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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중국의 10대 쇠락도시

by 중은우시 2007. 5. 5.

 

10. 창춘(長春, 장춘)

 

창춘은 일찌기 만주국의 수도였다. 건국후에는 중앙정부가 중국최초의 자동차공장을 장춘에 두었다. 창춘은 선양(瀋陽), 안산(鞍山), 다칭(大慶)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의 자랑이었다. 개혁개방이전까지 창춘은 계속 잘나갔다. 그러나, 1980년대이후, 장춘의 자동차공업은 대폭 쇠퇴한다. 나중에 시작한 상하이(大衆), 텐진(豊田), 광저우(本田), 베이징(現代)등의 도시가 외자를 이용하여 장춘을 넘어섰다. 창춘의 "자동차도시"라는 명성은 이미 공허하게 되었다. 창춘의 동북삼성(요녕, 길림, 흑룡강)에서의 지위도 점점 하락하여, 대련, 선양, 하얼빈등의 도시가 창춘을 넘어섰다.

 

9. 쉬저우(徐州, 서주)

 

쉬저우는 역대로 병가에서 반드시 얻고자 하는 요지였다. 비록 쉬저우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쉬저우 사람들의 완강함은 이 도시를 천년간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역대왕조에서마다 쉬저우의 이름은 드높았다. 그러나, 오늘날 쉬저우는 가장 난감한 지경에 처해 있다. 쉬저우의 경제발전은 완만할 뿐아니라, 경제도 거의 오염이 심한 중공업이 주축이다. 이뿐아니라, 쉬저우의 일인당평균수입은 강소에서 아주 낮은 편이며, 쉬저우의 명성은 중국내에서 일락천장의 국면이다. 아마도 청나라초기에 성을 나눌때, 쉬저우를 장쑤(江蘇, 강소)성에 편입시키지 않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쉬저우의 문화는 강남과 전혀 다르고, 현재의 쉬저우는 마치 강남이 버린 아이와 같기 때문이다.

 

8. 뤄양(洛陽, 낙양)

 

뤄양은 일찌기 세계에서 몇 안되는 번영한 도시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재 뤄양은 이미 빛이 퇴색했다. 건국초기에 어떤 인민대표는 하남성의 성회(省會)를 뤄양으로 하자고 주장한 적도 있다. 이렇게 해야 고도의 면모를 일신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때 정저우(鄭州)는 이미 중원최대의 공상업도시로 성장해 있었고, 정저우의 강력한 철도중심도시로서의 장점에 뤄양은 일패도지하고 말았다. 오늘날 뤄양은 중공업도시가 되었다. 비록 GDP는 중부지역에서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도시오염이 아주 심하고, 중국인들의 기억속에는 그저 "낙양의 모란이 천하제일"이라는 이미지밖에 남아있지 않다.

 

7. 렌윈강(連運港, 연운항)

 

렌윈강은 유라시아철도의 동쪽 마지막 역이다. 또한 중국최초의 14개 연해개방도시의 하나이다. 그러나, 20여년이래로, 렌윈강의 항구운송업은 발전이 시종 더뎠다. 이리하여 렌윈강의 도시발전도 정체되었고, 경제발전도 지체되었으며, 렌윈강의 일인당평균수입은 14개 연해개방도시중 꼴찌가 되어버렸다. 렌윈강은 장쑤라는 가장 부유한 성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경제수준이 아주  낙후되었다. 이는 유라시아철도의 서쪽 마지막 역인 로테르담과 전혀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6. 하이커우(海口, 해구)

 

