(지금의 항주)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을 따라 외삼촌인 심광조(沈光祚)의 집에서 살았다. 모문룡은 경서를 읽기를 싫어했고, 일하는 것도 싫어했다. 사람들의 관상과 사주를 봐주면서 생활을 영위했다. 천계원년(1621년) 즉, 모문룡이 45세되기 전까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하여는 역사서에 기록이 거의 없다. 남아 있는 기록도 서로 모순되는데, 대체로 세 가지이다.

 

첫째, 모문룡은 어려서 글읽기를 싫어했으나, 손자병법에는 흥미를 가졌다. 그의 부친이 일찍 죽었으므로, 그의 외삼촌은 당시 병부의 6품인 주사를 했는데, 그는 모친과 함께 외삼촌의 집에 머물렀다. 나중에 심광조는 그를 요동총병 이성량(李成梁,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장수 이여송의 부친)에게 소개했고, 이리하여 내정천총(內丁千總)의 자리를 얻게 된다. 일찌기 무과에 응시한 바 있으며 6등으로 합격한다. 나중에 요동순무 왕화정(王化貞)이 인재를 모을 때, 그는 유격(遊擊)의 자리를 얻는다. 유격은 중급장교이고, 현재의 계급으로 보자면 영관급에 해당한다.

 

둘째, 모문룡은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했고, 부친이 없었으므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도박등 나쁜 습관에 빠졌다. 나중에 도박빚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가기도 하였다. 모친은 아이가 올바로 자라지 못하자, 외삼촌인 심광조에게 맡긴다. 심광조는 당시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를 지내고 있었는데, 왕화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화정에게 모문룡을 맡긴다. 군대에 간다면 아무래도 규율을 익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화정은 심광조의 부탁을 받아 그에게 도사(都司)의 직위를 맡긴다.

 

셋째, 모문룡은 어려서부터 백수건달이었다. 나중에 그는 북경으로까지 진출하는데, 그 곳에서도 자리잡지 못하자, 다시 요동까지 흘러들어간다. 군대에서 일이십년을 지내다가 천계원년(1621년)에 친구의 추천을 받아 요동순무 왕화정의 아래에서 유격을 지내게 된다.

 

모문룡이 어떻게 관직에 나갔는지의 의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 세 가지 의견을 살펴보면, 구체적인 점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즉, 모문룡이 외삼촌의 도움을 받고, 요동순무인 왕화정과의 관계를 통하여 군대내에서 자리를 얻었다는 점이다.

 

왕화정이 요동순무를 지내던 기간동안, 명나라는 요동의 70여개 성을 후금에 빼앗긴다. 그리고 이어서 심양, 요양을 잃어버린다. 왕화정은 할 수 없이 광녕(廣寧)에 물러나서 주둔하게 된다.

 

누르하치가 요동에서 한족을 핍압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요동의 한족들은 후금에 강렬한 불만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만주족들이 먹는 고기에 독을 넣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물에 독을 풀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후금의 병사들을 몰래 잠복해서 죽여버리기도 하였다. 왕화정은 요동한족들의 후금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후금에 반항하는 활동을 조직한다.

 

명나라 천계원년 즉, 천명6년(1621년) 5월, 모문룡은 명을 받아 군인 200여명을 데리고, 하동으로 가서, 후금에서 도망쳐오는 요동의 인민을 받아들이고, 잃었던 땅을 되찾는다. 7월초, 모문룡은 정탐후 후금의 진강(鎭江, 지금의 요녕성 단동시 구련성향)의 성안이 비어있는 것을 알고는 기습을 한다.

