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고궁박물원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베이징고궁박물원, 타이페이고궁박물원, 이 두개는 세계 최고수준의 문화재를 수장하고 있는 저명한 박물관들이다. 원래는 하나였는지, 둘로 나뉘어졌다. 이것은 20세기 중엽 중국의 비극이다.
1911년 10월 10일,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손중산이 이끄는 혁명당은 청나라황조를 전복시키고, 중화민국을 건립했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는 퇴위하였으며, 청실우대조건에 따라, 여전히 자금성내에 거주하였다. 13년후인 1924년, 풍오강은 대청황제의 칭호를 폐지하고, 부의를 황궁에서 쫓아냈다. 역대황제등 소수인들이 즐기든 대량의 진귀한 보물들이 국민정부의 소유로 되었다. 총리인 황부는 내각회의를 주재하여, "청실선후처리위원회"를 만들고, 일련의 전문가와 학자를 초빙하여 궁내재산을 정리했다.
위원회는 "청궁물건조사규칙" 18개조문을 만들었다. 내용은 아주 면밀하였고, 청나라황실문화재 조사확인의 근거가 되었다. 타이페이고궁박물원의 고문이며, 90세인 나지량(那志良)의 회고에 의하면, 한 사람이 조사하면, 한 사람이 등기하고, 한 사람은 번호표를 달았다고 한다. 위에는 조장이 있는데, 모두 정부기관에서 파견되어 나왔다. 그들은 전문가는 아니지만,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감시하는 사람도 두었다. 조사할 때는 흡연을 금했고, 단독행동도 금했으며 함께 나오고 함께 들어갔다. 소변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물건을 몰래 훔쳐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궁안에 얼마나 많은 진귀한 보물이 있었는지는 황제 본인도 잘 몰랐을 것이다. 부의가 16살때, 건복궁일대의 창고지붕에서 대량의 문화재를 발견했다. 모두 건륭의 수장품이었다. 건륭이 사망할 때 이 곳에 넣고 봉해버린 것이어서, 세상이 나오지 않았었다. 부의는 이런 보물을 보면서 놀라서 감탄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진 것일까?"
학자, 전문가, 도와주는 학생들의 힘들고 세심한 일처리를 거쳐, 1년여의 시간만에, 청궁내 물품의 정리, 조사, 등기, 번호, 등록업무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부 물품을 골라서 공개적으로 전시하였다. 1925년 10월 10일, 자금성은 고궁박물원으로 되었고, 전문적으로 역대황제의 문물을 수장 전시하는 곳이 되었으며, 백성들에게 개방했다. 이로부터 청나라궁중내의 모든 물건은 가구나 집기도 모두 새로운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고궁박물원이 수장한 문화재는 기본적으로 송, 원, 명, 청 4대의 황제들이 수집하여 궁중에 모아놓은 진귀한 보물들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하, 상, 주이래로 일관된 것이었다. 자고이래로, 모든 왕조의 황제는 희세진보를 수장했고, 이로써 정통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주나라 진나라때는 구정(九鼎)이 있었다. 한나라때는, 황제는 이미 전문적으로 진귀한 보물을 수장하는 설비를 갖추었다. 서한시기의 석거각(石渠閣), 기린각(麒麟閣)등이 그것이다. 처음에 황궁의 수장품은 대다수가 옥기, 청동기였다. 위진이후, 서화, 도자기 등이 황제의 수장 시야에 들어왔다.
왕조교쳬와 전쟁이 빈번해짐에 따라, 궁중문물도 일부는 파괴되었고, 일부는 잃어버렸다. 일부는 민간에 흩어졌다가 다시 궁중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강행초설도>>를 들 수 있다.(현재 북경고궁박물원 수장). <<강행초설도>>는 남당의 궁중화가 조알의 작품이다. 먼저 '풍류천자'인 송휘종이 수장했다. 나중에 금장종의 손에 들어간다. 원나라가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민간에 흘러든다. 명나라 초에 황궁에 들어오고, 청나라초에 다시 민간으로 흘러들어간다. 청나나 건륭제때 다시 궁중에 들어왔다. 이리하여 마침내 현재 고궁박물원의 수장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제국주의침탈로 지금도 외국박물관에 놓여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대영박물관의 <<여사잠도>>가 그것이다.
