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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개성황제 명무종(明武宗)

by 중은우시 2007. 11. 30.

글: 주가웅(朱家雄)

 

명나라의 10번째 황제는 명무종이다. 그가 무종(武宗)이라는 묘호를 받은 이유는 자연히 그가 재위하던 기간중에 보통이 넘는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로 임기내에 세번의 반란을 평정했는데, 특히 그가 군대를 친히 이끌고 나가서 명나라를 침범한 5만의 몽고기병과 격전을 벌인 끝에 성공적으로 물리친 일이 있다. 청나라때 <<명사>>를 작성하면서,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다수민족인 한족을 통치하는 것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특히 많은 인민들이 한족황제는 엉망진창이었고, 한족의 자비심이 뼈속까지 스미도록 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기꺼이 노비가 되어 일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주 신경써서 명나라의 역사를 왜곡하고 추화하는 역사조작을 시행했다. 명나라때의 많은 통치업적이나 전승기록등 훌륭한 내용들을 은닉하는 외에, 명나라때의 혹형, 태감, 금의위등의 문제를 크게 과장하여 기록하고, 일부러 명나라의 여러 황제들이 아주 잔폭하고, 황음하며, 멍청하고, 바보였다는 쪽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로, 명무종에 관한 역사기록은 아마도 가장 많이 삭제되고, 가장 심하게 수정한 것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하여 명무종은 아마도 청나라통치자의 이러한 조치로 피해를 가장 심하게 본 황제의 하나가 될 것이다.

 

후세사람들이 명무종을 평가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그는 황음하고 포악했으며, 황당하고 후안무치했다는 것이다. 즉, 혼군이라는 것이다. 명무종은 과연 후세인들의 평가처럼 그러한 사람이었는가? 필자가 보기에, 사실은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명무종에 대하여 재평가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명무종 주후조(朱厚照)는 명효종 주우당의 적장자이다. 1491년에 태어나고, 1506년 16세의 나이로 등극하였으며, 연호를 정덕(正德)이라고 하였다. 그는 16년간 시원시원하게 황제생활을 지낸 후 1521년 사망했으니, 나이 겨우 31세때의 일이다. 역사서의 기재와 소위 민간전설에 따르면, 명무종이라는 사람은 확실히 전통적인 황제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전의 글에 나타난 그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명무종은 기껏해야 사춘기의 반역이나 이유없는 반항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더 심하게 본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황당했을 뿐이다. 역사상의 진실한 명무종은 조정의 정사에 대하여 시종 아주 명확한 인식과 파악과 판단을 지니고 있었다. 군국대사에 대하여도 시종 불같은 열정과 전사와도 같은 높은 투지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역대황제들은 후계자를 선택할 때 일반적으로 모두 "적장자계승제"라는 천고이래의 종법에 따라 처리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연히 정권의 평화로운 과도를 위한 것이며, 황권의 무질서로 인한 다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으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각황조마다 적장자의 신분으로 대통을 승계한 행운아는 극소수였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명나라의 16명의 황제중에서 적장자의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한 사람은 3명 뿐이다. 주후조는 바로 그 3명중의 한 명이다. 다른 두 명은 명인종과 명선종이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생모는 이들이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황후에 봉해진 경우였다. 단지 주후조만이 출생시에 모친이 황후였다. 역시 태어난지 5개월만에 효종황제는 이 영아를 황태자에 봉한다.

 

명무종이 어린아이였을 때, 자질이 빙옥과 같고, 풍패가 늠름했다. 아주 총명하며, 정이 많고, 관대하였다. 그리하여 효종황제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주후조가 8살때부터 정식으로 우량하고 엄격한 황실교육을 받게 된다. 그는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였다. 첫날 배운 과목을 다음 날이면 유려하게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말타고 활쏘는 것도 잘했으며, 여러 방면에 관심이 있었다. 황제와 대신들은 모두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역사기록에 나타난 황제가 된 이후의 명무종의 사적에 대하여는 잘들 알고 있을 것이다.

