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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경제

진상(晋商)의 성공은 "흑사회화"의 관리때문이었다.

by 중은우시 2007. 4. 16.

글: 범위봉(范衛鋒), 정화령(鄭華玲)

 

중국역사상 진상(산서상인)처럼 행운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천시, 지리에 의거하여 빠른 시일내에 재부의 신화를 최고조로 창조하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산서표호(山西票號)처럼 한번, 두번, 그리고 세번 계속하여 하늘이 준 좋은 기회를 모두 버리고, 미친듯한 집착으로 부스러기과 지꺼기를 지키다가 천재적인 똑똑함으로 가장 멍청한 행동을 한 경우도 드물다.

 

100년후인 지금, 옛날 부상(富商), 거고(巨賈)들이 운집했던 기현(祁縣), 태곡(太谷), 평요(平遙)의 세개 현에는 거대한 저택들만 남아서, 사람들의 관광장소로 되었다. 그러나, 산서표호의 신화가 남긴 것은 그저 이 화려한 폐허만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물거품같은 상업적인 신화를 포장하고 만들어내는 것을 보게 된다. 텔레비전과 소설의 환상에서 '조상들이 일찌기 이루었던 꿈'을 이야기 한다. 

 

아마도 역사의 진실을 찾는 것이 더욱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일지 모른다. 산서표호는 왜 흥성했고, 왜 패퇴했는가? 그러한 신화의 배후에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비참한 결말을 초래했는가?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표호의 비극을 다시 재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할일없는 문인들이 얘기하는 "성신(誠信)", "창신(創新)", "인의(仁義)"는 표호의 진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진상이 반드시 표호는 아니다. 그러나, 진상의 가장 휘황하고, 가장 특출난 것은 바로 표호이다. 다른 업종의 상인은 휘상(徽商, 안휘상인), 절상(浙商, 절강상인)에 비교하면 분명하게 뛰어난 점이 없다. 그래서, 진상을 논하려면, 바로 표호를 논하게 된다. 표호의 기원에 관한 논쟁에서 하나의 전설이 널리 퍼져 있다. 바로 고염무(顧炎武)가 표호를 창립하였다는 것이다.

 

서가(徐珂)는 <<청패류초(淸稗類)>>에서 표호는 고염무가 만들었다고 한 바 있다. 고염무는 부청주(傅靑主)와 반청복명을 위하여 산서일대에 표호를 개설하였다는 것이다. 왜 산서에 표호를 개설하였는가? 반청복명에는 돈이 많이 필요한데, 표호를 통하여 모으고, 자금을 조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산서는 북경에서 가까워서 일단 시기가 성숙되면, 바로 직도황룡(直搗黃龍, 직접 적의 수도를 치고들어가는 것)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호는 은자를 운반하기 위하여 대량의 인마를 동원하여 표물을 호송하므로, 이것은 바로 비밀리에 병사를 훈련시키기 가장 좋은 핑계였다는 것이다.

 

전설은 역사와 다르다. 그러나, 전설의 배후에는 왕왕 문자로 나타나지 않는 역사의 진실이 숨어있는 경우도 있다. 많은 경우에 전설은 정부에서 편찬한 "사실(史實)"보다 더룩 역사적 진실에 접근한 경우가 많다.

 

표호의 관리는 아주 폐쇄적이었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이미 어느 정도 "흑사회화(黑社會化, 조직폭력배화 또는 지하조직화)"의 경향이 있었다. 표호는 실제 기업같지는 않았고, 하나의 비밀군대 또는 하나의 지하방파와 비슷했다. 많은 사람들은 상인이 이렇게 엄밀한 조직을 만들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고, 차라리 고염무라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명성이 뛰어나고 포부가 컸던 두뇌에게 공을 돌리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바로 이런 '흑사회화'관리는 표호에 짧은 번영을 가져다 주었지만, 또한 훼멸의 길로 이끄는 원인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할일없는 문인들이 결론내린 "유상(儒商)", "성신" "창신" "인의"등은 표호의 진실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중국역사상, 잔혹한 투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상대방의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왕왕 "흑사회화"의 과정이 필요하곤 했다. 역사를 들추어보면, 역대의 정변, 모반의 효웅은 방파, 집단, 교파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모두 극도의 "흑사회화"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의 회사, 공장은 그저 직원에 대하여 8시간의 지배권밖에 갖지 못하고, 8시간이외에는 직원이 가서 춤을 추든, 책을 읽든, 싸움을 하건, 연애를 하건 그것은 사생활이고 회사는 간섭할 권한이 없다. 흑사회는 다르다. 그는 너의 모든 시간을 가지며, 심지어 생명까지도 가진다. "그저 단체에 가입하기만 하면, 영원히 단체의 사람이 된다"(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그것은 너의 업무를 지배할 뿐아니라, 너의 오락, 너의 생활, 너의 가정을 지배하며, 너의 취미, 애호와 사상까지도 지배한다.