모든 황제수장가들 중에서, 송휘종과 청건륭은 가장 감상능력이 뛰어났던 황제들이다. 고궁문화재의 수장에 그들의 공을 잊어버릴 수 없다. 송휘종은 중국고대의 유명한 서법가이고, 청건륭도 서법에 뛰어났다. 그들이 재위할 때, 널리 골동과 서화를 수집했다. 송휘종이 기초를 닦고, 청나라 건륭이 집대성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경고궁에는 근 만 칸의 방이 있는데, "삼희당(三希堂)"은 원래 양심전 귀퉁이의 작은 서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세 개의 희세진품이 보관되어 있어 이름을 날린다. 청나라 강희때, 오랫동안 민간에 유실되어 있던 서성 왕희지의 <<쾌설시청첩>>(현재 타이페이고궁박물원 소장)이 황제에게 헌상된다. 건륭11년, 또 다시 왕희지의 조카의 <<백원첩>>(현재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이 건륭에 헌상된다. 이어서 왕헌지의 <<중추첩>>(현재 북경고궁박물원 소장)은 이미 궁중에 있었으므로 왕씨 일문의 3개의 서법첩이 모두 건륭에게 모인 것이다. 이 황제는 기쁨을 참지 못했고, 그가 생활하는 양심전의 한귀퉁이에 서재를 지어서 이 세 건의 희세진보를 보관하면서 이름을 "삼희당"이라고 붙였다.
건륭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서첩은 <<쾌설시청첩>>이었다. 그리하여 이 첩위에 커다랗게 "신(神)"이라는 글씨를 써놓았다. 그리고 다른 종이에는 "신수기점(神手技點)"이라고 써서, 아끼고 존경하는 정을 나타냈다. 매번 눈이 오는 날이면, 건륭제는 삼희당에서 <<쾌설시청첩>>을 감상했다고 한다. 흥이 일었을 때는 산수화 <<희지관아도>>를 그려서 왕희지가 거위들이 연못 속에서 수영하는 것을 구경하는 모습을 그렸다. 왕희지는 거위가 목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붓을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다는 고사를 그대로 그린 것이다.
고궁박물원이 생긴지 얼마되지 않아서, 전쟁의 검은 구름이 중국을 뒤덮었다. 1931년 "9.18"사변이 벌어진다. 일본군은 3개월만에 중국의 동북지대를 전부 점령한다. 1932년 일본은 다시 부의를 내세워 '만주국'을 만든다. 이로써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겠다는 야욕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화북, 화동은 다음 번 침략목표가 된다. 중국정부는 고궁박물원의 문화재를 상자에 넣어서 남쪽으로 이송하고, 상해조계지역에 두어 전화를 피하기로 결정한다.
<<고궁칠십성상>>이라는 책의 기록에 의하면, 고궁의 문화재의 남으로 운송하는 계획이 나온 후에 사회각계는 찬성했다. 왜냐하면 북경(당시 북평)은 금방 전장터로 변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화재가 파괴될 우려가 컸다. 토지는 잃어도 다시 찾으면 되지만, 문화재는 일단 파괴되면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유는 고궁문화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힘들다는 점 때문이었다. 어떤 과격한 인사는 문물을 남으로 옮기는 것은 정부가 북경을 포기하겠다는 징조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민심이 요동했다. 가장 격렬했던 사람은 주조상이었다. 그는 일찌기 호남성 대리성장, 고궁 고물진열소 소장을 지낸 사람이다. 고궁문화재의 운반을 막기 위하여 그는 중남해에 민중보호고물협회를 조직해서 스스로 회장이 되고, 연설을 하고, 전단을 돌렸으며, 여러차례 무력으로 문화재의 운반을 막겠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유언비어가 떠돌았고, 문화재를 차에 실어 옮기기만 하면, 철로에 폭탄을 설치해서 열차를 폭파시키겠다고도 했다. 당시 고궁박물원의 원장을 맡고 있던 역배기(易培基)는 방안을 강구해서 행정원 대리원장인 송자문에게 전보를 보냈고, 송자문은 북경시장에게 영을 내렸다. '군중을 선동하고, 치안을 위해한다'는 이유로 주조상을 구금시킨다. 그리고 일련의 안전조치를 취한 후에 문화재를 남쪽으로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었다.
