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1933년 동북 청방(靑幇)의 방일사건 시말

by 중은우시 2007. 3. 10.

글: 손강(孫江)

 

"9.18"사변후, 동북(만주)지방의 정치판도는 급격히 변화했다. 250만이라고 자랑하던 청방(靑幇)은 그 두목이 일본관동군의 통치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서했다. 그리고 청방의 사회적인 영향력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933년 7월, 근대 중일관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동북청방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한 것이다. 대표단 일행은 6월 28일 심양을 출발하여, 조선을 거쳐, 7월 1일 동경에 도착한다.

 

청방방일단은 동경에 도착한 후, 일본제국정부의 접대를 받는다. 7월 3일, 육군성, 해군성, 외무성, 문부성과 탁무성(拓務省)은 공동으로 동경회관에서 성대한 환영만찬을 열었다. 환영회에 참석한 것은 육군성에서 차관인 유천(柳川)등 14명이었고, 해군성에서는 차관인 등전(藤田)등 12명, 외무성에서는 아주국장인 장곡정지(長谷正之)등 6명, 문부성에서는 차관 율옥(栗屋)등 5명, 탁무성에서는 차관 하전(河田)등 3인이었다. 이외에 학자, 종교인사, 재계인사, 관료 및 당시 만주국의 주일공사등 모두 40명이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지나학"의 창시자인 동경제국대학의 교수 백조고길(白鳥庫吉)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백조는 중국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청방을 환영하는 초대회에 출석할 수 있었는가? 다음 날 발생한 하나의 사건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7월 4일과 5일, 동경지구(東京芝區)의 증상사(增上寺)에서 연속하여 두 번의 청방연구회가 개최되었다. 참가자들은 방일단 일행외에 전날 환영회에 참석했던 백조고길, 가등현지(加藤賢智), 상반대정(常盤大定), 소류사기태(小柳司氣太)등 저명한 학자, 종교인사, 육군성 참모본부직원 및 다른 분야의 대표등 모두 40면이었다. 연구회는 청방 대표가 청방의식으리 보여준 후, 일본측 참가자들이 청방대표와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마지막으로, 저명한 신도학자(神道學者)인 가등현지는 "가리교(家理敎, 동북지방에서는 청방을 가리교라고도 불렀다)는 하나의 자력종교이며, 이교의 타력종교와 다르다. 뿌리를 쫓아보면 가리교의 근원은 선종(禪宗)이다"라고 단언했다.

 

중국에서, 일반 백성들은 청방을 두려워하고 멀리한다. 법적으로, 어느 한 정부도 청방의 지위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청방은 비록 "흑사회(黑社會, 조직폭력단)"에 이르지는 않지만, 적어도 '종교'조직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본의 일류학자들은 청방을 '종교'로 인정하는 것일까? 이것은 동북청방이 어떻게 방문단을 조직하여 일본을 가게 되었고, 어찌하여 일본제국정부의 환영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아야 알 수 있다.

 

청방의 방일단 구성원은 10명, 수행원 4명, 일본가이드 3명, 모두 17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 대표

 

봉천(심양)대표 : 풍간민(馮諫民, 靑幇21字輩, 48세), 왕조휴(王兆庥, 청방21자배, 55세), 장신보(張新甫, 청방21자배, 44세), 조헌정(祖憲庭, 청방22자배, 48세), 임경신(林慶臣, 청방23자배, 54세)

신경(장춘)대표 : 여만빈(呂萬濱, 청방21자배, 60세), 상옥청(常玉靑, 청방22자배, 49세)

영구대표 : 학상신(相臣, 청방22자배, 55세)

하얼빈대표 : 조경록(趙慶祿, 청방22자배, 63세)

법고문대표 : 양우산(楊宇山, 청방22자배, 55세)

 

2. 수행인원

 

오태순(신경), 학준화(영구), 강국본(관동주금주), 평세신(봉천)

 

3. 가이드

 

평야무칠, 취기연태, 길촌지정

 

동북지방의 청방도 다른 지역의 청방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동북청방도 친속관계의 원리로 결합하여 이루어져 있다. "자(字)"혹은 "배(輩)"는 구성원의 신분과 상호관계를 표시한다. 성원은 각각 "흥무육(興武六), "흥무사(興武四)", "가해위(嘉海衛)", "강회사(江淮泗)", "가백(嘉白)", "항삼(杭三)"등의 "방(幇)"에 나누어 소속된다. 여기의 "방"은 종족제도중의 "방"과 비슷하다. 전24배의 마지막 4글자는 각각  "대(大)", "통(通)" "오(悟)" "학(學)"이다. 10명대표단의 구성원중 "대"자배가 4명, "통"자배가 5명, "오"자배가 1명이었다. 만일 당시 상해의 청방두목들과 비교하면 1사람만 비교적 낮은 "오"자배에 속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배분이 모두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방의 방일구성원은 동북에서 각자 세력을 가지고 있을 뿐아니라. 내륙의 청방과도 크고 작게 연결되어 있다. 방일대표단의 수석대표이고 자칭 "만주국재가리총대표"인 풍간민(馮競歐라고도 한다)는 일찌기 장작림 군대에서 육군소장을 지냈고, 양우정, 장종창등과 함께 청방자20배의 왕약슬(王約瑟)을 사부로 모셨다. 왕약슬은 산동성 택현 사람인데, 소문에 의하면 천주교도이다. 북경, 천진일대에 많은 제자를 두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제22자배의 상옥청은 강소성 북부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상해일본공장의 "두목"이었다. 1932년 5월, "1.28"사변후, 상옥청은 호립부와 갑북에서 친일 "시민유지회"를 조직하였다. 이로 인하여 호립부는 국민당의 상해 특무에 의하여 암살된다. 상옥청은 감히 상해에 더 머무르지 못하고, 대련으로 도망친다. 상옥청은 대련에서 5년을 머문다. 상옥청은 대련청방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사부인 조유산(曹幼珊)의 청방내에서의 관계를 그를 많이 도와준다. 조유산은 산동사람이고, 오랫동안 상해에 머물렀다. 상해의 저명한 청방인물이다. 동북의 산동이민들중에서도 적지 않는 제자들이 있었다. 상옥청은 1937년 12월 상해로 돌아가고, 일본낭인들과 "황도회(黃道會)"를 조직하여 항일인사들을 암살한다. 1938년, 상옥청은 남경에서 "안청동맹회"를 설립한다. 1946년 5월, 매국노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기소장에는 동북에서의 활동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1931년, 일본관동군은 "9.18"사변을 일으킨 후 금방 동북삼성을 장악한다. 동북정치판도가 급변하자, 청방두목들은 청방을 불교조직이라고 칭하면서, 일본관동군의 통치를 도우겠다고 나선다. 일본인들은 청방의 사회적 영향력을 주의한다.