 

티비드라마 <<교가대원(喬家大院)>>의 대덕통(大德通) 표호의 규정을 보면, 직원이 외지에 파견나가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이다. 직원이 외지에 파견나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의복과 물건은 모두 본부에 등기하여야 한다. 3년후 본부로 돌아왔을 때, 하나하나 대조한다. 3년의 기간이 만료되면, 외지에서 본부로 돌아올 때, 직접 집으로 갈 수없고, 반드시 먼저 표호로 가야 한다. 외지에서 사온 물건은 비록 집안에서 쓰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먼저 본부로 부쳐야 하고, 본부가 물건을 검사한 후에야 집으로 보낸다. "이로써 괜히 의심받을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직원과 집안식구가 상의하여 '잔머리를 굴리는 것'을 막는 것이고, 공금으로 개인의 배를 불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직원은 본부에 편지를 쓰는 것을 금지한다. 만일 공적인 일이면, 반드시 지정한 책임자가 지정한 사람에게 쓰게 된다. 만일 사사로운 일이면, 밀봉하지 않은 편지만 쓸 수 있고, 밀봉한 서신은 쓸 수가 없다. 이것은 지방제후가 "조정대신"과 방파를 결성하거나, 우두머리에게 불쾌한 일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엄밀하게 통제된 조직에서, 고압적인 수단 뿐아니라 따뜻한 보살핌도 있다. 직원이 외지에 근무하러 나갈 때의 출장비는 표호에서 지급한다. 이것은 조정보다 낫다. 조정관리는 부임하면, 출장비는 자기가 부담한다. 표호는 자주 노잣돈을 관리들에게 지급하곤 했다. 외지의 표호직원에게 병이 생기면 인삼 녹용등의 보약뿐아니라, 의료비는 모두 표호가 부담했다.

 

흑사회에는 흑화(黑話)가 있고, 학술계에는 학술용어가 있고, 이론계에는 모델공식이 있다. 표호에도 그들의 암호와 비밀기호가 있다.  표호는 "표만 인정하지,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認票不認人)". 위조방지수법도 속속 개발되었고,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외부에서는 알기 힘들었다. 나중에 성선회(盛宣懷)가 연 중국통상은행(中國通商銀行)도 죽어라 산서표호의 인재를 빼갔다. 원세개가 연 은행학당에서도 산서에서 60여명의 표호직원을 빼갔다. 이런 흑화식의 수법은 위조방지작용이외에도, 다른 상인들이 이 장사를 넘보지 못하게 하는 "호성하(護城河)"의 역할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일승창(日昇昌)의 표호에는 "창(昌)"이라는 수인이 있다. 은표를 쓰는 필적에도 암호를 남긴다, 어뜬 자는 획처리를 하면서 숨기기도 하고, 횡, 수, 뻗침, 삐침등이 모두 암호가 될 수 있다. 은표의 어떤 귀퉁이에는 하나의 바늘구멍을 내기도 한다. 백성들은 은표를 봐도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 위에 쓴 것은 모두 비밀문자,기호이기 때문이다. "근방가표모취, 물망세규서장(謹防假票冒取, 勿忘細規書章)"의 12개 글자는 12개월을 표시하는 것이고, "감소세정박, 천도최공평, 매심도자리, 음모해타인, 선악종유보, 도두필분명(堪笑世情薄, 天道最公平, 昧心圖自利, 陰謨害他人, 善惡終有報, 到頭必分明)"의 30자는 1달내의 30일을 표시하는 것이다. "생객다찰간, 짐작이후행(生客多察看, 斟酌而後行)"은 사실 "1,2,3,4,5,6,7,8,9,10"이다. "국보유통(國寶流通)"은 "만천백십(萬千百十)"이다. 이러한 비밀기호는 일정한 시간마다 교체하여 외부사람들이 이를 풀 수 없도록 한다. 회표(匯票)는 한번 지급되면, 즉시 폐기한다. 지금까지 단지 1장의 일승창 표호가 1860년에 발행한 회표만이 세상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방식의 신비성은 같은 시기의 모건, 베어링은행을 훨씬 초월한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산서의 표호는 모건이나 베어링보다 총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은 잊어버린 것이 있다. 총명한 것이 바로 지혜는 아니라는 것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등급이 삼엄하고, 상벌이 분명해야 한다. 표호안의 70%의 직원은 어려서부터 시작하고 학도(學徒, 수습기간)기간동안에는 그저 식사만 해결해주고 급여는 없다. 학도기간이 끝나면, 1년의 급여가 몇냥에서 일,이십냥이다. 일어나는 것은 닭보다 먼저 일어나고, 일하는 것은 소보다도 힘들며, 잠드는 것은 개보다 늦다. 버는 것은 겨우 잔돈 부스러기이다. 협성건(協成乾) 표호의 급여목록에 따르면 광서32년에 이 표호의 14%의 직원은 급여가 없는 학도였다. 그리고 30%는 화이트칼라, 골드칼라였고, 심지어 다이아몬드칼라도 있었따. 협성건의 급여는 36개등급이 있었는데, 아주 총명하고 성실한 젊은이가 학도부터 시작하여, 한걸음 한걸은 36계단을 걸어올라가려면, 1년에 1급씩 승진한다고 하더라도, 최고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반백이 넘은 늙은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일단 "정신고(頂身股, 지분)"를 보유하는 직급에 오르면, 이는 월스트리트의 '파트너'와 같고, 더 이상 급여로 먹고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신고"는 산서표호에서 가장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는 발명품이다. 표호의 지분은 두 가지이다. "은고(銀股)"와 "신고(身股)"이다. 은고는 투자자가 낸 돈이고, 신고는 직원이 투입한 인력자본이다. 표호안의 정신구는 적은 수치부터 많은 수치까지 있다. 광서32년의 협성건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중에 33%는 "정신고"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은고가 신고보다 많다. 신고는 은고의 절반정도이다. 후반기가 되면, 신고의 수량은 은고를 이미 넘어선다. 1906년, 협성건 표호의 신고의 수량은 은고의 130%에 이르렀다. 1908년에 대덕통 표호의 신고의 수량은 은고의 120%에 이르렀다. 이 해에 학전, 고옥, 여영화 세 사람의 신고는 1인당 1고(1주)에 이르렀다.

