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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욱달부(郁達夫)의 결혼이야기

by 중은우시 2007. 1. 3.

 욱달부와 왕영하

 

욱달부(1895-1945) : 현대작가. 원명은 욱문(郁文). 절강 부양(富陽) 사람.

1913년 일본유학. 1923년 곽말약, 성방오등과 창조사(創造社)를 설립. 백화무 소설집 <<침륜(浸淪)>>을 발표. 1922년 귀국후 북경, 무한 등에서 교편을 잡음. 1927년 상해거주, 1930년 중국자유운동대동맹설립. "좌련(左聯)"에 가입. 1933년 항주로 옮김. 싱가포르등지에서 항일활동. 1945년 일본헌병에 의하여 수마트라에서 살해당함.

 

1. 소년 욱달부

 

욱달부는 중국현대문단의 대각이고, 창조사의 주요한 발기인중의 하나이다. 그의 일생은 문학애호가들에게 많은 인구에 회자하는 명작을 남겼는데, 소설, 산문, 시사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동시에 그는 애정과 혼인에서도 특이한 경력을 보여주어 후세 사람들에게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욱달부가 이름을 날리게 된 소설집 <<침륜>>은 일찌기 청년시기의 성에 대한 고민을 나타냈고, 영혼과 육체의 충돌을 그려 일세를 풍미했다. 글중에서 성억압을 받고 고민하는 청년이 바로 실제 생활에서의 그, 즉 욱달부 자신이었다. 욱달부가 쓴 글들에 의하면 그가 13세 되던해 부양고등소학을 다녔는데, 이 때 성의식에 눈을 떴다. 그래서 이웃집의 "조씨소녀"와 '물과 같은 봄날의 그리움"의 첫사랑을 느낀다. 이 물과 같은 담담한 첫사랑을 그는 2년가량 동심을 흔들어 놓았다. 나중에 조씨소녀가 다른 사람과 정혼하면서 그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다. 동일한 시기에 그는 또한 청아등 두 명의 아가씨에게서도 유사한 연정을 느낀다.

 

나중에 욱달부는 일본으로 가는데, 일본ㅇ학기간중에도 후등륭자, 전매야, 옥아등의 여인들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다. 후등융자는 욱달부의 글에서 "융아(隆兒)"라는 애칭으로 불린 여자인데, 욱달부가 하숙하던 부근에 사는 아가씨였다. 욱달부는 매번 학교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 그녀의 집을 지나가는데, 거기서 연정이 싹텄고, 그녀를 위하여 4수의 시를 지었다. 전매야는 나고야 여관의 여종업원인데, 욱달부는 그녀와도 몇 달을 사귀고,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시를 써준다. 옥아도 역시 여종업원인데, 욱달부는 그녀에게 사랑의 시를 써주는데,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욱달부는 풍류적이고 낭만적이며 정이 많았다. 1921년 안경의 안휘법정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에는 기녀 해당(海棠)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주 깊이 사귀었다. 그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성밖의 해당 아가씨의 사는 곳에 갔다. 어떤 때는 수업이 빨리 끝나면 성문으로 가서 성문이 열리기를 꾹 참고 기다리곤 했다. 이 시기에 욱달부는 소설 <<망망야>>를 썼는데, 이 소설을 보면 당시 그의 생활을 알 수 있다. 여자주인공의 이름이 해당인데 바로 욱달부와 사귀던 그 해당이다. 남자주인공은 우질부(于質夫)인데 당연히 욱달부 자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2. 왕영하와의 해후

 