하이난(海南)성은 일찌기 중앙정부가 친히 지정한 경제특구였고, 하이커우는 바로 그 하이난성의 성회이다. 당연히 많은 정책적인 우대조치와 경제특권이 부여되었다. 1980년대에 대량의 대학졸업생들이 남하하여 하이난으로 왔다. 이 때 하이커우는 번성했고, 도시는 급속히 선전(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까지 되었었다. 그러나 1990년대말에 하이난의 경제버블은 바람이 빠지고, 하이커우는 불경기가 지속되었다. 미완공된 대형빌딩들이 수두룩했다. 하이난성내에서도 산야(三亞)의 명성이 하이커우를 넘어섰다. 산야는 관광업의 발달을 바탕으로 하이커우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5. 우한(武漢, 무한)

 

우한은 청나라말기 양무운동이래로 중국최대의 몇개 공상업도시의 하나였다. 민국시기에 우한은 9개성을 통하는 중심지로써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고, 한때는 "동방의 시카고"라는 명칭을 얻었다. 건국후에도 우한은 전국10대도시의 하나였고, 경제수준도 오랫동안 중국의 랭킹10위내에 들었었다. 그러나, 1990년이래로 우한의 경제는 계속 실패를 겪었다. 텐진처럼 쇠락하기는 하지만 망하지는 않은 것과 비교되었다. 우한은 지금 비록 여전히 20대도시안에는 들지만, 이는 오로지 도시 규모때문이다. 우한의 GDP총량은 일찌감치 10위내에서 빠졌다. 일인당평균수입은 중국의 몇개 대도시중 상당히 낮은 편이다.

 

4. 산터우(汕頭, 산두)

 

산터우는 영국이 아편전쟁이후 강제로 개항하게 하면서 흥성했다. 산터우는 비록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휘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현재의 홍콩, 동남아의 대부호들은 많은 사람의 조적(祖籍, 조상의 호적)이 산터우이다. 개혁개방후 산터우는 역시 중앙정부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서, 중국의 5개 경제특구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20년이 흘렀지만, 산터우는 경제가 붐을 이루지 못했고, 경제수준에서도 광둥(廣東)성내의 동관(東莞), 포산(佛山)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산터우는 공연히 그리많은 해외의 부유한 상인들을 두고 있을 뿐, 그 자신은 점점 보통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3. 하르빈(哈爾濱, 하얼빈)

 

하르빈은 비록 20세기초에 일어난 도시이지만, 발전은 무척 빨랐다. 민국초기 하르빈은 중국의 수퍼대도시가 되었다. 하르빈은 모든 도시가 러시아식건축물로 둘러싸여, "동방의 모스크바"라는 별칭도 얻었다. 당시의 하르빈은 서양분위기가 넘쳤고, 패션은 상하이, 텐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건국후에도 하르빈은 중국의 10대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동북지구의 전체적인 쇠락에 발맞추어, 하르빈도 힘들어졌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10대도시를 언급하면 하르빈을 생각하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2. 난징(南京, 남경)

 

난징을 난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베이징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명나라때 남북이경은 중국의 가장 번화한 도시었다. 민국시대에 난징은 다시 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일본인에 의한 난징대학살이후, 난징은 오랫동안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다. 이로써 오늘날 난징의 곤경이 초래되었다. 난징의 GDP총량은 점차 성내의 수저우(蘇州), 우시(無錫)에 따라잡히게 되었고, 북경과 서로 대응하는 국면을 형성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북경의 GDP는 이미 남경의 3배이다.

 

1. 시안(西安, 서안)

 

서안은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쇠락한 도시일 것이다. 일찌기, 한나라 당나라의 수도로서 중국역사상 800여년동안 수도역할을 했다. 비록 송나라때이후에 쇠락이 시작되었지만, 민국시대에도 시안은 여전히 서북의 패주였다. 건국초기에도 서안은 전국10대도시의 하나였다. 그러나, 현재의 서안은 GDP총량에서 전국의 40위권바깥으로 밀려났을 뿐아니라, 일인당GDP수준도 이미 나중이 일어선 우룸치(烏魯木齊)에 밀렸다. 동시에 서부지구에서도 서안은 충칭(重慶), 청두(成都)와의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