 

당시 표호의 1고(1주)는 재부상 현재 상장회사의 1주와 비슷하다. 1908년, 대덕통의 은고는 모두 20주였다. 1908년 대덕통의 1주당 이익배당은 2만냥이었다. 2만냥이 얼마인가? 청나라때 친왕이 매년 받는 돈이 1만냥 정도였다. 1품관리의 연봉이 겨우 180냥이었다. 급여는 적고 쓸 데는 많으므로 청나라의 공무원은 양렴은(養廉銀)의 형식으로 급여에 추가해서 주었는데, 총독의 양렴은은 13000-20000냥에 이르렀고, 순무는 10000-15000냥에 이르렀다. 지부(知府)는 몇천냥이다. 모두 대덕통 장궤의 이익분배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 이익분배를 받을 뿐아니라, 죽어도 돈을 벌 수 있다. 대덕통의 직원은 죽은 후에도 몇년동안 이익분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신구는 1리에서 3리는 3년, 4리 5리는 4년이다. 만일, 학전, 고옥과 같은 고위경영진은 7년간 '살아있는 사람'처럼 대우받을 수 있다. 이런 제도의 설계자는 분명히 천재이다. 그의 목적은 바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표호를 위하여 목숨을 걸어라. 그래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탐욕은 무궁무진하다. 표호의 장려시스템은 내부의 부패횡령, 범죄행위를 막아내지 못했다. 신해혁명후에 표호들이 줄줄이 무너질 때, 표호의 높은 대우를 누리고, 신고를 가지고 있던 경영진, 장궤들은 돈을 가지고 도망치고, 직장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광서초년, 산서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었다. 순무인 증국전이 진연국(晋捐局)을 만들어 각성의 구호자금을 모았다. 오고가는 돈은 모두 산서표호를 거쳐 현금화되었따. 4년후, 큰 사건이 터졌는데, 거흥원 표호의 가세원, 차약룡의 두 사람이, 관부의 관리들과 결탁하여, 구호자금을 숨기고 먹어버린 것이다. 조사해보니 2만냥은자가 비어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돈을 빼먹었을 뿐아니라, 표호 자신의 돈도 빼먹었다. 제일의 표호로 이름있는 일승창에도 "여경창(餘慶昌)"이라는 비밀구좌가 오랫동안 존재했고, 이것은 대출을 놓아서 이익을 취하였다. 여경창은 신고를 가진 화이트칼라, 골드칼라의 비밀금고였다. 이는 오늘 날의 비자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금의 존재는 표호의 과학관리라는 거품을 파괴해버렸다.

 

표호에는 많은 듣기좋은 규칙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의 진상은 의문이 있다.

