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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경제

안휘민공(安徽民工): 주삼각(珠三角)에서 장삼각(長三角)으로

by 중은우시 2007. 3. 20.

글: 신식시보(信息時報) 2007년 3월 20일자 보도

 

중국의 노무수출 대성중의 하나인 안휘성의 최근 들어 노무수출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그 중 2006년도에는 수출량이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이중 70%이상이 소주, 절강, 상해등의 장삼각(장강 삼각주)지구로 향하고 있다. 안휘 부양(阜陽)에서 출발하는 민공들의 대다수는 항주, 상해등지를 선택하고 있고, 이와 비교하자면, 주삼각(주강 삼각주)으로 향하는 쪽은 조금 분위기가 썰렁한 편이다.

 

3월 1일 새벽, 부양역의 광장에는 수만명의 농민공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한풍에도 큰 보자기를 들고, 짐을 지고, 노천 매표소의 입구에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임시로 만든 실외의 3개의 발매창구는 항주, 상해 그리고 동관(東莞, 광주와 심천의 사이에 있는 도시)으로 가는 임시열차표였고, 농민공을 위한 전용열차표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3개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3개의 줄은 그 길이가 전혀 달랐다. 항주쪽으로 가는 줄은 동관쪽의 5배나 길었고, 상해쪽으로 가는 줄은 동관쪽보다 2배가 길었다.

 

부양에서 떠난 임시열차중 60%는 항주(장삼각)로 가는 것이었고, 광주쪽으로 가는 것은 15%에 불과했다고 한다. 금년에 "농민공전용열차"가 도착하는 곳은 영파, 상주, 남창등지도 있었지만, 광동지역으로 가는 것은 동관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하남 주구의 왕씨는 부양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항주로 간다. 그는 항주에서 2년간 집안인테리어업무를 하였다. 왕씨의 손녀도 할아버지를 따라 이번에 항주로 일하러 떠난다. 그녀는 서비스업종을 노리고 있다. 예를 들어 의류판매점의 판매원이나, 슈퍼마켓의 영업사원등이다. 부양사람인 이림도 항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는 의류공장에서 양모옷을 3년간 만들었다. 이림에 따르면, 공장에는 지금 10여명의 같은 고향 자매들이 있는데, 3명은 작년 7월에 광동 순덕의 공장에서 옮겨왔다고 했다.

 

이림은 항주는 부양에서 가깝고, 열차표도 구하기 쉬우며, 동일한 업종의 임급수준도 주삼각지구보다 높을뿐아니라, 시간외근무도 적고, 치안환경도 비교적 좋다고 하였다. 이림이 말한 것이 바로 그들의 속내이다. 부양의 농민공은 장삼각을 선호하는데,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전국의 평균수준과 비교하면 장삼각지역이 임금수준이 높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이외에, 치안, 권리보호, 인정미등도 농민공의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양 이장의 이씨는 온주에서 원래 일하였는데, 집안에 일이 있어서 돌아왔고, 구정을 지낸 후에 다른 고향사람들처럼 원래 공장으로 급히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대신 그는 부양현지의 노동시장에서 임시공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 한편 온주의 사장에게도 자리를 남겨달라고 해놓고, 집안 일이 끝나면 돌아가겠다고 말해 두었다.

 

이씨는 양복을 만드는 숙련공이고, 기술은 몇년전에 동관에서 일할 때 하나하나 배워서 익힌 것이다. 그러나, 2003년, 그는 같은 고향사람들과 함께 광동에서 전부 철수했고, 절강 온주에 자리잡았다.

 

왜 농민공들이 주삼각을 떠나는가? 이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일찌감치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서 일한 축에 속하는데, 당시 떠날 때는 모든 사람이 주삼각지역으로 갔었다. 같은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곳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 때는 사천사람이건 강서사람이건 현지의 다른 사람이건 모두 광동으로 모였다. 그래서 그들도 고향사람들을 따라 광동으로 갔었다.