욱달부의 첫번째 결혼은 아주 전형적인 구식결혼이었다. 즉, 부모의 명에 따라 결혼한 것이다. 1917년, 욱달부가 일본에서 돌아와 고향으로 갔을 때, 모친의 명에 따라 부양의 여자 손전(孫筌)과 정혼한다. 욱달부가 당시에 쓴 시로 보면 그는 비록 부모의 명을 따라서 강제로 하는 결혼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 손전이라는 아가씨도 괜찮은 점이 있었던 것같다. 1920년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하였는데, 욱달부가 우겨서 혼인식은 거행하지 않는다. 1921년이후 손전은 욱달부를 따라 그가 교직에 있던 안경, 상해, 북경 등지를 따라다녔다. 욱달부가 왕영하를 만난 것은 바로 이 손전이 북경에서 보내준 양피옷을 입고 있을 때였고, 손전은 출산의 고통에 시달릴 때였다. 1927년 6월 5일, 욱달부는 왕영하와 정혼한다. 손전은 욱달부와 별거를 선언한다. 이후 손전은 자녀를 데리고 부양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욱달부의 모친을 모시고, 자녀들과 함께 산다. 이후 육식을 금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1978년에 죽을 때까지 생활한다.

 

욱달부의 두번째 부인은 바로 유명한 왕영하(王映霞)이다. 1926년 12월 15일, 상해 창조사 출판사는 혼란에 빠졌다. 욱달부는 광주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왔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1927년 1월 14일, 일본유학시의 친구인 손백강의 집에서 왕영하를 만나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왕영하는 키가 컸고, 피부가 희었다. 얼굴도 둥글었고 눈은 추수와 같았으며, 코도 높았다. 몸은 약간 풍만했고, 곡선미가 있었으며 몸매가 아주 고왔다. 항주여중과 항주여자사범에 있을 때 그녀는 항상 교화(校花, 학교의 꽃)으로 이름을 날렸고, 당시 항주사대미인중 첫머리에 꼽혔었다. 욱달부는 첫분에 발하여 계속 만나자고 하였고, 이로써 두 사람의 전기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욱달부가 왕영하를 쫓아다닐 때의 기끔과 연애, 우울과 방황, 그 방랑과 고백은 모두 그의 글로 남아 있다. 1927년 6월 5일, 욱달부와 왕영하는 항주 취풍원 식당에서 정식으로 정혼하고, 다음해 2월 상해에서 결혼하며, 3월에 상해 혁덕로(지금의 상덕로)에서 함께 생활한다. 결혼후 욱달부와 왕영하는 청빈하고 고요한 생활을 하였지만, 1936년의 욱달부의 글에서도 두 사람은 10년이 지났지만 서로 깊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부부간의 반목

 

전란으로 인하여 욱달부는 복건으로 가서 일을 하고, 왕영하는 모친과 세 아들을 데리고 부양, 여수, 한구등으로 피난다녔다. 이 기간동안 두 사람은 심하게 충돌한다. 한번이 두번이 되고, 두번이 세번이 되면서 수습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 1938년 7월 5일에 욱달부는 한구의 <<대공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성명으로 발표한다.

 

"왕영하 여사 보시오: 난세에 남녀가 헤어지고 만나는 것은 원래 통상적인 일에 속하고, 그대와 모군과의 관계, 그리고 장신구 의복, 현금, 계약서등을 가져 나간 것은 모두 문제삼지 않겠소. 그저 그대의 모친과 아이들을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니 주소를 알려주기 바라오. 욱달부 근계"

 