 

진강은 압록강에 가까운 성이었고, 이 때 성을 지키는 유격은 퉁양진(養眞)이라는 사람이었다. 퉁씨집안은 대단한 집안이다. 이 집안에 퉁양성(養性)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청태종을 따라서 홍이대포(紅夷大砲)를 만들었다. 팔기한군이 설립되자 퉁양성은 바로 오진초합(烏眞初哈)의 도통(都統)에 임명되었다. 퉁씨집안의 한 여자아이는 나중에 순치제에게 시집가서, 강희제를 낳는다. 그래서 퉁가들은 강희제때 관리를 지낸 사람이 많다. 당시 사람들이 "퉁반조(半朝, 조정에 퉁씨가 절반이다)"라고까지 하였다.

 

모문룡은 진강의 중군인 진량(陳良)으로 하여금 안에서 내응(內應)하도록 하여, 7월 25일 여명때 안팎에서 진강성을 협공하기로 했다. 모문룡은 집안장정, 둔민등을 이끌고, 진강성밖 20리지점에 상륙한다. 25일 계명에 명나라 병사들이 성아래 도착한다. 퉁양진은 70여명을 이끌고 응전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퉁양진은 생포되고, 그 아들인 퉁풍년(豊年)등은 피살된다. 진강의 병사 400여명은 투항한다.

 

진강을 수복하자, 탕참(湯站), 험산(險山) 일대의 성들도 차례로 명나라에 항복한다. 수백리내에서도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여, 늙은이 어린아이 할 것없이 항복해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모문룡의 황금시기였다. 그러나, 좋은 세월이 길지는 못했다. 누르하치가 이 소식을 듣고는 패륵 아민(阿敏), 황태극(청태종)으로 하여금 3천을 이끌고 진강연안을 소탕하도록 지시한다. 모문룡은 왕화정에게 도움을 청하나, 왕화정은 적시에 도와주지 않는다. 모문룡은 조선으로 도망친다. 아민은 이후 병사 5천을 이끌고 진강을 건너 조선땅으로 들어가서, 모문룡의 군사를 추격한다. 이리하여 명나라 관병 1500명이 죽는다. 그중에는 유(劉)씨성의 유격같은 고급장교도 있었다. 모문룡은 겨우 몸을 빼내 목숨을 건진다.

 

나중에 모문룡은 부하를 이끌고 피도(皮島, 한국에서는 가도-島라 함)에 주둔한다. 피도는 압록강입구의 동쪽에 있는 조선만에 있다. 동강(東江)이라고도 부른다. 동서로 15리이고, 남북으로 10리이며, 초목이 자라지 않고, 크지도 않은 편이다. 그러나, 피도는 요동, 조선, 후금의 사이에 끼어 있었고, 북쪽으로 바다 80여리를 건너면 바로 후금땅이다. 동북해는 조선이다. 세 곳의 요충이고 아주 중요한 위치이다.

 

모문룡은 피도에서 유민을 끌어모아, 집을 짓고, 인삼을 채취하며, 무역을 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군대를 편성하고, 조정에 군량미를 요청하여 기지를 건설하였다. 모문룡의 세력을 갈수록 강해졌고 스스로 그 지방의 패주가 되었다. 명나라는 모문룡에게 평요총병관(平遼總兵官)에 임명한다. 피도를 동강이라고도 불렀으므로, 그를 '동강총병'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를 '모수(毛帥)'로 불렀다. 천계3년(1623년), 모문룡은 수하의 부장 장반(張盤)등을 이끌고 금주(金州, 요녕성 금주시)를 공격한다. 조정에서는 그를 좌도독(左都督)에 임명하고 상방보검을 내린다. 그리고 피도에 군진을 설치하여 동강진이라고 부른다. 모문룡은 동강을 기지로 하여,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후금의 성들을 공격했다. 큰 습격만도 여섯 번이다.

 

제1차: 천계4년 즉 천명9년(1624년) 5월, 모문룡은 장수를 보내어 압록강을 따라 장백산을 넘어 후금의 동부 휘발(輝發)지역을 공격하나, 전군이 몰살된다.

 

제2차: 같은해 8월, 모문룡은 병사를 보내어 의주성의 서쪽에서 도강하여, 섬의 둔전으로 들어가나, 후금에 발각되어, 기습을 받아 500여명이 참살되고, 섬에 있던 군량은 모두 불태워진다.