 

1506년, 명무종이 즉위할 때는 나이가 갓 16살이었으니, 전형적인 소년천자이다. 먼저 "팔호(八虎)" 태감의 우두머리인 유근(劉謹)은 일찌기 명무종의 신임을 얻은 적이 있고, 이후 2,3년간 권세가 하늘을 찔렀고, 위세가 여러 대신들의 위에 섰다. 그러나,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이 유근도 마침내 "팔호"태가중의 하나인 장영(張永)에 의하여 끌어내려지고, 사형을 당한다. 이후 전녕(錢寧), 강빈(江彬)등의 무인들이 명무종의 총애를 받으나, 누구도 유근처럼 조정을 완전히 한 손에 장악하지는 못했다.

 

명무종의 재위기간동안,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파격적인 일을 몇 가지 벌인다: 하나는 일년내내 표방(彪房)에 거주했다. 둘째는 일찌기 변방중진선부(邊防重鎭宣府)를 집으로 삼아서 장기거주했다. 셋째는 조상의 제도에 위배하여 여러번 핑계를 대고 북경을 떠나 사냥을 했다. 이외에 명무종의 임기내에 몇 가지 전쟁은 기억할만하다: 첫째 그는 농민반란을 평정했다. 둘째, 그는 영하 안화왕의 모반을 평정했다. 셋째, 명무종은 친히 군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여 몽고소왕자의 침입활동을 격퇴했다(놀라운 일은 친히 전쟁터에 나갔던 명무종은 혼전중에 몽고기병 1명을 칼로 베기까지 하였다)

 

1521년, 명무종은 표방에서 서거한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 기록상 나와 있는 그에 대한 내용들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기록에서는 핵심내용이 모두 이 황제의 여인관계, 총애를 받던 태감이나 좌우의 몇몇 신하들에 관한 것들이 대거 남아 있을 뿐, 그가 정사를 처리하거나 군사문제를 처리한 것에 관하여는 모호하게 언급하거나 가볍게 짚고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풍류적이고 장난을 좋아하며 기세당당했던 이 명무종은 화진가실(貨眞價實)이었다. 그는 크게 떠들만한 대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그에 대하여 논의하여야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냐의 점이고, 어떻게 하여야 객관적으로 그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냐의 점이다. 혹시, 소위 "표방"이라는 것에서 시작해볼 수는 없을까?

 

이치대로라면, 행운스럽게도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주후조는 확실히 하늘이 낸 귀인일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젊은이는 휘황찬란한 자금성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는 자금성의 서북쪽, 즉 오늘날의 북해공원 서쪽일대에 구속받지 않을 작은 독립된 구역을 건설한다. 그것이 바로 "표방"이다. 표방은 명무종이 창건한 것은 아니고, 원래 귀족들이 호랑이, 표범등의 맹수를 기르면서 보고 즐기던 곳인데, 원나라때부터 이런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정덕2년(1507년)에 표방에 입주하여, 정덕15년(152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곳에 살았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명무종의 자신이 처해 있는 물리적인 공간에 관한 첫번째 포위망돌파였다. 또한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첫번째 포위망돌파였다. 명무종은 자금성내의 각종 규정, 예의등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처럼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자유를 좋아하고, 밝은 성격의 인물에게는 필연적이 결과일 수 있을 것이다.

 