여기서 말하는 "모군"은 바로 절강성 교육청의 청장이었던 허소체(許小예)이다. 허소체는 당시 막 상처하였고, 세 딸을 데리고 여수에 있었으며, 왕영하와 아침 저녁으로 만났다. 욱달부는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 허소체의 편지를 발견하고는 분노를 폭발시켰으며, 부부싸움을 벌였다. 왕영하는 집을 나갔고, 욱달부는 화가나서 신문에 위의 글을 실은 것이다. 나중에 친구들이 조정을 하고, 욱달부와 왕영하도 어느 정도 누그려져서 이 소동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금은 더 이상 메꿔지지 못했다. 결국 동남아에 가 있을 때 욱달부는 <<훼가시기>>라는 글에서 왕영하와 허소체의 사건을 언급했고, 왕영하도 <<한 긴 편지의 시작>>과 <<사실을 보시오>>라는 글을 통해서 이에 대응했다. 신문에서의 파란이 일면서, 이 부춘강의 한 쌍의 아름다운 부부는 결국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협의이혼"을 하게 된다. 왕영하는 싱가포르에서 홀로 귀국하였고, 욱달부는 아들 욱비(郁飛)를 데리고 계속 싱가포르에 거주했다. 1945년 일본헌명에게 살해당할 때까지 동남아를 돌아다녔다. 왕영하는 나중에 화중항업국의 경리인 종현도와 결혼한다. 당시 혼례는 매우 호화스러웠다고 한다. 2000년 12월 왕영하는 사망한다.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즉 말레이시아 페낭섬에서 온 가수 옥교(玉嬌)로 인하여 욱달부와 왕영하의 결혼이 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1939년 1월1일, 욱달부는 <<성주일보>>의 편집을 맡은 동시에, 말레이시아 페낭 섬에 가서 이 신문의 자매지인 <<성빈일보>>의 창간행사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가수인 옥교를 만난다. 전해지는 바로는 옥교는 마치 왕영하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의 왕영하는 이미 세 아이의 엄마이고, 전쟁으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으며, 고생을 많이 하여 이미 예전같지 않았다. 옥교의 젊고 예쁜 모습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욱달부는 옥교에게서 왕영하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으며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고 한다. 왕영하가 그 사정을 알고는 원래 암초에 부딪쳐 있던 혼인을 결국 끝장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4. 문학과 사랑

 

왕영하가 싱가포르를 떠난 후, 욱달부의 마음은 아주 고독하고 퇴락한다. 이 때 한 아름다운 여자 아나운서 이소영(李小瑛)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의 가을연못같은 마음에 다시 한번 파랑이 있다. 이소영은 이 때 26살이었고, 그녀는 욱달부의 문학적 재능을 앙모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욱달부에게 사랑을 표현했다. 욱달부는 이 때 그 사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바로 마음이 맞았으며, 얼마 되지 않아, 이소영은 욱달부와 "계약"을 해서 욱달부의 집안에 들어가 생활한다. 욱달부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며 자기의 서재를 이소영에게 내준다. 암중으로 실질적으로 동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욱달부가 그녀를 로마의 역사학자 Livius의 영문명칭을 따서 Livy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자주 독일어로 Ich Liebe Dich라는 말로 사항을 표시하곤 하였다. 그러나, 욱달부의 아들인 욱비가 부친과 이소영의 결합을 극력 반대하는 바람에 욱달부는 이소영과 결혼까지 하지는 못했다. 1941년 12월, 이소영은 고통을 안고 욱달부의 집을 떠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이소영은 자바섬으로 갔고, 욱달부는 수마트라로 도망친다. 그는 이 때 <<난리잡시>>를 창작하는데, 그 중의 앞의 7수가 바로 이소영을 그리워하며 쓴 것이다.

 

욱달부의 세번째 부인은 하려유(何麗有)이다. 이 새 부인의 원적은 광동이고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부친의 성은 하(何)이고, 어렸을 때 진씨에 양녀로 들어갔다. 그래서 원명은 진련유(陳蓮有)였다. 용모도 보통이었고,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중국말도 몰랐다. 욱달부는 "하려지유(何麗之有,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는가)"라는 의미로 그녀에게 하려유라는 이름을 주었다. 당시에 욱달부는 일본인의 박해를 피해 도망중이었으므로 이름을 조렴(趙廉)으로 바꾸고 인도네시아의 친구가 경영하는 술집에 있었다. 욱달부가 해를 입고 나서야, 하려유는 욱달부가 중국문화계의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단순히 술집 사장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문학과 사랑은 욱달부의 문학에서 표리의 관계이다. 사랑의 격정은 원래 그의 혈액중에 이미 융화되어 있었던 것같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언제든지 사랑이 격발되는 상황이 있었고, 그러고 나면 그것을 문학창작으로 표현하였다. 쓰고 나면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동시에, 그의 연애경력은 그의 문학명작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