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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하건(何健)이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친 연도는?

by 중은우시 2007. 4. 8.

작자: 미상

 

소산(韶山)의 적수동(滴水洞)은 독특한 자연풍경과 정치배경으로 일찌기 아주 신비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적수동의 신비로운 면사가 걷어졌고, 이미 유명한 관광명승지로 되었다.

 

소산의 적수동에 가서 관광을 하다보면, 그 중의 한 유명한 장소가 여러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그것은 적수동의 우측 숲속에 있는 호헐평(虎歇坪)이다. 모택동의 조부인 모익신(毛翼臣)의 묘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조부의 묘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호남군벌 하건이 병사를 파견해서 모택동의 조부묘를 파헤친 사건을 연상할 것이다?

 

이 사건은 어느 해에 일어났는가?

 

길림인민출판사가 출판한 <<모택동생평실록>>(오홍, 오화 편저: 1992년 5월판, 8페이지), 호남문예출판사가 출판한 <<모택동과 그의 부로향친>>(조지초 저, 1992년 5월판, 8페이지), 경관교육출판사가 출판한 <<모택동과 고향>>(문열심 저, 1991년 3월판, 제53페이지), 서원출판사가 출판한 <<모택공고토가족탐비>>(고국촌등 저, 1995년 9월판, 제80페이지)등의 저작에는 모두 하건이 병사를 파견하여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진 시간을 1930년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호남문예출판사가 1993년 3월에 출판한 <<소산의 어제와 오늘>>(유건국등 저, 제12페이지)이라는 책에서는 1932년 6월로 적혀 있다.

 

그리고, 1996년 10월, 강소문예출판사가 출판한 <<모가형제와 하가자매>>(운정, 장소란 저, 제6페이지)라는 책에는 이 일이 1934년 가을에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

 

인민출판사가 출판한 <<모택동가세>>(이상문 편저, 1993년 2월, 제3페이지)에는 1934년전후에 발행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건이 병사를 파견해서 모택동이 조상묘를 파헤친 사건은 그저 1번 발생했을 뿐이다. 그런데, 위의 책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1930년, 어떤 사람은 1932년 6월, 어떤 사람은 1934년 가을, 어떤 사람은 1934년전후라고 얘기하고 있다. 도대체 어느 주장이 정확한 것인가?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먼저 호남군벌 하건이 병사를 소산으로 보내어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게 된 원인부터 알아야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모택동생평실록>>과 <<모택동가세>>라는 두 권의 책에는 모두 상세히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소산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원래, 당시의 국민당 호남성주석, 국민당군대 제4로군 총지휘관인 하건은 여러번 병사를 파병하여 호남, 강서일대의 홍군을 토벌했다. 그러나, 모두 모택동이 지휘하는 홍군에게 패배했다. 그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팽덕회가 지휘하는 홍군은 그의 주력부대가 장사에게 멀리 떠나 상남으로 계계(桂係)부대를 추격하는 틈을 타서, 평강, 유양일대에서 돌연 출현하여 일거의 그의 몇개 연대병력을 섬멸해 버리고, 장사를 점령하였으며, 그의 성정부와 제4로군총지휘부를 불태워버렸다. 그리하여 하마터면 그의 목숨까지 잃어버릴 뻔했다.

 

하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군은 장비도 뛰어나고 훈련도 잘되어 있는데, 왜 긴창과 조총을 든 진흙발의 오합지졸을 이기지 못하는가? 강경책도 써보고, 유화책도 써봤지만, 도대체 해결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장개석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장사를 회복했다. 장사로 돌아온 후 그가 생각한 첫번째 일은 역시 어떻게 하면 홍군을 토벌할 것인지였다. 이날 그는 결의형제인 오개남(吳凱南)을 찾아가서 상의했다.

 

오개남은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기 모택동의 조상묘에 관한 전설을 들었다. 마치 거기에서 모택동을 이길 좋은 계책을 찾은 것처럼 생각했다. 하건이 친히 찾아와서 대책을 협의하자, 바로 그를 도울 큰 기회라고 생각해서 급히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이 이끄는 홍군이 창궐하는 것은 절대로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몰래 도우기 때문이다. 나는 일찌기 호남은 제왕장상의 땅이라고 들었다. 요임금이 남순할 때 바로 소산에서 소악(韶樂)을 연주한 적이 있으니, 그 땅은 비범한 곳이다. 이를 제외하고도 모택동의 할아버지가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데 그 땅은 장룡와호(藏龍臥虎)의 땅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 후예는 크게 성공하고 조상을 빛낸다고 했다. 모씨집안이 좋은 땅의 영기를 얻었는데, 우리가 그들의 용맥(龍脈)을 끊어버리고, 조상묘를 파헤치는 것이 좋겠다. 모택동이 조상묘때문에 일어선 것이니, 이렇게 하면 후환이 무궁할 것이다. 몇사람을 소산으로 보내서 풍수를 잘라버리는 것이 좋겠다"