사료로 보면, 명무종은 표방에서 황음무도하고 시녀가 무수히 많았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 남자이든, 16년간 엄격한 황실교육을 받다가 이제 황제가 되어 천하를 한 손에 쥐었다면 남녀간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대황제들의 남녀간의 일을 쓴다면, 명효종등 소수의 황제이외에 어느 황제가 황음하지 않았던가? 되는대로 예를 든다고 하더라도, 건륭황제의 여인은 명분을 가진 사람만 40여명이고, 대외에 정식 명분을 갖지 않은 사람은 더욱 부지기수였다. 그러므로, 주후조와 같이 청춘기의 황제가 남여간의 일에 대하여 보여준 일들은 그가 혼군인지 여부를 따지는데 쓸 수가 없다. 필자는 명무종은  인자한 황제라고 본다. 그가 북경을 나서서 사냥을 하거나 남순을 하거나 출정을 할 때도 사실상 그가 한 일은 민정을 살피고, 군정을 살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후세의 사람들은 엉뚱한 곳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명무종이 표방내에서 향락을 즐긴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을 사람들은 놓치고 있다. 만일 후세인들이 그저 그의 성생활만에 주목한다면, 그리고 황음이라는 단어로 명무종이 표방에서 했던 모든 일들을 개괄하려고 한다면, 명무종의 진실한 이미지는 전혀 객관적으로 파악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명무종에게 있어서, 표방은 그가 편안히 쉬고 향락을 즐기는 집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군정의 대사를 결정하고 처리하며, 대신과 귀빈을 접견하는 장소였다. 명무종이 자금성내로 들어오는 일은 적었지만, 당시에 자주 조회를 열고 정사를 논의하며, 상소에 답했으며,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해주었다. 비록 어떤 때는 조회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의 성지를 보내어 내각으로 하여금 집행하게 하였다. 정덕제때의 일련의 사실을 보면 명무종의 의사결정은 대부분 과단성있고 정확한 것이었다.

 

사실상, 명무종에 있어서, 표방은 그가 표범과 호랑이를 훈련시키면서 담량과 상무(尙武)정신을 기르는 곳이었다. 명무종은 소년때 닭싸움 개싸움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좀 더 커서는 말타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표방으로 옮겨서 거주하면서 건장한 체격을 갖추게 된 그는 호랑이와 싸우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유희는 서양의 투우와 비슷한 것이다. 구별이라면, 무종이 상대한 것이 소가 아니라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맹수였다는 점이다. 무종의 용기와 담력은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대황제중 누가 그처럼 맨손으로 맹수와 싸운 사람이 있는가? 사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겉모습이다. 무종은 어려서부터 명태조 주원장, 영락제 주체의 뛰어난 무공을 흠모했고, 오랫동안 이 두 사람의 선조를 본받고자 자신을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전공을 높게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상, 명무종에 있어서, 표방은 명무종이 티벳불교를 연구하고 수행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명나라때 황제는 태조와 성조가 불교를 존중한 이래로 이후의 황제들도 모두 불교를 숭상했다. 명무종은 더욱 신봉하였고, 총명하고 공부하기 좋아한 명무종은 티벳불교에 대하여 특수한 호감이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첫째는 학술적인 흥취와 종교신앙과 관련되기도 했고, 둘째는 이러한 학습이 왕조가 티벳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명무종은 티벳어를 배웠을 뿐아니라, 티벳경전을 낭송할 수 있었다. 여기에도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주 표방내에 티벳불교의 승복을 입고 티벳불교를 수련했다. 물론 적지 않은 티벳의 승려들도 접견했다. 이를 보면, 명무종은 드물게 불학에도 정통하고 외국어에도 능한 황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무종은 성격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매일을 하루같이 정사를 돌보는 것이나 올해나 내년이나 같은 일을 하는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2차, 제3차, 제n차의 물리공간 및 정신공간으로부터의 돌파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북경바깥으로 나가서 사냥을 하기도 하고, 민간에서 놀기도 하고, 백성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며, 변방에 시찰을 가기도 했고, 주요군사요새를 지키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진국공(鎭國公)", "위무대장군(威武大將軍)"에 봉하고 군대를 친히 이끌고 번왕의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조정의 규정이나 예법에 어긋나는 것들이었다.