 

1933년 3월, 주정영장이라는 대륙낭인이 심양에서 "대만주국정의단"을 조직한다. 주정은 야심이 컸다. 청방의 관계망을 활용하여 조직을 확대하여, 일거에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대만주국정의단"은 각지의 청방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한다. 심양청방의 조헌정, 장춘청방의 여만빈 및 "전만총대표"인 풍간민등과 "합작관계"를 건립한다. 소위 "합작관계"는 사실 '대만주국정의단'이 청방을 이용하는 것이었고, '대만주국정의단'의 구성원이 청방에 가입한 것은 청방을 흡수하려는 수단에 불과하였다. 바로 이런 관계로 인하여 수개월후 '대만주국정의단'의 구성원은 관동군을 설득하여 청방방일단이라는 일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청방대표단의 방일은 궁지구위라는 일본인과 관련이 있다. 원래, 궁지는 일본본토기병부대에서 단장을 지냈는데, 퇴역후, "동경사회사업협회 융화부장" "중국융화사업협회 이사"등의 직위를 지냈으며, 전문적으로 일본'부락민'을 안치시키는 일을 하였다. 일본에서, '부락민'은 사회정치적으로 차별을 받는 무리를 가리킨다. 명치유신이후, 일본은 근대민족국가통합이라는 목표를 실현한 후에도, '부락민'의 처지는 그대로였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한 후, 군부는 대량의 '부락민'을 동북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한다. 일본은 일본에서 차별을 받는 '부락민'들을 동북지방에 이민시킨 후 중국인들의 차별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여, 궁지를 동북에 보내서 이민의 가능성을 검토하게 한다.

 

이 때, 일본관동군은 동북점령계획을 추진하는 동시에, 어떻게 중국사회를 통합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만주국의 "오족협화"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골몰했던 귤박은 관동군당국에 상해조계의 방식을 배울 것을 건의한다. 청방을 보호하고 개혁시킴으로써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적들에 대하여도 대응하는 것이다. 귤박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나의 비밀결사와 자선결사>>의 작자인 미광고의는 청방을 개조하여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 인하여, 궁지가 처음 동북에 가서 조사할 때, 그의 시선이 청방에 쏠린 것은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궁지가 동북에 도착한 후, 먼저 두 명의 일본인을 만난다. 한 명은 취기연태였다. 취기는 상해동아동문서원을 졸업했고, 만주국 치안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 취기를 통하여, 궁지는 평야무칠을 알게 된다. 평야는 대륙낭인이었고, 청방회원이었으며, "대만주국정의단"의 구성원이었다. 결과적으로, 취기와 평야는 궁지를 통하여 관동군을 설득하고, 금방 청방의 '합법'적인 활동에 대하여 허가를 받는다. 그리고, '청정흥민동지회'라는 청방조직을 결성한다. 그 목적은 동복청방(자칭 250만)을 통합하는 것이었고, '대만주국정의단'과 일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동북군벌 장작림의 통치시기에 '합법'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던 청방은 일본통치하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관동군본부는 세 사람의 설득하에 청방조직에 자금을 지원하여 일본을 방문하도록 한다. 청방대표들이 일본제국식민교륙을 받고 나중에 일본,만주국과 제휴하도록 하려고 한다.

 

그러나, 청방방일단이 일본에 10일간 체류한 후인 7월 11일, 돌연 해산을 명령받고, 동경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고 통고받는다. 일행은 할 수없이 몇몇으로 나누어 동북으로 되돌아간다. 융중한 환영의식을 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왜 이렇게 황급히 마무리지은 것일까? 그 중의 이유에 대하여는 길정청춘이라는 사람이 청방의 방일단을 이용하여 명성을 얻으려고 활동하고, 취기, 평야등은 사사로이 관동군이 지급한 경비 약 1500원을 횡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본육군과 해군측면에서 다른 곳에서 얻은 정보에 따라, 관동군이 극력 추천하고 종교집단이라고 했던 방일단이 실제는 중국역사상 명성이 좋지 않은 '비밀결사'인 청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해프닝은 끝났다. 그래서 대표단의 가이드였던 일본인들의 행위가 문제있다는 핑계를 대고 대표단을 해산시킨 것이다.

 

일본학자인 야촌호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의 근대역사는 중국에 대한 인식의 실패의 역사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사건만 보더라도, 전쟁전의 일본은 중국역사와 현실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강력한 주관적인 편견이 존재했었다. 그들의 중국인식은 왕왕 중국의 현실에서 벗어난 천박과 무지를 보이기도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청방방일단사건이 바로 그 예이다.