 

광동에서 그들은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에는 1달에 겨우 400-500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고생을 하면서라고 기술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 때 동관의 의류공장의 사장은 홍콩사람이었는데, 의류는 만드는대로 수출했으며, 품질요건이 까다로왔다. 스스로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공장내에서 열심히 일했고, 점점 양복만드는 기술을 터득해갔다. 나중에 기술수준이 높을 수록 그는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공장으로 옮겨다녔다. 그러나, 이씨는 금방 광동내에서는 전체적으로 급여가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씨는 농촌에서 도시로 간 것은 고생을 각오한 것이고, 원래 얼마나 더 힘든지는 따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연해지역에서 여러해를 있다보면 금방 도시사람들의 생활방식에 젖어들게 되고, 자기의 생활수준을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이때부터 임금을 적게 주는 공장이나 사장이 가혹한 곳에는 가지 않게 되고, 임금이 너무 높은 곳도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곳은 노동강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임금수준이 중급이면서, 노동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은 곳이었는데, 이런 곳을 주삼각지구에서는 찾기가 어려워 졌다.

 

그래서, 이씨와 같이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눈을 다시 이제 막 제조가공업을 시작하는 장삼각지역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광동은 개방시간이 빨라서, 사장들도 모두 잔머리를 많이 굴리기 때문에, 광동에서는 조금만 잘못하면 사장들에게 속기 쉽상이었다. 동시에 광동의 소비수준은 다른 곳보다 비싸서, 광동에서는 절강보다 200-300위안을 더 받는다고 하더라도, 저축할 수 있는 부분은 이렇게 많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광동에서는 구정에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일하면서 1년에 한번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데, 그것도 돌아가지 못하면 너무 괴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강이라면 기차표가 없더라도, 버스를 타고서라도 광동보다는 쉽게 고향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차라리 온주에서 일하지, 광동으로는 가지 않게 된 것이다.

 

부양시 노동빌딩의 노무수출직업소개센터는 노동빌딩의 2층에 있다. 모두 12개의 전문 노무수출직업중개회사가 있는데, 이 직업소개소들은 매년 공장들이 부양에 와서 노동자를 채용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고, 매번 노동자 1명을 소개해줄 때마다 500위안씩을 받았다.

 

환구직업소개중심이라는 곳에는 노동자들대우표가 붙어 있는데, 항주와 광주의 두 공장이 제시하는 임금이나 대우는 거의 비슷했다. 항주의 어느 방직공장은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100명을 뽑는데, 1400-2200위안/월의 급여, 숙식제공이라고 명시해 두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양오토바이공장도 100명을 뽑는데 급여는 1200-1800위안/월이고, 숙식을 제공하는지도 명시하지 않았다. 이 직업소개소의 책임자에 따르면 이전에는 그들이 광주, 동관의 업무를 주로 하였는데, 올해는 상해, 항주의 업무를 주로 한다는 것이다. 장삼각의 업무비율이 이미 70%를 넘어섰다고 했다.

 

양광직업소개소의 조홍건은 이렇게 말했다. 주삼각지역에는 사영기업과 외자기업이 많은데, 노동강도가 높고, 스트레스가 심하면서 임금대우는 상대적으로 낮다고 하였다. "똑같이 전국에서 소비가 가장 높은 두개의 도시이지만, 상해의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은 810위안/월이고, 심천은 690위안/월이다. 상해는 일반적으로 먹고자는 것을 모두 해결해주지만, 심천은 자는 것만 해결해주고 먹는 것은 해결해주지 않는다. 현재 농민들이 계산한 것에 의하면 하루에 식사하는데 최소한 4위안이 들게 되므로 1달이면 그것만 120위안이다. 비록 똑같이 1200위안/월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상해로 가서 일하려고 하지, 심천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구정이 지나면 다시 노동자를 뽑아야 한다. 비록 아직도 주삼각지역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가지만, 수량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 특히 금년 구정이후에 외래노동자의 부족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광주, 동관등지의 일부공장에는 노동자를 구하지 못해서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반대로 장삼각도시의 외래노동자들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예전의 "돈벌기천당"이었던 주상각이 왜 이렇게 우세를 상실하게 되었는가?

 

불산의 작년 봄에 183개 기업을 샘플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매년 유실되는 노동자는 28,500명이나 된다고 하며, 유실인원수는 노동자 총수의 27%에 달한다고 한다.

 

광주 해주구의 서보촌은 전형적인 도시내의 시골이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도 수천개의 의류공장이 있고, 관할지역내의 유동인구가 5만여명에 이른다.