 

그의 대신들은 당연히 재삼 그의 이러한 "격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하여 불만과 항의를 나타냈다. 명나라때 황제와 대신의 관계는 미묘했다. 그들간에는 상호협력과 상호견제기능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상소문을 가득 써서 수레로 실어 황제의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수도없이 명무종이 정도를 벗어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체통을 상하는 일은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500년전의 신인류인 명무종은 젊기는 하였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자기 주관이 분명했다. 그리고 대신들과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많은 경우에 그는 하고싶은대로 했지만, 사직중신들과 굳이 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명무종은 그저 태극권의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원리를 이용해서 대신들의 직격을 피했다. 그저 원칙과 임기응변을 겸비하는 것으로 여러 대신들의 포위를 돌파했다. 명무종은 머리를 굴리면 계책이 나오곤 했다. 그는 대신들과 진정으로 부딛치는 것이 아니고, 가볍게 타협하는 거도 아니면서 자기의 방식을 실현하였다.

 

사실,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본성이 순후한 명무종은 대신들이 귀찮기는 하여도, 그들이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명무종은 마음 속으로는 이런 대신들을 좋아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비록 명무종이 많은 경우에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명나라때의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절대 언론을 막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구품의 말단관리나 일반백성의 말이라도 그들이 직언하고 건의하고 공격하도록 놔두었다.

 

명무종이 변방의 요지인 선부를 순시한다는 결정은 일정한 정도에서 그의 포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몽고의 소왕자를 만난다. 명무종은 즐겁게 군사를 배치하고, 명나라의 일부군대가 포위당하려는 위기에 처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두 군대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전투는 아주 격렬했다. 명무종의 5,6만군대와 소왕자가 이끌고 온 5만의 기병은 각자 장점을 살려서 상대와 격전을 벌였다. 쌍방은 크고 작은 100여번의 전투를 하였고, 그동안 명무종은 보통사병과 함께 먹고 잤다. 더욱 장병을 격려한 것은 명무종이 황제의 신분으로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친히 몽고기병 1명을 베어서 말에서 떨어뜨렸다는 점이다. 황제폐하가 이처럼 용감한데, 그 아래 병사들이 어찌 용감하지 않겠는가. 전체 병사들이 어찌 더 힘을 내지 않겠는가. 결국 소왕자는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 대승을 거둘 때, 명무종은 태조 주원장, 영락제 주체를 생각했을 것이고, 약 70년전의 토목보의 변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번 전투를 통하여 그는 마침내 명황조에서 오랫동안 앙금으로 남아 있던 것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이것은 통쾌한 일이다. 아마도 이것은 명무종의 또 한번의 돌파였을 것이고, 가장 멋진 돌파였을 것이다.

 

이 전투이후, 몽고인들은 오랫동안 다시는 남하하지 못하였는데, 바로 이 전투의 효과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역사서에 기재된 것은 이렇다는 것이다: 명나라군대 사망 52명, 몽고군 사망 16명. 무종이 친히 1명을 죽임. 생각해보라 이런 규모의 격전에서 쌍방이 어떻게 이 정도의 인원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이것은 당시의 진실한 전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몽고인들이 겨우 이 정도의 손실만 입었다면, 그들의 강퍅한 기병부대가 어찌 쉽게 물러갔을 것인가.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역사서에서 명무종에 대한 기재는 상당히 왜곡되고 추화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일생동안, 명무종 주후조의 몸에는 아주 활발한 생명의 활력이 있었다. 그는 생명의 즐거움과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개성있게 전통에 대한 돌파와 해방을 숭상했다. 그의 머리 속에서 뛰어다닌 것은 새로운 사고의 불꽃이었다. 명무종은 아마도 진나라이래로 중국의 모든 황제중에서 천부적인 자질이 가장 뛰어나고, 개성이 가장 선명한 황제일 것이다. 그가 전투중에서 보여준 영웅스런 모습은 명나라의 모든 황제들이 갖추고 있던 절대 타협하지 않는 굳강한 의지와 철골을 보여준다. 명무종의 이러한 행적은 청나라 황제들의 질시를 받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역사서에서 할수 있는만큼 추화시켰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실 명무종은 절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같은 타락하고, 멍청하며, 쓰레기같은 군왕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그는 활력있고, 격정적이며, 포부있고, 담량이 있으며, 모략이 있던 황제였다. 과단성있으면서도 관용스러운 개성이 분명한 황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