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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때는 왜 귀족들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가?

by 중은우시 2006. 11. 3.

당나라의 역사서적을 보면 비교적 독특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귀족들이 공주를 처로 맞으려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당나라때의 정사, 필기에 기록들이 있는데, 여기서 두가지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구당서>>권147<<두우전>>부<<두종전>>을 보면, "(헌종의 장녀 기양공주가 부마를 뽑을 때) 재상을 시켜 사대부가문의 글을 알고 풍모가 있는 선비를 뽑으려고 하였으나...모두 사절하고 응하지 않았다"

 

<<동관주기>>권상에는 선종의 딸인 만수공주가 시집갈 때 황제가 백민중을 시켜 고르게 하였고, 백민중은 상문의 아들인 정호를 점찍었다. 공주와 결혼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은 정호는 백민중에게 깊은 원한을 가졌다고 되어 있다.

 

당나라때 선비들이 공주를 취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략 다음의 세 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복상(服喪)의 예에 관한 규정이다. 당나라때의 규정으로는 처가 죽으면 남편은 1년간이 복상기간이다. 그런데, 공주를 취하면 그 남편은 3년간의 복상기간을 지내야 한다. 당문종때 두종이 일찌기 이런 문제에 맞닥뜨린 적이 있다. "부마는 공주를 위하여 3년의 상을 지내야 하니 선비들이 공주를 취하기를 꺼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둘째, 문벌관념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당나라때 특히 초당과 중당때에는 문벌이 중시되었다. 당나라에서 가문이 좋다는 것은 권력이 크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양호한 문화전통과 가법과 가풍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인척관계를 가진 것을 말한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당나라의 이씨황실은 가장 높은 권세를 가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문화전통이나 가풍의 측면에서는 많이 떨어졌다. 이런 점에서 특히 산동의 문벌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씨 황실은 원래 돌궐출신이고 한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족문화에서도 이씨황실은 한족의 대성문벌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혼인관계에서도 이씨황실은 돌궐의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여 지나치게 자유로웠고, 심지어 방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당나라에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 26명의 공주가 개가하였다. 그 중 안정공주, 제국공주는 3번 시집간다. 당태종은 동생의 처인 양씨를 취했고, 당고종은 부친의 궁중재인인 무측천을 황후로 삼았으며, 당현종은 며느리인 양옥환(양귀비)를 취했다. 무측천은 공개적으로 면수(남총)를 모집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닌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당나라때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에서는 황실의 이런 행위를 멸시하였다.

 

이씨황실의 산동문벌귀족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한편으로 억제하면서 한편으로 부러워 하였다. 당나라를 건립한 후 바로 최씨등 산동문벌을 압박했다. 동시에, 이씨 황실은 양호한 문화전통과 가풍을 지닌 집안과 혼인을 원했으나, 자주 거절당했다. 그래서 문벌귀족들은 딸을 황실로 시집보내기도 원하지 않았고,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셋째, 적지 않은 공주들은 부도를 지키지 않았다. 당나라때 공주들은 사치, 교만, 방봉으로 유명했고, 전횡, 음탕으로 유명한 자도 적지 않았으며, 질투가 심하고 잔혹했던 자도 있었다. 공주들이 부도를 지키지 않는 경우는 그리고 적지도 않았다. 이것은 역대황조에서 비교적 드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