 

해주구 서보촌의 길가에는 인력초빙광고가 곳곳에 붙어 있다. 공장입구, 담벼락에 모두 밝은 종이에 검은 글자로 노동자모집이라고 쓰여 있다. 도시의 공익선전판에도 공장의 구인광고가 줄을 잇는다. 그 중에 모 공장의 광고는 아주 특색이 있었다. 노동자모집정보외에 이 공장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본 공장에 오는 사람에게는 1사람당 200위안을 드립니다. 본 광고는 장기간 유효함" 광고의 아래에는 공장의 주소와 연락전화를 쓴 쪽지를 가득 붙여놔서 한 사람씩 떼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광동지역에서는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 공장은 거의 없어보였다. 한 의류공장에서는 30여대의 기계가 있는데, 절반이상은 놀고 있었다. "현재 사장은 바깥으로 사람구하러 갔습니다. 사람을 못구하면, 이 기계들도 돌릴 수 없습니다" 이 의류공장에는 원래 40여명의 노동자가 있었는데, 구정때 30명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되돌아온 사람은 8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공장의 이런 차가운 분위기와는 달리, 서보촌내의 인도는 아주 활기찼다. 인도에는 노동자를 구하는 공장들로 가득찼고, 그들은 모두 노동자모집광고를 들고 서 있었다. 노동자모집광고에는 급여 얼마, 조건이 어떤지가 자세히 쓰여 있었다. 급여대우이외에 공장의 식당, 숙사를 찍은 사진도 같이 선전물에 붙여 놓았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자기의 제품을 가지고 와서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과 급여계산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300미터도 되지 않는 이 인도에는 237개의 구인공장이 있었고, 옆의 좁은 길에도 노동자를 데려가려는 차량으로 가득차 있었다. 적지 않은 차주들은 아직도 차유리에 "노동자 10명모집, 구정귀향비용지급, 왕복시 공장전용차량으로 보내줌"

 

이러한 노동시장은 백운, 증성, 화도등에도 모두 섰다고 한다.

 

불산의 노동자부족현상도 심각하였다. 음력 1월 14일, 불산의 몇몇 공장들은 여전히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무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하여, 공장에서는 문앞에 붉은 종이에 구인광고를 냈을 뿐아니라, 사람을 보내어 여러 곳의 공고난에 구인광고를 냈지만, 며칠동안 오는 사람이 많이 않았다고 한다.

 

순덕버스역은 역에서 내리면 바로 여러 가구공장에서 "현장구인" 광고를 접하게 된다. 용강진의 어느 가구공장의 인사책임자는 춘절후에 100여명이 필요한데 아직도 30여명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래서 버스역이나 기차역에 사람이 많이 다니고, 오가는 농민공이 많아서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순덕 용계진의 한 가전제품생산공장은 "음력 1월 8일전에 공장으로 오면 200위안의 상여금지급, 정월 15일전에 공장으로 오면 100위안의 상여금지급"이라고 써붙였다. 몇몇 사람은 앞에서 서성였지만, 결국은 공장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동관은 주삼각지구의 유명한 국제제조업도시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노동자모집이 큰 문제였다. 구정이 지난 후 이 곳의 민공부족현상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전자제품으로 유명한 동관시 장안진에서는 고속도로입구를 나서자 마자 2개의 인재시장이 있다. 바로 "지통인재시장"과 "회안인력시장"이다. 예전에는 이 곳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동관상천전제제품공장은 일본계기업이고, 소니에 소형모터와 플라스틱장난감을 생산하여 납품하고 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그들이 원하는 보통노동자는 찾아오지를 않았다. 이 공장은 현지에서 급여수준이 가장 높은 편인데도 지금 30%정도의 인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회사사람들도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동관시신과전자공사의 부스의 인사부 담필성은 그 공장은 10000명이상의 보통노동자가 필요한데, 지금 겨우 몇천명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안진의 인재시장 책임자에 따르면, 이날 공장들이 요구하는 일자리는 4만개 정도였는데, 찾아온 사람은 8000명정도라고 한다. 동관의 날로 악화되는 구인난에 대하여 인재회사의 유운비 경리는 이렇게 말한다. "몇년전, 우리는 매일 공장의 인사경리를 찾아가서 사람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공장의 인사경리들이 우리에게 와서 사람을 구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한번 요구하면 수백 수천명인데, 우리가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은 찾아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