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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골든트라이앵글(金三角)의 국민당 잔군

by 중은우시 2007. 4. 4.

글: 신화네트워크

 

1. 전문

 

골든트라이앵글은 북쪽은 중국-버마국경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사르온강, 남으로는 태국의 치앙마이, 치앙라이지구, 동으로는 메콩강 라오스수림에 이른다. 하나의 뒤집어진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넓이는 20만평방킬로미터이다. 전세계 마챡의 주요한 생산기지로 유명하다. 그러나, 골든트라이앵글 민속촌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볼 수 있다.

 

아주 잊혀져버린 한 무리의 중국인.

그들이 이국땅에서 승전을 해서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그들이 이국땅에서 패전하면 죽는 길밖에는 없고;

그들이 이국땅에서 전사하면, 초목과 함께 썩어간다.

 

이런 글자가 마약상을 기념하는 것인가? 이 태국, 버마, 중국, 라오스에 걸친 지역에 마약을 제외하고 또 무엇을 우리가 볼 수 있는가?

 

2. 전쟁

 

최근 20년을 찍은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골든트라이앵글 민속촌을 유람하는 시작이다.

 

1949년, 마지막 국공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장개석은 패배하여 대만으로 간다. 그러나 대만으로 따라갈 수 없었던 국민당부대는 잔군(殘軍)이 되어, 대륙에 남은 경우에는 개편되기도 하고, 스스로 해산하기도 하고, 혹은 소멸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잔군의 운명은 이러했다. 유일한 예외는 바로 역사와 세계의 이례가 되었고, 골든트라이앵글의 전설을 만들어 냈다. 쿤사와 마약은 여기에서 궐기한다.

 

전체 골든트라이앵글민속촌이 바로 마약상을 기념하는 것인가? 우리가 의문을 가지고 있을때, 가이드가 나타났다. "여러분은 나를 따라오세요" 하나의 작은 문을 지나자, 아주 단아한 복도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흰담장과 검은기와, 맑은 강남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것은 태국식 민가와는 달랐다. 복도를 따라 가지런하게 사진이 걸려 있었다. 먼저 보이는 것은 세 명의 위인 손중산, 모택동, 장개석이었다.

 

이 100미터도 되지 않는 복도에서 우리는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었다. 다시한 번 우리의 앞세대, 그 앞세대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중에서 우리는 함께 전쟁의 시대를 추억할 수 있었고, 골든트라이앵글의 면사를 걷어낼 수 있었다.

 

3. 국군. 고군(孤軍)

 

국군93사단은 바로 국민당이 패전한 후 유일한 예외였다. 1950년, 원강전투후, 국민당의 두 갈래의 잔군은 버마로 흘러들어왔다. 1600명은 합병하여 중화민국부흥부대93사단이 되었다. 그들은 방송국을 만들고, 금방 대만성으로 도망쳐간 국민당과 연락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얻은 회신은 알아서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전군은 통곡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비록 잔군이지만, 그들은 버마정부를 20여년간 머리아프게 하였다. 버마정부는 이 잔군과 수회에 걸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한 후, 유엔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의 선진장비를 보유하고 있고, 10년간의 군벌혼전과 8년의 항일전쟁 5년의 내전경헝을 풍부하게 지닌 부대입니다" 바로 이런 전쟁경험만 가지고도, 버마정부의 용병군단이 어쩔 수 없는 상대였다.

 

가이드가 이 때의 역사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가가대소를 했다. 웃는 중에는 중화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우리가 얘기하는 것이 전쟁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활과는 멀리 떨어진 잔혹한 시대였다.

 

그러나, 이 전군의 휘황한 전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저 "스스로 출로를 해결"하여야 했고, 생존과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1950년, 생존을 위하여 그들은 현지의 아편운송 마방(馬幇)을 호송하기 시작한다. 3천의 인마는 독자적으로 버마정부의 1만2천의 대군을 상대했다.

 

1952년 봄, 버마정부는 많은 돈을 들여, 원래 영국소속 인도국제군단을 사들였고, 건기공격을 시작했다. 이번 공세로 쌍방은 10만의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골든트라이앵글에서 있었던 가장 큰 전투였다. 잔군중에서 많은 병사들이 용병에 의해 죽지 않고, 국민당독전대에 의하여 죽었다. 이때 골든트라이앵글은 무장으로 마악판매를 시작하였다.

 

1961년 봄, 버마는 "메콩강의 봄" 전투를 시작했다. 이는 철저하게 심복의 환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기세는 맹렬했고, 고군은 이로써 골든트라이앵글의 주변국가와 지구로 분산되었으며, 다시 잔군이 되었다.

 

그때, 민속촌에 새겨진 글이 다시 떠올랐다:

 

그들이 이국땅에서 승전하여도 천지가 용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기 때문이다. 대륙에 투항할 수도 없고, 대만으로 갈 수도 없었고, 현지정부에서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국땅에서 패전하면 죽는 길밖에 없었다: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에는 추격군이 있고, 뒤에는 퇴로가 이미 끊겼다. 더욱 용감하게 죽는 길을 제외하고, 그들이 더 영광스럽게 살아갈 방법이 있겠는가?

 

그들이 이국땅에서 전사하면, 초목과 함게 썩어간다: 그들은 이미 잊혀진 중국인이다. 이름도 성도 없다. 그들이 타향에서 재로 변하더라도 아무도 기념해주지 않는다.

 

4. 고군. 잔군

 

여기까지 소개하자, 우리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이곳의 그림 하나하나는 모두 친절하고도 침통했다. 우울하고도 핏줄이 이어지는 것같았다. 시간제한으로, 가이드가 빠르게 소개하는 중에 고군에서 다시 잔군으로 되는 과정을 생략했다.