당시 20여세된 나지량은 고궁박물원의 가장 젊은 과장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궁문물 운송, 보관과정에 참여하였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1933년 2월 6일 새벽, 고궁박물원의 제1차 남운(南運) 문물상자가 군대의 엄밀한 보호하에 북경역 특별열차에 실었다. 그 중에는 도자기 1058상자, 옥기 158상자, 청동기 55상자, 서화 128상자, 및 대량의 문구, 인장, 칠기, 유리제품, 그리고 도서, 문헌이 있었다.
이런 고궁문화재는 상해조계지역에 보관되었다. 1937년 원단, 고궁박물원 남경분원이 준공되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남경으로 운송하게 된다. 그러나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7일, 노구교사건이 폭발하고, 일본군은 전면적으로 중국을 진공한다. 전화는 곧 남경으로 번질 태세였다. 이런 긴박한 형세하에, 국민당 정부는 다시 고궁문물을 서남의 안전지구로 소개하기로 결정한다. 2조로 나누어, 섬서, 호남, 사천등지로 보냈다. 나지량은 제1조의 책임자였다. 8월 14일 떠나서, 제1차문물을 장사로 운송한다. 긜고 호남대학도서관에 보관한다. 일본 비행기가 장사상공으로 날아왔으므로, 안전하지 못했으므로, 12월 나지량은 다시 문물을 배에 싣고 사천의 산으로 옮겨가서 보관한다. 개략 1개월후, 호남대학도서관은 일본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심하게 파괴된다. 나지량은 탄식하며 말한다: "다행이 우리가 빨리 도망쳐서 망정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몇십년후, 나지량은 아직도 문물을 운송할 때의 어려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동차로 운송하는데, 1차에 20상자의 문물을 실었다. 아주 골치아팠다. 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차를 구할 수 없었고, 차가 있으면 기름이 없었다. 기름이 있으면 길이 끊어졌다..."
원래 보계(寶鷄)로 운송할 예정이던 문물은 당시 적당한 보관장소를 찾지 못해서, 트럭에 싣고 남으로 내려왔다. 진령을 넘어 한중을 지나 성도까지 운송했다. 마지막 문물은 배에 싣고 남경을 떠난다. 장강을 따라 위로 운행하여, 중경으로 간다. 이것이 바로 12월 8일의 일이다. 5일후에 남경은 일본군에 의하여 함락된다.
이 문물들은 각각 사천, 귀주의 깊은 산속에 보관했고,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다시 남경으로 모았다. 오래지 않아, 해방전쟁이 시작되었고, 해방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장개석정권은 흔들흔들하였다. 그래서 그 중 4000여상자 약 70만건의 문물(일설에는 2792상자 약 65만건)을 골라서, 1948년 12월 22일부터 3차에 나누어 대만으로 운송한다. 보관지점은 남투현 무봉산의 북구창고였다. 나지량은 문물을 따라 대만으로 갔다. 그리고는 다시는 북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군이 장강을 넘어 남경에 들어갔다. 남아있던 9000여상자 약 100만건의 문물은 북경고궁박물원으로 옮긴다.
1965년 11월, 타이페이 교외 양명산 자락의 쌍계에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이 낙성식을 했다. 이는 남경 중산릉의 건축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지하1층과 지상3층은 궁전식 건축이다. 대만이 고궁박물원 문물을 수장하고 전시하는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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