 

하건은 '풍수명당'의 다른 상황에 대하여 하루종일 물어본 후에야, 비로소 크게 깨달음을 얻은 것같았다. 오개남의 계책이 교묘하다고 칭찬해주고, 즉시 밀명을 총지휘부 부관장인 웅사정(熊士鼎)과 특무대장인 공중손(일명 공수)에게 내려서, 1개연대를 이끌고 소산으로 가서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도록 하였다.(<<소산의 어제와 오늘>> 제12-13페이지)

 

고증에 의하면, 하건이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게 된 원인은, 실제로 위의 상황에 기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위의 설명에 의하면, 하건이 조상묘를 파헤지게 된 것은 팽덕회가 군대를 이끌고 장사를 점령한 것과 관련있다.

 

<<팽덕회자술>>과 호남출판사가 1991년 4월에 출판한 <<홍군장사공격>>등의 저작에 따르면, 팽덕회는 두번에 걸쳐 장사를 공격했다. 첫번째는 1930년 7월 25일이다. 이 전투에서 병력수에서 4:1인 상황에서 8천명의 홍군은 3만여명의 국군을 무찌르고 장사를 점령했다. 이번 전투는 홍군시기에 유일하게 성회(省會, 성정부 소재지)를 점령한 전투이고, 홍군 초기역사상 유명한 전투이다.

 

1930년 8월 23일, 홍군의 제1, 제3군단은 계획대로 호남 유양현 동북의 영화시에서 만났다. 그리고 양군단의 전위연석회의를 개최했으며, 당의 총전위를 조직했다. 당의 총전위회의에서 제2차장사공격이 결정되었다. 장사의 수비군이 준비를 철저히 하고, 견고히 방어벽을 쳤으므로, 점령하지 못했다. 9월 12일, 국군이 장사를 견고히 지키고,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는 것을 보고 홍1방면군은 장사의 포위를 풀었다. 팽덕회는 3군단을 이끌고 호남동부, 강서서부로 진격했다.

 

홍1방면군이 장사를 떠난 후, 하건은 보복을 실행했다. 그는 갖은 계책을 써서 반도를 매수하고, 특무로 하여금 공산당원을 체포하도록 하여, 당의 지하조직을 파괴했다. 1930년 10월하순의 어느 날, 모택동의 처인 양개혜가 체포되었다.

 

양개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국내여론을 들끓게 하였다. 일부 지식인들은 전보를 보내어 양개혜를 석방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하여, 하건은 아주 놀랐고, 빨리 독수를 쓰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11월 14일(음력 9월 24일)아침, 양개혜는 형장으로 보내어지고, 오후 1시 잔혹하게 장사 유양의 문외식자령에서 살해된다.

 

이뿐아니라, 하건은 1930년 12월, 국민당 15, 16, 31사단에 명령하여, 호남, 호북, 강서의 혁명근거지에 대하여 제1차 토벌작전을 벌인다. 이로 인하여, 많은 역사연구가들은 하건이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친 것을 1930년전후로 보고 있다.

 

1993년 10월, 중원농민출판사의 <<모택동가서>>(사유청 편, 제163페이지)라는 책에는 모택영(毛澤嶸)의 회고를 담고 있다. 모택영은 하건이 병사를 파견하여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친 시간을 "민국19년의 가을"이라고 하고 있다. 모택영의 조부인 모덕신과 모택동의 조부인 모익신은 친형제간이다. 모택영은 1897년 5월 26일에 태어났으며, 모택동보다 4살이 어렸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하건이 병사를 파견하여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친 사건은 1930년에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1911년 10월 신해혁명후 1912년 1월1일에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으므로, 민국19년은 바로 1930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건이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도록 명령받은 국민당 군통국 상참특무대장 공중손이 제공하는 내용은 모택영의 것과 다르다.

 

공중손은 1890년 장사현에서 출생한다. 그는 원래 혁명군에 참가한 수공업자였다. 1927년 대혁명실패후, 국민당에 들어가고, 호남성 '반공'법원정집대 제1조조장, 호남청향사령부 정집대 제3조 조장, 국민당 제4로군 총지휘부 특무대장, 호남성 보안처 정집대장, 군통국 상참 특무대장을 지냈다. 그는 두 손에 공산당원과 진보인사의 선혈을 가득 묻혔다.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에 그는 호남성 총공회위원장 곽량을 암살한다. 하건의 지령을 받아, 특무를 이끌고 소산으로 가서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친 것고 그이다.