 

나는 등현 선생이 쓴 <<유랑골든트라이앵글>>을 보았다. 이 책은 내가 이번 여행기를 정리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93사단이 잔군이 된 뒷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메콩강의 봄 전투이후, 유엔의 압력으로, 일부 고군은 대만으로 소환되어 갔다. 남은 각부분은 잔군이 되어 골든트라이앵글에서 비참하게 생존했다.

 

그중 하나는 용병을 조직했고, 라오스정부를 도와 반정부무장세력을 소탕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라오스의 좌. 중. 우의 세 파가 모여서 협상하다가 갑자기 총구를 용병에게 겨눌 줄은.

 

또 다른 주요한 장군인 장소천은 쿤사의 마약판매조직의 단방혁명군에 가입했고, 그들을 현대화된 군대로 훈련시켰다. 그들은 비행기와 미사일을 소유하고, 한때는 전세계 60%, 골든트라이앵글 80%의 헤로인무역을 장악했었다. 이후 크고 작은 여러차례의 전투를 거치다가, 1996년 쿤사와 장소천(張蘇泉)은 버마정부에 항복하고, 쿤사시대는 막을 내린다.

 

또 하나의 부대는 이문환의 제3군과 단희문의 제5군이다. 이들은 자녀를 데리고, 구사일생으로 태국북부의 롱파산맥 원시삼림에 있는 하나의 산골짜기에 부대를 안착시키고 이 곳을 메이스러 '평화마을'이라고 이름붙였다. 쿤사의 투항과 함께 이들은 마지막 남은 잔군이 되었다.

 

우리는 골든트라이앵글의 민속촌 실제로는 "메이스러"의 축소판을 보았다. 구경을 마친 후, 복도와 그 뒤의 마약실, 총탄고, 감옥, 사형수실을 보았다. 우리는 그들의 누추한 거주지를 보았다. 이들이 누추한 정도는 우리의 모든 빈곤에 대한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이전의 빈곤을 설명하자면, 개선된 후의 지금의 상황을 한두개 설명해도 충분히다. 민속촌의 뒷면은 바로 이 민속촌의 모든 메이스러난민들의 거주지이다. 100여평방미터의 집안에 100여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5. 메이스러 - 평화마을

 

이런 빈곤을 대하고 우리는 모두 놀라버렸다. 우리는 비로소 이 신체가 왜소한 가이드가 "단희문 장군"과 "메이스러"를 언급할 때 그렇게 격정적이며 존경하는 듯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장학량장군과 단희문장군을 비교하곤 했다. 단장군은 그들이 마약으로부터 벗어나고, 머리를 들고 사람행세를 할 수 있도록 하게 하였으며, 난민의 신분아래 중국인의 기개를 보류하고 있었다.

 

골든트라이앵글지역에서는 양식을 재배할 수 없었다. 태국으로까지 흘러들어온 최후의 잔군은 간난의 생존환경속에서도 여전히 청빈하고 고상한 생존을 선택했다. 그들은 태국정부와 협상하여, 태국정부가 내란을 평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태국국적을 취득했다.

 

1979년, 그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파당봉을 점령했다. 500의 노병이 출전하여 겨우 절반만 살아돌아왔다. 살아돌아온 사람들도 몸에 중상들을 입었다.

 

1980년 건기에 태국정부는 급히 한인자위대를 조직했다. 이곳저곳에서 800명의 한인 노약병으로 군대를 조직하였고, 이들은 반군유격대에 맞서싸워 이겼다. 그러나, 전과를 빼앗기 위하여 태국 흑호사단은 결사대에 총을 난사했다. 그 후에 비행기로 폭격했다. 결사대는 대다수가 죽고, 겨우 약간의 인원이 도망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용감하고 전투를 잘했던 부대는 30년을 거치면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근30년후에, 등현선생은 고생을 마다않고, 다시 골든트라이앵글을 찾았다. 이런 역사 이런 사람들의 운명은 그의 저작인 유랑골든트라이앵글에서 다시 세상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재가 민감하여, 이 책은 중국대륙에서는 출간되지 못했다.

 

민속촌에서, 우리는 잔군이야기의 마지막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부대의 후인들은 일부분은 태국국적을 얻고, 다른 일부는 난민신분으로 메이스러에서 생활하고 있다.

 

메이스러의 현황에 관하여, 우리의 가이드는 뭐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의 기록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에 의하면, "우리는 국적도 없다. 그저 난민증이 있을 뿐이다. 영원히 이 산을 떠나지 못한다. 그저 노선을 표시하는 '이동증'과 '노동증'을 가져야  하산하여 가이드를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 민속촌을 벗어날 수 없다. 대문만 나서면 태국경찰이 체포한다"

 

모든 동화이야기는 아름다운 결말이 있다. "그래서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메이스러의 이야기는 언제야 이런 행복한 결말을 들을 수 있을까?

 

6. 후기

 

유람이 끝난 후, 가이드는 우리에게 차를 마시도록 했다. 차향은 아주 짙었다. 그러나 아무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문앞의 가이드 차량은 우리에게 바로 다음 관광지로 가자고 재촉하고 있었다. 총총히 몇마디를 나누었다. 가이드는 말했다. 자기는 동북사람이라고. 그러나, 그의 말투에서 동북사투리를 느낄 수는 없었다. 태국에는 현재 중국말을 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지만, 그들이 하는 중국말은 태국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항상 고국을 향했다. 골든트라이앵글의 무덤은 방향이 모두 하나라고 한다. 북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