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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팔대후통(八大胡同)

by 중은우시 2007. 2. 28.

글: 고성(高星)

 

기원(妓院)의 역사는 거의 인류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먼 옛날부터 시작한다. 신성한 황권에 빛나는 궁중의 후원에서부터, 권력과 재물아래 희생되는 시정의 거리에까지 어쨌든 모두 홍분녹영(紅粉綠影), 풍진설월(風塵雪月)은 있었다. 어디서건 음악추루(淫惡醜陋), 신산혈루(辛酸血淚)의 이야기가 있었다.

 

원, 명, 청의 북경은 권문세가와 부자 그리고 문인 사대부들이 운집하던 곳이었으며, 기원이 성장하는데 풍부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 각종 유형의 기원이 나타났고, 계속되었다. 일찌기 기원들은 동성구(東城區)의 구란후통(勾欄胡同, 현재의 內務部街), 송꾸냥후통(宋姑娘胡同)에 몰려있었으므로, 이런 후통(북경의 골목)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그 때는 아직 공창(公娼), 사창(私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청나라 광서제 경자년이후 경사경찰청(京師警察廳)은 내성의 기원을 모두 성밖으로 옮겨가게 한 후, 영업허가증을 발급하고 공개적으로 영업하도록 허락하였다. 당시 관청의 허가를 받은 기원은 모두 373개였는데, 모두 네 개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등급[소반(小班), 원래 이름은 '당(堂)'이며, '대지방(大地方)'이라고도 함] 78개, 2등급[차실(茶室), 원래 중지방(中地方)이라고 불렀다]이 100개, 3등급[하처(下處)라고 한다]이 172개, 4등급(원래 '소지방(小地方)'이라고 불렀다)이 23개였다. 이때는 박흥(博興)후통, 유수위(留守衛)후통, 서직문외 백방자(白房子), 황토경(黃土境), 앵도사가(櫻桃斜街), 속모(束茅)후통등이 기원이 있던 곳이다.

 

예전에는 전문의 주시구(珠市口)일대가 상업지역이었고, 각종 점포가 줄줄이 서있으며, 말과 가마가 줄을 이었으며 번화하고 온갖 것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래서 이 곳도 기원이 운집한 곳이 되었다. 그중 1등 소반과 2등 차실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 전문(前門) 바깥의 팔조(八條, 여덟개)후통이었다. 이 곳을 '팔대후통'이라고 불렀다. 왕광복사가(王廣福斜街, 현재의 종수사가), 섬서항(陝西]巷), 피조영(皮條營, 지금의 동서벽영후통), 한가담(韓家潭), 석두(石頭)후통, 연지후통, 백순(百順)후통과 사모(紗帽)후통(지금의 대, 소력후통)이 여덟개의 후통이다.

 

소위 "팔대후통"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섬서백순석두성, 한가담내반가생, 광광사가연지분, 감정습정외랑영". 그리고 팔대후통의 주위에 "10조(10개)"라는 설도 있다. "왕채주백류, 석광화연사". 여기서 '왕'은 '왕피후통', '채'는 '채가후통', '주'는 '주가후통', '백'은 '백순후통', '유'는 유수위후통(지금은 주가후통에 합쳐짐), '석'은 '석두후통', '광'은 '왕광복사가', '화'는 '화신묘협도(지금의 청풍협도), '연'은 '연가후통', '사'는 '사모후통'을 말한다. '팔대후통'이건 '십조후통'이건간에 모두 기원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북경의 각지역의 인력거꾼들은 그저 '십조'라고만 하면 인력거꾼은 전문 바깥의 팔대후통의 기원으로 갔다.

 

기원의 건축은 일반적으로 삼합원, 사합원이다. 좀 더 신경을 써서 지은 곳은 2층식의 중국식과 서양식을 합친 벽돌과 나무구조를 지닌 집이었다. 하등의 기원은 부서져가는 집에 구석진 골목에 있었다. 전문 바깥의 신조후통6호는 예전의 '굉경루(宏慶樓)'였으며, 일(日)자형으로 지은 집의 전원은 식당이고 뒤는 기원이었다. 가운데에는 거대한 천경을 두어 아주 호화스러웠다. 2층 난간의 나무치마(木裙)장식은 거의 기원의 특징으로 되었다.

 

1등기원은 청음소반(淸吟小班)이라고도 불렀다. '청음'이라 함은 기녀들의 대부분은 소주, 양주 또는 항주에 소속되어 있어,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악기와 노래를 잘 다루고, 또한 수묵과 단청에도 뛰어나고 서예와 시사에도 뛰어났다. 그리하여 기녀로서는 장점이 많았다. 북경에서도 여자아이를 어려서 소주항주로 보내서 몇년간 현지 말을 배우게 하고, 크면 다시 '팔대후통'으로 올라오는데 이렇게 하면 '청음'이라는 브랜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반의 집 문 위에는 유백색의 전등을 걸어두었고, 등에는 붉은 글자로 상호를 쓰게 된다. 문에는 동패를 걸어 흑칠로 '1등'이라는 두 글자를 썼고, 문에는 홍록색의 비단을 걸어서 양쪽으로 늘어뜨렸다. 어떤 기원은 그 기원의 기녀의 화명(花名)을 걸어놓기도 했다. 고급기녀는 혼자서 집 하나를 차지했고, 시녀도 두었다. 집안에는 아주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홍목가구, 차탁, 팔선탁, 태사의, 식탁, 마작상, 화장대가 있고, 위에는 다기, 연구(煙具, 담배피우는 도구), 모자통, 악기등의 물건을 놓아두었다. 벽에는 사진과 명사들의 서화를 걸었고, 안쪽에는 청동으로 만든 침대에 비단금침을 깔고, 수놓은 커튼을 두었다.