 

표호에는 듣기에 아름다운 많은 규칙이 있다. 학자, 문인들이 열정적으로 추켜세우는 것들이다. 친구간에 대출을 하지 말라, 윗사람은 한쪽을 편들지 말고, 아랫사람은 함부로 하지 말라. 사치낭비를 금지한다. 아편을 금지한다. 도박, 기방출입을 금지한다....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집행된 실상은 의문이 많다. 1907년 11월 영구(營口)의 대착유상(大搾油商)인 동성화오련호가 파산했다. 이 대형 상인은 산서표호에 200여만냥의 은자를 빚졌다. 청산때 절반도 회수하지 못했다. 바로 이 사건에서 표호의 직원과 동성화와 결탁한 스캔들이 밝혀졌다. 그리고 투자자가 장궤들과 아편에 찌들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는 표호가 나중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일승창의 뇌리태(雷履泰)는 만년에 대권을 혼자 장악했고, 일세를 풍미했다. 일부 권세를 쫓는 부하들이 그에게 본부에 기념누각을 만들자고 건의했고, 누각중간에 편액을 걸자고 했다. 어떤 사람은 "경영유방(經營有方)"이로 적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일증월성(日增月盛)"이라고 적자고 했다. 이것은 모두 뇌리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젊은 친구가 "발호기췌(拔乎其萃)"라고 건의했다. 뇌리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가가대소를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발호기췌'를 제안한 직원에게 바로 신고 2리를 주었다. 산서표호의 "독문무기"이던 신고제도는 이제는 지도자가 마음에만 들면 주는 물건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엄밀하게 통제된 조직은 반드시 폐쇄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폐쇄성은 역시 재난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최초에 3년간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규정은 교통조건의 제한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기차가 생기고, 배가 생기면서 교통이 편리해졌다 .그러나, 표호본부는 각지 직원들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이 이 낡은 규칙을 지켰다. 이로써 많은 인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표호규정에는 "근검박소(勤儉朴素)"라는 것이 있으나, 이는 일찌감치 형태만 남게 되었다. 일승창의 개봉분호의 경리인 구태기(邱泰基)는 말을 잘하고, 접대를 잘했다. 개봉의 순무, 번사와 결의형제까지 맺었다. 아문을 드나들기를 자기 집처럼 하였다. 한해는 그가 개봉에서 평요의 본부로 돌아올 때, 하남에서 출발하여 녹위(綠圍)의 4명이 드는 가마를 타고 앞에는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돌아갔다. 마치 관리가 행차하는 것같았다. 평요의 홍택역참에 도착했을 때, 역참의 사람은 큰 관리가 온 줄알고 급히 평요지현에게 보고했다. 지현은 지방관리를 대동하고 성문을 나와서 영접했다. 나와서 보니 일승창의 일개 분호경리였던 것이다. 이 구경리는 표호규정에 따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개봉이서 상해로 승진해갔다.

 

"흑사회화"는 왕왕 효과가 있다. 그러나 효율이 없다; 속도는 있으나 자주 방향을 잘못잡는다.

 

"흑사회화"관리는 왕왕 지도자의 박력이 충분히 체현된다. 한마디만 하면 그대로 집행된다. 칼산, 불바다라 하더라도, 총탄이 비오듯이 쏟아진다고 하더라도, 전진하는 것이다. 부하들은 지도자의 영명함과 은혜를 많이 입었으므로 가르시아에게 보내는 편지(A message to Garcia, Elbert Hubbard 1899년 저작)를 배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흑사회화'는 왕왕 효과는 있지만 효율은 없다. 속도는 있지만 방향을 잃어버린다.

 

진상의 나중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바로 이런 "흑사회화"의 "고효율", 중앙집권, 통일지휘로 대장궤의 한마디 말이 다수의 부하들의 정확한 의견을 무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1908년 울태후(蔚泰厚)의 각지 분호의 소장파들이 계속 글을 올려 시대에 맞게 은행을 열자고 건의했지만, 대장궤 모홍한(毛鴻翰)은 이것을 어떤 사람이 이를 핑계로 권력을 빼앗으려는 것으로 인식하고, 단연히 거부했다. 이로써 표호의 활로는 막혀버린다.

 

산서표호의 '투자자'와 '장궤'의 관계는 널리 칭송되는 장점이다. 이는 실제로 거대한 블랙유머이다. 주주를 존중하지 않고, 그저 경영진만이 중요한 기업은 아마도 단기간의 번영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생명은 절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서방 경영학자들의 근본원칙이고 "불문율"이다. 누구든지 이 "불문율"을 어긴다면 커다란 댓가를 부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