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남(西南) 지역에는 대량의 국민당 잔여부대가 현지의 토비(土匪)들과 힘을 합하여 인민해방군과 신생정권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에 서남지역은 평안할 날이 없었다.
서남지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하며, 인민해방군은 제3, 4, 5, 18병단 및 제1병단의 제7군등 합계 13개 군부 및 2개 병단의 병력으로 1950년 1월부터, 대규모의 공비소탕전투를 전개했다.
인민해방군의 계속된 토벌작전으로, 운남에 있던 국민당 제8군, 제26군의 산하에 있는 2개단의 잔여부대는 버마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그리고, 현지의 토비이던 장위성, 몽보업, 나성, 오운원등의 부대 500여명도 버마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연합하여, 중국군대가 국경을 넘어가서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약점을 활용하여, 버마북부에 자리잡은 채, 자주 국경을 너머 중국으로 들어와 정부기관과 마을을 습격했다. 그리하여, 현지의 지방정권에 큰 위협이 되어다.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6.25가 발발하면서 국민당의 전8군군장인 이미(李彌)가 버마북부로 가서 잔여부대를 정돈하여, "운남인민반공구국군"을 조직하고 이미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토비부대는 비록 해방군으로부터 여러차례의 공격을 받았지만, 기회만 있으면 변경지역에서 사건을 벌이곤 하였다. 인민해방군이 심하게 조여오면, 국경선을 넘어 버마에 숨어버렸다.
1960년 7월, 대만당국은 특수부대원 400여명을 대만에서 버마북부로 공수했고, 동시에 대량의 장비를 보급해서, 이 토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94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5개군, 15개사단,6개종대, 6개독립단, 3개독립지대 및 소위 하나의 '군구'를 두었다. 이 부대의 주요임무는 중국-버마의 국경선탐사작업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1960년 하반기, 중국-버마정부는 합의를 달성하여 중국군대가 작전임무를 수행할 때는 버마국경선을 20킬로미터 들어갈 수 있도록 합의하였다. 1960년 11월 11일, 해방군전방지휘소가 시쌍반나에 설립되었고, 이후 인민해방군은 국민당버마잔당에 대하여 두번에 걸쳐 국경선을 넘어 작전을 시행했다.
제1차:
시기: 1960년 11월 22일
공격대상: 버마로 도망친 국민당 제1, 제4군, 제2, 3, 5, 6사단 및 그 소속 8개단과 8개행동조, 총병력 약 800여명정도.
전과: 국민당군사살 467명(그중 중위급이상 장교 22명), 60밀리박격포 4문, 기관총 27정, 장단총 247개, 방송설비 7개, 각종가축 289필
제2차:
시기: 1961년 1월 25일 내지 2월 9일
공격대상: 유원린 총부 및 그 소속의 제1, 2, 4군등부, 총병력 약3,150명
전과: 국민당군사살 274명, 81밀리박격포 10문, 각종 기관총 21정, 장단총 330정, 방송설비 4부, 자동차 3량, 가축 73필
두번에 걸친 전투를 통하여 국민당의 버마잔류부대는 대만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두번의 작전에서 인민해방군은 모두 23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중 79명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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