 

2등기원은 차실이라고 하는데, 문장식은 1등기원에 비하여 손색이 있고, 진열하는 물건도 약간 떨어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녀들이다 특히 연령, 자색, 재주등의 측면에서 떨어진다.

 

3등기원은 더욱 간소하다. 집도 좁고, 침대도 그냥 온돌이다. 대부분은 주시구대가의 남북 양측에 있었다.

 

4등기원은 토연(土娟)이라고도 부른다. 전문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화지(花枝)후통, 연화하(지금의 영광후통), 사성후통, 소관후통(지금의 호경후통), 황화원(지금의 신생항), 서직문외 황토갱등이다. 여기의 기녀는 대부분이 나이든 여자이거며, 상등기원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이곳을 들르는 사람도 대부분 저급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일부 비공개 또는 반공개의 기원이 있는데, 이 곳은 "반엄문(半掩門, 반쯤 가린 문)" 또는 "암문자(暗門子)"라고 부른다. 이곳은 반칸짜리 집이나, 형편없는 곳으로 빈민굴과 같은 곳이며 가장 비참한 유형이다. 일반적으로는 랍피조(拉皮條, 호객꾼)에 의하여 소개받아 오게 된다.

 

당시에는 기원에 여러가지 전문용어가 있었다. 기원은 구중국의 하나의 경관이었고, 어둡고 음습한 팔대후통은 북경역사문화발전의 하나의 무대였고, 옛북경사회의 민속과 풍경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창구였다. 수백년동안 풍우를 겪으면서, 시대가 바뀌고, 정국이 교체되었다. 팔대후통에는 기녀와 황족외척, 군벌정객, 달관현귀, 거상부고, 묵객명류, 명원희자, 악배강과, 유맹타수, 유민탄판, 편자소투, 궁한걸개, 본분백성, 각색인등이 모두 모여들어 다 함께 은원을 만들어갔다. 세상이 변화하고, 생사와 희비가 엇갈리는 이야기가 많이 벌어졌다. 그 중에 원세개의 아들인 원극정은 여기서 바로 황제제도를 되살리려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때에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이 곳에 그림자를 남겼다. 옛날의 경극의 명인들도 이 곳에 족적을 남겼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병을 얻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아편을 피우다 죽기도 했다. 그 중에 이만춘(李萬春)과 유향원(留香園)의 명기 홍옥(紅玉)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우령(優伶)을 두기도 앴다. 이곳에는 이원의 남기(男妓)와 상공도 있었다.

 

섬서항은 주시구서대가의 북쪽에 있고,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다. "팔대후통"중에서 가장 유명한 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후통에서는 두 명의 명기(名妓)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자고이래로 명기가 많았고, 문인사대부는 한편으로는 기녀를 천하게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기녀에 대하여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명기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위진시대의 녹주(綠珠)는 중국역사상의 첫번째 명기라고 할 수 있다. 남제시대에는 시인과의 연정으로 유명한 소소소(蘇小小), 당나라때는 재녀 상관완아(上官婉兒), 당나라때는 백거이와 같이 노래한 관반반(關盼盼), 북송때는 황제(송휘종)와 사랑에 빠진 이사사(李師師), 원나라때의 여시인 이취아(李翠娥), 명나라때 오삼계와 얽힌 진원원(陳圓圓), 그리고 노침백보의 두십낭(杜十娘), 도화선에 피를 묻힌 이향군(李香君), 명나라때의 동소완(董小宛), 유여시(柳如是)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섬서항 52호의 작은 집에는 일찌기 청나라말 민국초기의 명기 소봉선(小鳳仙)이 거주했었다. 원세개를 토벌하려던 채악 장군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기원을 드나들었고, 여기서 북경에 이름을 날리던 협녀(俠女) 소봉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는 지기가 된다. 소봉선의 구명지은에 감사하기 위하여, 채악은 대련을 남긴다. "불신미인종박명, 고래협녀출풍진(不信美人終薄命 古來俠女出風塵, 미인은 박명하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네, 고래로 협녀는 풍진에서 나오는 법)" 그리고 "차지지봉모인각, 기인여선로명주"라는 글도 남겨서 그녀를 삼국지의 소교와 당나라때의 홍불에 비겼다. 1900년대의 영화 <<지음>>이 상영되면서 소봉선의 이름은 더욱 떨쳤다.