 

제3차: 천계5년 즉 천명10년(1625년) 6월, 모문룡은 300명을 파병하여, 밤에 요주성의 남쪽의 관둔채로 들어간다. 후금의 총병 양고리에게 발견되어 격파된다.

 

제4차: 같은 해 8월, 모문룡은 병사를 보내어 밤에 해주 장둔채를 기습한다.

 

제5차: 천계6년 즉 천명11년(1626년) 5월 5일, 모문룡은 병사를 보내어 안산을 기습한다. 나중에 후금의 수비장군인 바부타이에게 격패당한다. 후금에서는 "그 병사 천여명을 죽이고, 유격 이양미를 생포했다"고 적고 있다.

 

제6차: 같은 해 12월, 모문룡은 다시 병사를 보내어 사르후성을 공격한다. 밤에 성남쪽을 공격했지만, 수비군에 발각되어 격퇴당한다.

 

명나라의 후금 배후에 있는 유일한 부대로서, 모문룡은 후금을 교란시켰다. 그러나 연전연패했다. 그러나 연패하면서도 계속 교란시켜서 일정한 견제작용을 했다. 천계7년 즉 천총원년(1627년) 1월 후금은 조선이 모문룡을 배후에서 도와준다는 구실로 조선에 출병한다.

 

동강의 형세는 후금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모문룡이 제대로 직무수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숭정2년 즉 천총3년(1629년)까지, 모문룡은 동강을 8년간이나 지켰지만,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요동의 땅을 손바닥만큼도 회복하지 못했다. 모문룡은 "장사꾼을 모아서 금지물품을 무역하는데" 열중했다. 실제로는 밀무역등을 통하여 엄청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그가 후금에 대하여 발동한 6번의 공격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후금이 두 번이나 영원과 영금을 공격하느라 힘쓸 때에도 모문룡은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지 않았다. 다른 측면으로 모문룡은 독자적인 기치를 내걸었고,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조정에 대하여는 군량을 계속 요청하여, 국고에 부담을 주었다. 동시에 그는 엄당(환관당)에 의탁하여, 동강에서 하고싶은대로 하고,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모문룡에 대한 견해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으므로 역할이 크다는 것이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발호하며 후금에 대항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가 이루는 일은 적고, 실패만 한다고 보기도 하였다.

 

역대 명나라의 요동군사장관은 웅정필도 좋고, 고제도 좋고, 왕재진도 좋고, 손승종도 좋고, 모두 모문룡이 있는 곳을 관리할 수 없었다. 원숭환은 계료독사로 취임한 후, '오년내에 요동을 회복'하려는 전략목표를 세웠으므로, 그는 동강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고려하게 된다.

 

원숭환이 요동에 부임한 후, 모문룡의 진면목을 알고는 그를 더욱 싫어하게 된다. 원숭환은 지휘권을 통일하기 위하여 몇 가지 조치를 취하여 모문룡을 견제한다.

 

첫째, 조정에 동강에 보내는 군량미를 감독하도록 건의한다.

둘째, 조선에서 공물을 보내는 길을 바꾸어, 피도를 지나지 않도록 한다.

셋째, 등주, 내주에 해상금지령을 내려, 동강을 오가는 뱃길을 막는다.

넷째, 동강으로 보내는 군량은 모두 영원(원숭환의 주둔지)을 거쳐서 나가도록 한다.

다섯째, 동강의 군대조직을 개편한다.

 

이런 조치는 모문룡에게 큰 타격이었다. 특히 모문룡의 정치, 외사, 경제, 군사측면에서 마음대로 하던 것이 제한당하게 되었고, 특히 모문룡의 경제적인 명맥이 원숭환에 장악되었다. 이에 모문룡은 조정에 글을 써서 항의도 하고 거의 협박을 하기도 한다.

 

이후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12가지 죄를 물어 목을 베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