 

1949년 5월, 그는 체포된 후, 유관부서에서는 그의 범죄사실에 대하여 상세한 조사와 심리를 했다. 그의 진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32년 초여름, 강서중앙홍군이 국민당 제3차대규모 '토벌'을 분쇄했다. 혁명군의 기세가 커지게 되자, 국민당에서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민당 호남성정부주석인 하건은 더욱 근심이 컸다. 특히 두번에 걸쳐 장사를 잃은 것으로 인하여 장개석의 질책을 받았다. 장개석의 환심을 사고, 원한을 풀기 위하여 1932년 6월, 국민당 제4로군 총지휘부 부관장 웅사정과 특무대장 공중손에게 지시하여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게 하였다.

 

1932년 6월 29일밤, 하늘은 어둡고 바람은 높았다. 웅사정과 공중손은 십여명의 특무대원을 이끌고, 상담현정부 보안대의 수십명 사병과 만나서 소산으로 몰려갔다. 사전에 그려진 지형도에 따라,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친다. 그러나 소산의 군중들이 하건의 계획을 미리 알아차리고, 약간의 보호조치를 취하여 모택동의 조상묘는 액운을 벗어난다.

 

공중손의 진술과 다른 고증에 의하면 모택동의 조상묘가 파헤쳐진 시기는 1932년 6월 29일밤이라고 단정할 수 ㅇㅆ다.

 

그리고 어떤 전문가는, 1932년 6월에 장개석은 중앙소비에트지구에 제4차 '토벌'을 발동하였다. 홍8군과 상남차릉독립단은 소극의 지휘하에 영웅적으로 싸웠고, 국민당 63사단의 후송부대와 증원부대를 섬멸했으며, 부여단장이하 500여명을 전사시켰고,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장개석의 전령에 따라, 하건은 63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5월 28일, 상군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방대한 운수부대를 조성했다. 호남,강서혁명근거지의 군민은 제4차토벌에 대항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1년여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항하에서 하건은 아마도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칠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호남출판사가 1991년 7월에 출판한 <<호남인민혁명사>>에 의하면, 대혁명이 실패한 후, 백색공포가 호남의 대지를 뒤덮었다. 1928년 "서정군"이 호남에 들어온 후, 국민당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대규모의 '청향(淸鄕)'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해의 4월 27일에는 호남전성청향독판서를 성립시키고, 11월말에는 노탁평이 하건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청향독판서를 취소시킨 바 있다. 1929년 2월 하건이 호남을 장악한 후 다시 회복시키며, 3월부터 전성청향사령부로 이름을 고친다. 하건은 청향사령관을 맡는다.

 

1930년 7월, 팽덕회가 제1차장사공격때, 하건은 홍군은 장사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홍군이 일거에 장사를 점령하고 하건도 하마터면 체포될 뻔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아주 통한으로 생각하였다.

 

1930년 8월, 홍곤의 제2차 장사공격때, 비록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하건의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 내부갈등까지 겹쳐 그는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1931년 1월 28일, 하건은 호남의 군대와 각급 행정기관의 식량공급마저 아주 곤란한 상황하에서 특히 급전을 보내어 장개석에게 구호자금을 요청한다. 장개석은 국고에서 10만위안을 제공하기로 동의하였으나, 오랫동안 내려보내지를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하건은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비록 상군을 국민당군의 1931년 4월의 호남,강서혁명근거지에 대한 제2차 토벌, 1931년 11월의 제3차 토벌, 1932년의 제4차 토벌을 진행한다. 그러나 하건의 마음 속에는 홍군이 장사를 공격한데 대한 보복을 하고자 하고, 특히 어떻게 그의 호남에서의 권력을 공고히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려는 계획은 복잡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 많은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고, 그저 사람들에게 지시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전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33년 10월이 되어, 장개석은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하여 제5차 토벌을 진행하는 동시에 6개사단, 6개여단 및 16개 보안단의 병력을 이끌고 호남,호북,강서의 근거지에 대하여 제5차토벌을 진행한다. 이때 특히 1934년 1월, 하건은 친히 4개사단과 3개여단을 이끌고 호남, 강서변경의 강서 동고현 유거일대에서 대포위망을 펼친다. 이후 병사를 이끌고, 강서성 수수현, 봉신현, 의풍현등지에서 홍군을 토벌한다. 1934년 10월 홍군이 포위망을 뚫고 장정에 돌입하며, 하건은 이때 다시 홍군의 길을 막는다. 호남각지에서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정책을 실시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하건은 1934년경 병사를 이끌고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게 하였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모택동가서>>에서 하건이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친 것이 1934년 전후라고 적고 있고, 그 근거를 모택동의 당제인 모택연(毛澤連)등의 구술에 따른 것인데, 이것은 분명히 기억착오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