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우근생 : 몽우집단의 총재
많은 사람들은 내 이름에 대하여 호기심을 나타낸다: 성이 "우(牛)"씨인 것이외에, 이름까지 "우근생(牛根生)"이니, 천생 우유사업을 하라고 지은 것이 아닌가.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성(姓)과 업종(業種)이 교묘하게 일치하는 것을 재미있게 생각했고, '정명'이라는 네티즌은 이렇게 추궁하기도 했다: '당신의 원래 본명이 우근생인가요? 아니면 소와 관련있는 사업을 하면서 이름을 고친 것인가요?"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1달도 되기 전에 인생에서 첫번째 굴곡을 겪었다.
1958년, 나는 후허하오터시(내몽고자치주의 주도)의 교외현에 있는 빈농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말단관리를 지냈는데, 생산대의 소대장을 하였다. 그때는 현금으로 공량(公糧)을 납부해야 하고, 부친은 소대장으로서 솔선하여 납부해야 했지만, 돈이 없었다. 어떡할 것인가? 온갖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아이를 팔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섯 아이중 막내였다. 태어난지 1달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부친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나를 팔아버렸다. 가격은 50위안 인민폐였다. 당시의 50위안 인민폐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1위안은 1개의 현대양(現大洋, 銀元)에 해당하였다. 도시사람들은 한 사람이 1달에 5위안이면 생활비로 충분했고, 농촌에서라면 3위안이면 충분했다.
나를 산 양부(養父)의 성은 우(牛)씨였고, 목우(牧牛)를 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소와 풀어지지 않는 인연을 맺은 것이다.
"우근생"이라는 이름도 양부가 지어준 것이다. 양부, 양모는 집안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양자를 들임으로써 뿌리를 갖고 후손을 낳기를 원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근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가정은 아주 특수한 가정이었다: 양부는 해방전에 징용되어 경찰을 한 바 있고, 국민당이 도망치기전에는 어떻게 하여 문서상으로 경장(警長)이라는 허직(虛職)을 부여했다. 양모는 국민당 고관의 첩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특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당시에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가 없었다.
해방전쟁때 양모는 일찌기 자기의 재산을 널리 분산시켰다. 일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그냥 주고, 일부는 맡겨두었다. 동쪽에 조금, 서쪽에 조금 이런 식으로 분산시켜 맡겼다. 1960년대에 생활이 곤란해지자, 양모는 나를 데리고 맡겨둔 물건을 찾으려고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척했고, 우리 모자를 쫓아냈다. 과거의 친구가 지금은 서로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돈이 원래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원수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네것과 내것. 돈있는 것과 돈없는 것. 강의 이쪽과 저쪽. 인정의 따뜻함과 차가움. 유년시대에 나는 이러한 것들을 몸으로 느꼈다. "이것은 체험으로 안 것이지" "배워서 안 것이 아니다"
문화대혁명기간동안 양부, 양모는 끌려가서 비판받았고, 도로를 청소하도록 명령받았다. 모친은 병이 깊어, 도로를 청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모친을 대신해서 청소했다. 나는 그 때 8,9세밖에 되지 않아, 학교친구들이 보고 놀릴까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모친을 대신하여 도로를 쓸었다.
이렇게 했지만, 학교친구들은 그래도 알아버렸다. 나의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모친이 비판받을 때, 나는 옆에서 팔을 붙잡고 같이 서 있었고, 침뱉는 것과 욕하는 것을 받아넘겨야 했다. 학교로 가면,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기분나쁜 일만 있으면 나를 때렸다. 어떤 때는 한 무리를 이루어 나를 돌아가며 때리기도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석에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있는 것이었다. 손으로 막거나 같이 치지도 않고,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여러해 후에 누군가가 물었다. "왜 가만히 있었느냐"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적게 맞는다. 내가 반항했더라면 아마 끝도 없이 맞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도 계속 맞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혼자서는 싸워서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서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내고 다른 아이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친이 나에게 한 두 푼의 돈을 주면 절대 혼자쓰지 않고, 같이 썼다. 결국 다른 아이들이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되자, 내가 뭘 하자고 하면 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를 때리라고 하면 그를 때렸다. 나는 점점 "골목대장"이 되어갔다. 이때부터 이름을 날렸다. 나에게 "재취인산, 재산인취(財聚人散, 財散人聚, 재물을 혼자가지면 사람이 흩어지고, 재물을 나눠주면 사람이 모인다는 말로 우근생의 사업이념으로 알려짐)"이라는 이념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내 생각에는 이 때부터인 것같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완전한 문구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맹아상태였을 것이다.
내가 14살이 되었을 때, 양모가 돌아가셨다. 20세가 되기 전에 양부도 돌아가셨다. 외톨이가 된 나는, 굶기도 하고, 얼기도 하며, 맞기도 하였다. 그 때 나는 구제를 신청하기도 했다. 당의 도움이 없고, 사회각계에서 돌보아주지 않았다면, 나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당에 대한 인식도 몸으로 체득한 것이지, 외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양부가 죽은 후, 아들로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나는 목장으로 들어갔다. 양부는 소를 기르고, 우유를 짠 것이 38년간이었고, 나도 지금까지 소와 함께 28년간 일해왔다. 부자 2대를 합치면 소 사업을 한지 이미 66년이다.
세월이 흐르고, 상황도 바뀌고 사람도 달라졌다. 옛날을 되돌아보면 눈물이 흐를 뿐이다. 양모가 나에게 말했던 두 마디 말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한 마디는 "알고 싶으면 뒤집어보라"는 것이고, 다른 한 마디는 "손해보는 것이 복이고, 이익보는 것은 화이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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