 

지금의 52호의 회색집은 이미 보통민가로 바뀌었다. 문을 열면 오른쪽으로 2층짜리 작은 집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소봉선이 거주하던 곳이다. 사실 다른 1등기원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으나, 당시 소봉선이 이곳에서 있었으므로 약간은 가꾸어 놓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발아래에는 몇개의 돌판이 있어 옛날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쇠로 된 계단난간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예전이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르락거렸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작은 문위의 편액은 이미 회색흙이 묻어서 더이상 예전의 상호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섬서항내의 제이여관은 예전에 운길반 금화관의 옛자리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소봉선과 채악이 '지음'이 된 이야기는 바로 이곳 이층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다고 한다.

 

섬서항의 최북단의 동쪽에는 작은 후통이 하나 있는데 유수항(楡樹巷)이라고 한다. 제1호원은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서양식 집이다. 이 곳은 또 다른 명기 새금화(賽金花)가 살던 곳이다. 과거에는 이춘원(怡春院)이라고 불렀다. 2층 한가운데가 바로 예전에 새금화가 거주하던 방이다. 새금화는 부채운(傅彩雲)이라고도 부르는데, 원래 소주의 명기였다. 그녀는 일찌기 학사인 홍균을 따라 영국, 독일등을 방문했고, 홍균이 죽은 후에는 다시 상해로 가서 기원을 차렸다. 광서24년에 북경으로 왔고, 이곳에서 거주했으며 금방 북경에 명성을 날렸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였을 때, 그녀는 독일군사령관과의 교분을 이용하여 백성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만년의 새금화는 아주 비참했다. 그녀는 천교 서쪽의 거인리 16호에 거주하였는데, 종일 불경을 외었다. 죽은 후에는 도연정에 매장되었는데, 이고선(李苦禪)이 돈을 모으고 제백석(齊白石)이 묘비를 썼다. 청나라때의 오연인이 저술한 <<새금화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은 집을 살펴보면, 서양색채가 농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전 주인이 서양을 다녔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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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대후통]

 

북경의 후통은 소털처럼 많다. 그중에서도 팔대후통은 중국과 외국에 그 명성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당시 이곳은 화류계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팔대후통"은 서주시구대가의 북쪽 철수사가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로: 백순후통, 연지후통, 한가담, 섬서항, 석두후통, 왕광복사가, 주가후통, 이사모후통이다.

 

사실, 북경사람들이 말하는 "팔대후통"은 이 여덟개의 골목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문바깥의 대산란(大珊欄)일대를 의미하는데, 이 여덟개의 거리외의 후통에도 백여개의 작은 기원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단지 당시에 이 여덟개의 후통에 1등, 2등기원이 많이 있었고, 기녀의 등급이 높았으므로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북경성의 기원은 약간의 등급이 있었다. 최초의 기원은 대부분 북경성내에 있었는데, 대부분이 관기(官妓)였다. 현재의 동사남대가로(東四南大街路)는 명나라때 관기의 소재지였다. 예를 들어 연악(演樂)후통은 관기들이 음악을 공부하던 장소이다.

 

내무부가는 명청시대에는 구란(勾欄)후통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기녀들이 난간을 붙잡고 노래를 부르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후 "구란"은 기원의 별칭으로 된다. 명청시대에 관리들이나 돈있는 사람들이 연회를 베풀때 기녀들이 술을 따르고,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을 "쟈오탸오즈(叫條子)"라고 했다. 기녀들의 입장에서는 "츄탸오즈(出條子)"라고 했다.

 

청말민국초가 되면서, 기원은 주로 전문외대가에 몰리게 된다. 이유의 하나는 내성에 가까웠으며, 관리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었고, 둘째는 이 곳에 기차역이 있어서 남북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았고, 셋째는 전문외대가는 북경의 유명한 상업거리로 상당히 번화하였고, 넷째는 이 일대에는 희원자(戱園子), 차관, 주루등이 집중되어 있어, 먹고마시고 노는 것이 일체로 될 수 있었다.

 

1930년대말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팔대후통"에 등기하여 영업허가를 받은 기원은 모두 117개이고, 기녀는 모두 750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물론 이는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간판을 건 것을 말하고 "야기(野妓, 무등록기녀)"나 "암창(暗娼, 숨은 기녀)"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북경의 기녀는 "남반(南班)"과 "북반(北班)"으로 나뉘었다. 일반적으로 "남반"의 기녀는 주로 강남일대의 여자이고, 수준이 높았으며 인물이 뛰어났을 뿐아니라 재주도 뛰어났다. 이런 기녀들은 주로 고관이나 부호들을 모셨다. 북경의 명기 새금화, 소봉선등이 그녀들이다. "북반"의 기녀는 황하이북지구의 여자들이 위주인데, 용모는 괜찮으나 문화수준은 좀 떨어졌다. "팔대후통"의 기녀는 "남반"이 많았고, 그래서 1등, 2등기원이 많았던 것이다. 다른 지역의 기원에는 대부분이 "북반"이었다. 당시 북경성에서 관리를 지내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남방사람이 많았고, 그리하여, "팔대후통"은 고관부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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